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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Nov 08. 2021

아버지답지 못한 사람을 아버지라 불러야 하는 힘듦 1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부럽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부러웠습니다.

비록 부르지는 못하지만, 아버지라 부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아버지다운 아버지를 둔 것이니까요.

조선시대, 아니 불과 40-50년 전만 해도 아버지는 집안의 절대 권력자였습니다.


굳이 남존여비 사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엄마는 아버지에 비해 모든 면에서 약한 존재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입니다.

엄마나 자녀들은 아버지로부터 모든 지원을 받아야만 했으니까요.


권력을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대부분의 아버지는 독재자는 아니었습니다.

가정을 이끌고, 가족을 돌보는 아버지다움을 가진 분들이었기에

가족들이 아버지를 따르고, 아버지의 말씀은 모두 옳다고 여겼었지요.


아버지다움이 무엇일까요?

제가 자랄 때와 제 자녀가 자랄 때는 시대가 다르기에 이것에 대한 정의도 다를 것입니다.

저는 제가 자랄 때를 기준으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 등등의 감정은 가족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것이기에 빼고,

최소한 다음의 조건을 갖추는 것이 아버지다움입니다.

- 외부의 해로운 것들로부터 가족들을 지키는 울타리

- 가족들이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궁핍하게 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돈을 버는 경제 전문가

- 가족들이 해를 당했을 때 나쁜 사람들을 혼내주는 슈퍼맨

- 자녀가 가야 할 길을 일러주는 길잡이

- 자녀가 된사람이 되도록 소양을 키워주는 훈장님

-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솔선수범하여 해결하는 해결사


비록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하지 못하는 세대가 우리 세대지만,

우리의 자녀들보다는 아버지의 마음과 고충을 더 잘 알만큼

대부분의 아버지는 아버지다움을 갖추었었습니다.


저는 오늘 제 치부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아무리 도려 내고 도려 내도 사라지지 않고 기억 속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불현듯 나와서 괴롭히는,

몸속에 박혀있는 폭탄들을 터뜨리려고 합니다.


ㅇ 엄마가 저를 임신하셨을 때, 

아버지는 자신의 씨가 아니라고 의심하셨었습니다.

시달리던 엄마는, 결국 저를 지우기로 결심하고 한약방에서 약을 지어다가 한 달을 드셨지만

제가 끈질기게 버텼는지 결국 지우지 못하고 나으셨고,

막내 고모가 아버지에게 "발을 봐보쇼. 딱 오빠 발이구만"이라고 말하여 논란은 종결되었었습니다.


ㅇ 시장에서 작은 가게를 얻어 장사를 했는데, 아버지는 집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집은 궁핍하고 엄마는 고생을 하는데 아버지는 뭘 하고 다니셨는지...


ㅇ 8살 때, 엄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장사를 해야 하는디 아부지가 어디 가는지 몰래 따라가서 보고, 엄마한티 와서 말해라"

아버지를 미행했습니다. 

엄마가 하라고 하셨으니 무조건 하는 것이지요.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8살짜리가 아버지 몰래 뒤를 따른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것을 잊어버린 상태이지만, 이때 미행한 길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검색해보니 집에서 아버지가 도착한 곳까지 성인 걸음으로 21분, 차로 7분 거리네요.

엄청난 긴장도 있었지만, 몰래 미행한다는 것과 엄마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즐거움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었거든요.


아버지는 한참을 걸어서(당시에는 주 교통수단이 자전거나 걷기였죠. 먼 거리는 버스) 가끔 가던 극장 옆 가게로 들어가셨습니다.

저는 엄마께 알려드려야 했기에 열심히 달려서 엄마께 알려드렸고, 

엄마는 저를 앞세우고 아버지가 들어간 가게로 갔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신 곳은 시중드는 여자들이 있는 술집이었고, 

그날도 두 분은 크게 싸우셨었지요.

그 이후로 다시는 미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ㅇ 8살 때, 엄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ㅇㅇ 여인숙에 가면 아버지가 있을 것이니 모시고 와"

여동생 둘과 함께 셋이 아버지를 모시러 갔습니다.

아버지는 노름 중이셨고, 

옆에 아저씨가 삼십 원을 주시면서 '아버지 이따가 가신다고 전해드려라'라고 해서 그냥 집으로 왔습니다.


ㅇ 집 형편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육성회비를 제때에 내지 못할 정도였지요.

저는 학용품 하나라도 아주아주 아껴 썼었습니다. 

남이 버린 몽당연필도 볼펜 대롱에 꽂아서 썼고, 공책은 표지부터 썼고 한 칸당 두세 줄을 썼습니다.

이 생활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해야만 했습니다.

중고등학교 수학여행도 가지 못했습니다. 돈이 없었거든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짐자전거로 쌀 배달을 했습니다. 

중학교 때는 80킬로 쌀 한 가마니를 등에 짊어지고 아파트 5층까지도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집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했었습니다.


ㅇ 아버지는 은행에서 더 이상 빌릴 수 없게 되자 여러 명에게서 사채까지 썼습니다.

장사도 잘 되었고,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다 점점 부자가 되어 가는데,

우리 집은 점점 가난해지는지 당시에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는 숫자도 못 읽는 까막 눈이셔서 외상 장부도 직접 적지 못하시고 다 외우셨다가

제가 학교에서 오면 저에게 불러 주시면서 적으라고 하셨었는데,

아버지는 그런 엄마만 가게에 남겨 놓고 어디론가 자주 사라지셨었습니다.


ㅇ 9살 때 어떤 아이와 싸웠습니다.

그 아이 엄마가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저를 마구 야단치셨습니다.

그 때 제 아버지가 오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주눅이 잔뜩 들어있던 제 어깨에 힘이 들어갔겠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오시자마자 저를 야단치시더니 집으로 끌고 가셨고, 

'저런 싸울 가치도 없는 놈하고 싸우냐.' 며 호통을 치셨습니다.

다른 말도 하셨는데 이 말 외에는 기억이 안나네요

지금 생각하면 자식의 가치를 높게 쳐 주신 말일 수도 있는 것 같은데,

너무 슬펐었습니다.


ㅇ 국민학교 5학년 때 11살 위 누나가 결혼을 했었습니다.

자형이 자신이 차던 시계를 줬는데, 처음 가져보는 시계라 너무 좋았지요.

몇 달 후 시계가 멈췄습니다. 아무리 밥을 줘도(태엽을 감아주는 거죠) 살아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일요일에 밝은 밖에서 시계를 풀어서 확인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그 모습을 봤습니다.

'이 놈이 공부는 안 하고 시계만 가지고 놀고 있어. 이리 내' 하시더니 시계를 가져가셔서

시멘트 바닥에 사정없이 패대기를 치셨습니다. 시계는 박살이 났지요.

저는 며칠을 혼자 울었었습니다.


ㅇ 학교 다녀오자마자 집안일을 돕고 나서야 숙제나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12시 넘기 전에 잠을 자면 아버지에게 혼나기 때문에 졸릴 때는 책상다리에 제 다리를 묶어 놓았습니다.

누우면 깊은 잠이 들어 아버지가 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까 봐.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50개 정도 되는 잡곡 대야를 가게 밖으로 내어 놓고 정렬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잠은 무엇에게도 양보 안 합니다.

매일 아침 엄마께서 깨우셔서 일어나는데, 

하루는 조금만 더 잔다는 게 30분을 넘게 자버렸습니다.

다시 부르는 엄마 목소리에 깨서 깜짝 놀라 가게로 가보니 이미 대야는 밖으로 다 나와 있었고,

우리 셋은 초 긴장 상태로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화가 나 있었고,

중1인 저와 국 5, 국 3인 여동생 둘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가게 앞 시멘트 도로에서

10여 분간 엎드려뻗쳐 기합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기합이 힘들거나 아버지가 원망스럽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남자지만 여동생들은 더 힘들고 더 창피했을 것입니다.


쓰다 보니 기억 속에 들어있는 것이 생각보다 많네요.

나누어서 써야 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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