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부럽다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는' 홍길동.
부러웠습니다.
비록 부르지는 못하지만, 아버지라 부르고 싶어 한다는 것은 아버지다운 아버지를 둔 것이니까요.
조선시대, 아니 불과 40-50년 전만 해도 아버지는 집안의 절대 권력자였습니다.
굳이 남존여비 사상을 들먹이지 않더라도,
엄마는 아버지에 비해 모든 면에서 약한 존재였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집안의 경제를 책임지고 있었다는 것이 가장 큰 이유가 될 것입니다.
엄마나 자녀들은 아버지로부터 모든 지원을 받아야만 했으니까요.
권력을 가지고 있었을지라도 대부분의 아버지는 독재자는 아니었습니다.
가정을 이끌고, 가족을 돌보는 아버지다움을 가진 분들이었기에
가족들이 아버지를 따르고, 아버지의 말씀은 모두 옳다고 여겼었지요.
아버지다움이 무엇일까요?
제가 자랄 때와 제 자녀가 자랄 때는 시대가 다르기에 이것에 대한 정의도 다를 것입니다.
저는 제가 자랄 때를 기준으로 생각해보고자 합니다.
가족에 대한 사랑 등등의 감정은 가족 구성원이라면 누구나 가져야 하는 것이기에 빼고,
최소한 다음의 조건을 갖추는 것이 아버지다움입니다.
- 외부의 해로운 것들로부터 가족들을 지키는 울타리
- 가족들이 잘 살지는 못하더라도 궁핍하게 살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 돈을 버는 경제 전문가
- 가족들이 해를 당했을 때 나쁜 사람들을 혼내주는 슈퍼맨
- 자녀가 가야 할 길을 일러주는 길잡이
- 자녀가 된사람이 되도록 소양을 키워주는 훈장님
- 어려운 문제가 생겼을 때 솔선수범하여 해결하는 해결사
비록 아버지와 대화를 많이 하지 못하는 세대가 우리 세대지만,
우리의 자녀들보다는 아버지의 마음과 고충을 더 잘 알만큼
대부분의 아버지는 아버지다움을 갖추었었습니다.
저는 오늘 제 치부를 드러내고자 합니다.
아무리 도려 내고 도려 내도 사라지지 않고 기억 속 어딘가에 숨어있다가 불현듯 나와서 괴롭히는,
몸속에 박혀있는 폭탄들을 터뜨리려고 합니다.
ㅇ 엄마가 저를 임신하셨을 때,
아버지는 자신의 씨가 아니라고 의심하셨었습니다.
시달리던 엄마는, 결국 저를 지우기로 결심하고 한약방에서 약을 지어다가 한 달을 드셨지만
제가 끈질기게 버텼는지 결국 지우지 못하고 나으셨고,
막내 고모가 아버지에게 "발을 봐보쇼. 딱 오빠 발이구만"이라고 말하여 논란은 종결되었었습니다.
ㅇ 시장에서 작은 가게를 얻어 장사를 했는데, 아버지는 집에 있는 날보다 없는 날이 더 많았습니다.
집은 궁핍하고 엄마는 고생을 하는데 아버지는 뭘 하고 다니셨는지...
ㅇ 8살 때, 엄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나는 장사를 해야 하는디 아부지가 어디 가는지 몰래 따라가서 보고, 엄마한티 와서 말해라"
아버지를 미행했습니다.
엄마가 하라고 하셨으니 무조건 하는 것이지요. 왜 그래야 하는지도 모르지만...
8살짜리가 아버지 몰래 뒤를 따른다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많은 것을 잊어버린 상태이지만, 이때 미행한 길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납니다.
검색해보니 집에서 아버지가 도착한 곳까지 성인 걸음으로 21분, 차로 7분 거리네요.
엄청난 긴장도 있었지만, 몰래 미행한다는 것과 엄마의 지시를 충실히 이행하는 즐거움도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무슨 짓을 하는지 몰랐었거든요.
아버지는 한참을 걸어서(당시에는 주 교통수단이 자전거나 걷기였죠. 먼 거리는 버스) 가끔 가던 극장 옆 가게로 들어가셨습니다.
저는 엄마께 알려드려야 했기에 열심히 달려서 엄마께 알려드렸고,
엄마는 저를 앞세우고 아버지가 들어간 가게로 갔습니다.
아버지께서 가신 곳은 시중드는 여자들이 있는 술집이었고,
그날도 두 분은 크게 싸우셨었지요.
그 이후로 다시는 미행을 하지 않았습니다.
ㅇ 8살 때, 엄마께서 말씀하셨습니다.
"ㅇㅇ 여인숙에 가면 아버지가 있을 것이니 모시고 와"
여동생 둘과 함께 셋이 아버지를 모시러 갔습니다.
아버지는 노름 중이셨고,
옆에 아저씨가 삼십 원을 주시면서 '아버지 이따가 가신다고 전해드려라'라고 해서 그냥 집으로 왔습니다.
ㅇ 집 형편은 너무 어려웠습니다. 육성회비를 제때에 내지 못할 정도였지요.
저는 학용품 하나라도 아주아주 아껴 썼었습니다.
남이 버린 몽당연필도 볼펜 대롱에 꽂아서 썼고, 공책은 표지부터 썼고 한 칸당 두세 줄을 썼습니다.
이 생활은 고등학교 졸업할 때까지 해야만 했습니다.
중고등학교 수학여행도 가지 못했습니다. 돈이 없었거든요.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짐자전거로 쌀 배달을 했습니다.
중학교 때는 80킬로 쌀 한 가마니를 등에 짊어지고 아파트 5층까지도 올라갈 수 있었습니다.
집에 도움이 되는 것은 무엇이든지 했었습니다.
ㅇ 아버지는 은행에서 더 이상 빌릴 수 없게 되자 여러 명에게서 사채까지 썼습니다.
장사도 잘 되었고, 시장에서 장사하는 사람들은 다 점점 부자가 되어 가는데,
우리 집은 점점 가난해지는지 당시에는 알 수가 없었습니다.
엄마는 숫자도 못 읽는 까막 눈이셔서 외상 장부도 직접 적지 못하시고 다 외우셨다가
제가 학교에서 오면 저에게 불러 주시면서 적으라고 하셨었는데,
아버지는 그런 엄마만 가게에 남겨 놓고 어디론가 자주 사라지셨었습니다.
ㅇ 9살 때 어떤 아이와 싸웠습니다.
그 아이 엄마가 어디선가 나타나더니 저를 마구 야단치셨습니다.
그 때 제 아버지가 오시는 것이 보였습니다.
주눅이 잔뜩 들어있던 제 어깨에 힘이 들어갔겠지요.
그런데, 아버지는 오시자마자 저를 야단치시더니 집으로 끌고 가셨고,
'저런 싸울 가치도 없는 놈하고 싸우냐.' 며 호통을 치셨습니다.
다른 말도 하셨는데 이 말 외에는 기억이 안나네요
지금 생각하면 자식의 가치를 높게 쳐 주신 말일 수도 있는 것 같은데,
너무 슬펐었습니다.
ㅇ 국민학교 5학년 때 11살 위 누나가 결혼을 했었습니다.
자형이 자신이 차던 시계를 줬는데, 처음 가져보는 시계라 너무 좋았지요.
몇 달 후 시계가 멈췄습니다. 아무리 밥을 줘도(태엽을 감아주는 거죠) 살아나지 않았어요.
그래서 일요일에 밝은 밖에서 시계를 풀어서 확인하고 있는데 아버지가 그 모습을 봤습니다.
'이 놈이 공부는 안 하고 시계만 가지고 놀고 있어. 이리 내' 하시더니 시계를 가져가셔서
시멘트 바닥에 사정없이 패대기를 치셨습니다. 시계는 박살이 났지요.
저는 며칠을 혼자 울었었습니다.
ㅇ 학교 다녀오자마자 집안일을 돕고 나서야 숙제나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12시 넘기 전에 잠을 자면 아버지에게 혼나기 때문에 졸릴 때는 책상다리에 제 다리를 묶어 놓았습니다.
누우면 깊은 잠이 들어 아버지가 오는 것을 눈치채지 못할까 봐.
아침에는 일찍 일어나서 50개 정도 되는 잡곡 대야를 가게 밖으로 내어 놓고 정렬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잠을 제대로 잘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인지 지금도 잠은 무엇에게도 양보 안 합니다.
매일 아침 엄마께서 깨우셔서 일어나는데,
하루는 조금만 더 잔다는 게 30분을 넘게 자버렸습니다.
다시 부르는 엄마 목소리에 깨서 깜짝 놀라 가게로 가보니 이미 대야는 밖으로 다 나와 있었고,
우리 셋은 초 긴장 상태로 가게에 들어갔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아버지는 화가 나 있었고,
중1인 저와 국 5, 국 3인 여동생 둘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가게 앞 시멘트 도로에서
10여 분간 엎드려뻗쳐 기합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기합이 힘들거나 아버지가 원망스럽거나 하지는 않았는데 창피해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저는 남자지만 여동생들은 더 힘들고 더 창피했을 것입니다.
쓰다 보니 기억 속에 들어있는 것이 생각보다 많네요.
나누어서 써야 할 것 같아요.
@공작세우리 세대 어릴 때는.. 아버지처럼 되겠다는 생각을 한 사람이 그다지 많지는 않을 것 같습니다.
시대 상황도 그렇고 유교 사상도 그렇고..
그래서 표현 방식이 너무나 서투른 우리 아버지들이기도 하죠..
작가님 쓰신 글., 승화 맞습니다.. 그것도 너무나 건강한..
그 역시 내공의 힘이 아닐까 싶습니다.
글은 마음을 정화시켜 준다고 하죠..
그러니 작가님 마음 속에만 담아두지 마시고..
마음껏 담아 내시길 바랄게요..
감사합니다~^^
아버지는 아버지의 아버지에게
아버지다운 것이 무엇인지 배웠어야 했는데
그 시절에는 아버지에게 배울 수가 없으셨겠죠.
어른은 되었는데 결혼은 했는데 아이는 낳았는데
아버지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잘 모르셨겠죠.
세상은 무섭고 삶은 힘들고
그 시절의 아버지들도 어디론가 도망치고 싶으셨을 거예요.
저도 아버지를 힘들어 했는데
글 읽으면서 많이 공감이 갑니다.
끝까지 정독했습니다. 가슴의 아립니다. 고단한 시절을 어찌 버티셨는지요...아버님의 길을 따라가지 않으려한 작가님을 응원해드리고 싶습니다.
@박은석 반면교사라는 사자성어를
좋아합니다.
누군가의 좋은 점을 본받는 것도
된사람이 되는데에 도움이 되지만,
누군가의 나쁜 점을 너무 싫어하여
그리 되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이
더 도움이 되기도 하니까요.
공감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평안한 잠 주무세요.
@히스토리퀸 당시에는 당연하다고 받아들였던 것 같습니다.
집안 형편이 어려워서 부모님들이 고생하시는 것을 보고
제가 도울수 있는 모든 것을 다해야한다고 생각했었으니까요.
아버지에 대해 엄청난 실망을 한 사건이 있었던 6년여전 이전까지는
몸은 힘들었어도
마음은 괜찮았었습니다.
그 사건 이후로
청년기 이전의 저와 당시의 아버지와
고생하신 엄마가 떠오를때마다
너무 힘들더라구요.
많이 해결했는데도
아직도 응어리가 있는 것 같아서
인지행동치료 한다는 생각으로
좋은 분들이 많은 이곳에
털어 놓기로 했습니다.
많은 망설임이 있었는데
이 망설임마저 지우려고
일단 써서 올려버렸습니다.
읽는 분들을 불편하게 할 수도 있음을 알면서도
개인주의적인 마음으로 썼는데
정독해주시고
위로와 응원까지 해주셔서
몸둘바를 모르겠습니다.
작가님께서
주신 약 덕분에
제 마음이 건강해지는 것 같습니다.
고맙습니다.
좋은 꿈 꾸시길 바랍니다.
과거 시절 아버지는 반면교사였다면, 자식의 아버지가 된 나는 친구같은 아빠가 되고자 애를 썼지요. 너무나 과묵하셨던 울아부지 생각하면 괜히 눈물 날 때도 있답니다.
아빠와 스스럼없이 잘 통하는 딸은 친구들과 얘기하다 보면 너무나 다른 집안분위기를 느끼게 되더라는 말을 하곤 합니다.
지난날 어려웠던 시절 아버지를 돌아보고, 그 반대로 살고자 의식적으로 노력했던 일들, 그리고 지금은 아이들의 아버지가 돼있는 나를 돌아보는 계기가 되네요.
@쉐비 그러셨군요.
저희들은 반면교사를 통해 옳은 길을 갔지만,
자식들을 바르게 자라게 하려면
우리가 모범을 보여주는 것이
부모와 자식 서로에게
가장 좋은 방법일 것입니다.
작가님께서는 자녀에게 좋은 아빠시고
좋은 스승이며
좋은 친구이십니다.
잘 해내심을 축하드립니다 .
날씨가 쌇쌀해지지만
따뜻한 가족이 곁에 있으니
그것으로 충분하지요.
오늘도 좋은 날 보내소서.
고맙습니다
좋은 추억이든 슬픈 기억이든 그때가 자꾸 떠올라 말을 거는 이유가 있을 것 같아요..저도 어린 시절 어느 때에 머무를 때가 종종 있기에 어렴풋이 알 것 같기도 해요..하물며 아버지와의 기억이라면 더 그럴 것 같아요..그 시절 어린 작가님이 간절히 필요했던 품..넓고 따뜻한 품에 대한..그런 이야기로 들립니다..작가님의 용기..그 힘으로 나아가시기 바랍니다^^
댓글을 쓰다가 생각나는 노래가 있어요..김창완의 앨범 [문]이요..
김창완 아저씨도 아버지와 관계가 안 좋았다고 하시는데 이 앨범엔 그리움이 가득하더라고요..한가로운 시간 한 번 들어보셔요^^*
@착길 김창완 노래는 다 안다고 생각했었는데
처음 들어 보네요.
원망스러운 일이 많아서인지
풀어도 풀어도 다시 묶여서
이번에 제대로 풀렸으면 하는 마음으로
부끄러운 글을 올리고 있네요.
문.
당장 들어보겠습니다.
작가님의 응원과 격려에 힘입어
응어리 진 담에 문을 만들어
그 문으로 나갈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고맙습니다.
즐거운 날 보내세요.
@착길 앨범 제목이군요.
첫 노래가 엄마 사랑해요.
저와 같은 감정인가 봅니다.
저도 아버지같은 사람을 만나 평생을 고생만 하신 엄마를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고
그래서 더 아버지가 원망스럽거든요.
@공작세]
네 작가님..앨범이 [문\이에요^^
이 노래들이 생각났어요..음악과 글 안에서 마음 다독이는 겨울 되시길요..
언제나 화이팅! 하셔요^^*
@착길 고맙습니다.
엄마 사랑해요는
가사는 없고 음만밌는데도
가사가 들리는 같습니다
가사는 엄마를 생각하는 각자의 마음이겠네요.
그래서인지 울컥했습니다.
소개해주신 위로와 격려의 요정 작가님과
평소에도 이상하리만치 끌렸던, 음악으로 마음을 다독여준 김창완님께 감사하네요.
@공작세
노래들이 다 울컥한데 그래도 좋지요^^
다 들으시고는 ^------^ 이렇게 웃으시길요!
작가님, 같은 고통을 아는 사람 여기 한 사람 더 있어요. ㅠㅠ
@하트온 아ㅡㅡㅡㅡ
마음이 아픕니다.
눈물이 나네요.
겪지 않았어야 할,
알 필요도 없는
입지 말아야 하는 깊은 상처를
마음 곳곳에 가지고 사는 분이
저 말고도 있다는 게
아픕니다.
제가 작가님의 상처를 건드렸네요.ㅠㅠ
함께 벗어났으면 좋겠습니다.
@공작세 함께 상처를 벗어나자는 말씀이 큰 힘이 됩니다. 작가님의 글을 읽으면서 솔직히, 상처를 건드리는 게 아니라, 나 혼자가 아니구나 하는 위로를 받았습니다. 물론 작가님이 어렸을 때 이 모든 일을 겪으셔야 했던 건 잘 아는 사람으로서 저도 마음이 아프구요. ㅠㅠ 작가님 늘 건강하시고 행복한 꽃길만 걸어가시기를요! 솔직한 글 감사드려요!
@착길 먼길 과 이제야 보이네에서
결국 펑펑 울고 말았습니다
오십이 훌쩍 넘은 나이에 창피한 줄 모르고.
그래도 김창완은 아버지가 먼저 죽었네요.
저보다 나이 많은 김창완인데,
엄마도 3년 전에 돌아가셧고.
김창완이 부럽습니다.
어버지의 자리도 보일만큼 저보다 나은 아버지를 가졌고.
아버지 죽은 후 4년동안 엄마께 잘해드릴 기회가 있었으니.
11년전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시고
그 후로 홀로 남은 아버지가 불쌍하다 여기고 몇년갼 엄청 잘해드렸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께 엄청난 실망을 한 사건이 있었고
그 순간 부모를 위해 희생했던 제 모든 인생이 송두리째 무너져버렸지요.
아버지가 훨씬 먼저 죽고
엄마가 더 오래 살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라는 생각에
파묻혀 지냅니다.
그랬다면 우리 엄마께 엄청 잘 해드렸을 것이고
아버지에 대한 원망도 없었을 것이고
이렇게까지 아음이 아프지 않았을 것이니까요.
나이 더 먹은 놈이 주책맞게 넋두리를 늘어놓고 있네요.
그냥 작가님께 더 고마워서요.
문 에 들어 있는 노래 악보 다 뽑아서
개사해서 기타치며 불러보렵니다.
@공작세
아...엄마 사랑해요..부터 찡하더라고요..다 몰라도 펑펑 울게 되는 앨범이에요..솔직한 가수에게 존경을 표하고 솔직한 작가님도 멋지십니다..아직 남은 응어리도 살살 차차 풀어가시길요..
아ㅋ 악보..개사하시면 올려주세요^^
저도 아버지가 강압적인 분이시라 힘들 때가 많았는데... 작가님은 얼마나 힘드셨을까 마음이 아픕니다. 치유의 글쓰기 응원드립니다!
@햇살바람 힘이 되어줘야 하고,
기둥이 되어줘야 하고
울타리가 되어줘야 하는
가족이,
그것도 가장인 아버지가
오히려 자식을 힘들게 하면
사는 게 괴롭지요.
고생하셨습니다.
머리와 가슴 속에 남아있는 아버지에 대한 기억을 잊어버리고 싶지만
잊혀지지 않으니
다 꺼내놓고 승화시키는 방법을 써보기로 했네요.
응원 고맙습니다.
추워졌네요.
감기, 코로나 등 모든 바이러스 및 세균들이 작가님과 작가님의 가정 근처에도 가지 않기를 기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