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brunch
매거진
함께 울어주는 사람이 필요했다
실행
신고
라이킷
44
댓글
8
공유
닫기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브런치스토리 시작하기
브런치스토리 홈
브런치스토리 나우
브런치스토리 책방
계정을 잊어버리셨나요?
by
공작세
Nov 09. 2021
아버지답지 못한 사람을 아버지라 불러야 하는 힘듦 2
아버지를 보고파하는 사람이 부럽다
착길 작가님께서 알려 주신
가수 김창완 님의
'문'
이라는 앨범에 수록된
'엄마 사랑해요'
라는 음악을 들으며 씁니다.
제가 아버지에 대해 깊은 원망을 가지게 되고 마음에 심한 상처를 입은 이유는,
아버지가 저에게 어떻게 했기 때문이라기보다
그러한 아버지 때문에 고생만 하시다가 아버지보다 무려 7년이나 빨리 돌아가셔서
효도를 제대로 받지 못하신 엄마에 대한 마음과,
자신을 위해 가족을 이용만 하시고 힘들게 만든 아버지가 오히려 엄마가 받지 못하신 효도를 다 받았기에
엄마께 너무 죄송한 마음이 강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더 커진 것 같습니다.
ㅇ 10살. 국민학교 3학년 때, 친한 친구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 친구가 말했습니다.
'내 저금통에는 10만 원이나 있어야'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집에 가서 부모님께 말씀드렸죠.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그 아이에게 그 돈 좀 빌려달라 그래라. 아버지가 빌려달라고 한다고. 꼭 갚아 준다고'
집 형편이 어려운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저는 망설임도 없이
'네'
라 대답하고 다음날 친구에게 말을 했죠.
친구도 망설임도 없이
'그래'
라고 했습니다.
우리가 너무 어렸던 거죠. 그 돈이 얼마나 큰돈이며 그렇게 주고받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것을 몰랐었습니다.
다음 날, 친구가 시무룩한 표정으로 저에게 다가왔습니다.
'아버지가 안된데, 그리고 너하고 놀지 말래. 미안'
저는 돈을 빌려주지 않은 친구와 친구 아버지를 이해할 수 없었고, 저와 놀지 않겠다는 말에 기분이 나빴습니다.
저는 아버지와 제가 잘못했다는 것을 몰랐었습니다.
씩씩 불며 집에 가서 아버지께 말했죠.
'친구끼리 그것도 못 빌려준다냐. 너도 걔랑 놀지 마라'
'알았어요'
이 일이 있은 후로 다른 아이들도 저를 멀리 했습니다.
학교가 끝나면 바로 집에 와서 일을 해야 했으니까, 그렇잖아도 친구와 놀 시간이 없었기에 별로 충격은 없었습니다.
이 후로 저는 친구를 사귀지 못했습니다.
고등학교 때까지 사귄 친구는 고등학교 1학년 때 같은 반이었던 친구 세 명이 전부입니다.
ㅇ 대학 학력고사를 볼 때까지 매일 같은 생활이 반복되었었습니다.
아버지는 저에게 의사가 되어야 한다고 했었습니다.(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아버지의 잘못으로 인하여 아버지의 자식들이 연좌제에 걸려 있었기에 자영업을 해야만 했고, 그중에 의사가 가장 나은 직업이기 때문이었습니다.)
저는 아버지 말을 따라서가 아니라, 불쌍한 엄마를 꼭 호강시켜드려야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엄마께서는 저에게 모든 희망을 거시고 항상 제게 말씀하셨었지요.
'네가 커서 꼭 엄마 집 사줘야 한다'
저는 굳게 다짐했었습니다. 그러겠다고.
일하면서 공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었습니다.
하지만, 엄마를 호강시켜드려야 한다는 다짐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원서 접수 첫날 무조건 전남대 의대에 원서를 접수할 각오로 공부했었습니다.
어치피 집 형편상 서울로는 갈 수 없으니 지방에서 가장 좋은 의대인 이곳을 목표로 한 것이지요.
떨어지더라도 무조건 넣을 생각이었습니다.
(당시에는 한 대학교에만 원서 접수가 가능했었습니다.)
떨어지면, 다음에 또
도전하더라도
꼭 전남대 의대를 가려고 했었습니다.
성적이 기대보다 더 좋게 나왔습니다. 전남대 의대 합격선을 훌쩍 넘을 정도로.
기쁜 마음으로 성적표를 가지고 집에 왔지요.
성적표를 본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느 대학교에 가든 의사만 되면 되는 것 아니냐. 집 형편이 어려우니 조선대 의대에 지원하면 안 되겠냐"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에는 전남대와 조선대의 차이는 지금의 서울대와 지방대 차이만큼 심했습니다.
더군다나 전남대 의대와 조선대 의대는 사람들 인식에 엄청난 차이가 있었습니다.
조선대는 전남대에 못 가는 사람들이 가는 곳이라 여겼었지요.
실제로도 그랬습니다.
전남대 의대를 가면 등록금을 내야만 했었을 정도로 무난히 합격은 하지만 장학금을 받을만한 성적은 아니었고,
조선대 의대를 가면 수석으로 들어가게 되므로 등록금 면제는 물론이고, 2년간 납부금을 내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그것을 어떻게 아셨는지 아버지는 저에게 조선대 의대에 지원할 것을 강권하셨습니다.
저는 제 목표를 꺾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아버지 말대로 어차피 의사만 되면 되니까.
담임 선생님께서는 펄쩍 뛰셨습니다. 절대로 안된다고 하셨습니다.
원서 접수 마지막 날까지 저를 설득하셨습니다.
하지만, 저는 꼭 조선대 의대를 지원해야만 했었습니다. 방법이 없었습니다.
오죽하면 아버지께서 그렇게 말씀하실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담임 선생님께 말씀드렸습니다.
"부모님께서 나이가 많으십니다.
(아버지 40살 때 저를 낳으셨습니다. 바로 위 누나와 11살 차이이니 중간에 엄마랑 만나지 못하는 일이 있었던 거지요)
제가 대학교 졸업하기 전에 돌아가실 수도 있습니다. 저의 마지막 효도일 수도 있습니다."
다른 기억은 약간의 왜곡이 있을 수도 있지만, 이 말만큼은 확실히 기억합니다.
결국 선생님께서는 못 이기고 원서를 써 주셨고,
등록금 면제와 2년 장학금을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저보다 점수가 10점, 12점이 덜 나온 저희 반 3등과 4등은 전남대 의대에 합격했습니다.)
이후로 37년이 지난 2012년에 담임 선생님을 만났습니다.
열심히 수소문하여 근무하신 곳을 알아내어 연락을 드렸거든요.
예전에 사시던 집에 살고 계셨었습니다.
만나자마자 선생님은 제게 물어보셨습니다.
'아버지 아직 살아계시냐?'
그때는 엄마는 돌아가시고 아버지는 살아계셨기에
'네'라고
대답했지요.
'아이고...'
하면서 웃으시더군요.
아버지께서 살아계시다는 말에
'아이고...'
는 누가 들어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지만,
선생님과 저는 그 의미를 알기에 함께 웃었습니다.
여전히 글이 길어지네요.
글을 길게 쓰지 않으려고 하는 경향이 있는 저이기에
(쓰기도 힘들지만, 읽으시는 분들도 힘들 수 있어서)
다음으로 넘겨야겠습니다.
아윌 비 백.
keyword
아버지
친구
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