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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Nov 10. 2021

아버지답지 못한 사람을 아버지라 불러야 하는 힘듦  3

아버지를 정겹게 부르는 사람이 부럽다

집 형편은 점점 더 어려워졌습니다.

집에서 학비를 전혀 가져가지 않고, 

엄마와 저는 최대한 아끼며 살고,

지금의 아내와 사귀고 있었는데, 

데이트를 주로 돈 안 드는 곳에서 할 정도로 절약하였고,

(포장마차에서 500원어치 시켜 놓고 둘이 나누어 먹고 있는 모습을 본 어떤 아저씨가 자기가 사 줄 테니 더 먹으라고 했을 정도로. 물론 거절했지만.)

장사도 그럭저럭 잘 되었는데도 형편은 더 어려워져만 갔습니다. 빚도 계속 늘었고...


ㅇ 두 살 터울 여동생이 대학을 갈 때가 되었습니다. 

전남대학교 유아교육과를 가고 싶어 했는데, 합격은 가능했으나 장학금은 받을 수 없는 정도의 성적이었습니다.

아버지는 형편이 어려우니 보내줄 수 없다고 하셨지요. 

당시에는 여자는 가르칠 필요 없다는 사상이 남아있던 때라 부모는 이런 말을 서슴없이 할 수 있었습니다.


동생은 울고 불고 난리가 났습니다.

저도 2년 간만 납부금 면제였고, 그 후로는 성적 장학금을 받아야만 했었는데

핑계를 대자면 의대 공부의 양은 실로 방대해서 주경야독이 불가하여 장학금을 받을 만큼의 성적을 이루어내지 못했습니다.(실상은 공부를 열심히 안 한 거지요)

더군다나, 대학생은 과외를 할 수 없는 과외 금지 조치가 있었던 때라 과외로 돈을 벌 수도 없었습니다.

참으로 운이 더럽게 없지요. 

과외만 할 수 있었어도 납부금 내고, 생활비를 쓰고도 남아서 집 살림에 보탤 수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고민 끝에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군에서 주는 장학금이 있습니다. 받은 연수만큼 군에서 더 근무해주는 조건입니다. 납부금도 주고 매달 생활비로 6만 원씩 줍니다. 제가 집에서 한 푼도 가져가지 않을 테니 제 납부금 대준다 생각하시고 대학교를 보내주시면 안 될까요?'

아버지는

'네 납부금도 대기 힘드니 군 장학금은 신청하고 동생은 대학교에 보낼 형편이 못된다'며 받아들이지 않으셨습니다.

엄마와 저는 계속 아버지를 설득했고, 결국 동생은 대학교에 갈 수 있었습니다.

단, 조건이 있었지요. 들어갈 때 등록금은 대주지만 들어가서는 장학금을 받아서 다녀야 한다는...


ㅇ 군 장학금을 신청했습니다. 

목적은 두 가지였습니다.

첫 번째는 앞에 쓰여 있는 것이고요.

두 번째는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습니다.


저는 연좌제에 걸려 있었습니다.

아버지의 죄로 인하여 제가 공무원 등을 할 수 없는 상태였던 것이지요.

의대를 졸업하면 중위, 전문의를 취득하고 가면 대위로 임관하기 때문에 장교가 되는 것이므로

연좌제가 있는 한 저는 합격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그런데, 다행히 그 해에 연좌제가 폐지되었습니다. 

하지만, 군부 독재 시대이고 방금 폐지되었고 아버지 호적에는 빨간 줄이 처져 있기 때문에 

이것이 문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제가 연좌제 영향을 그대로 받는다면, 제 아이들도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연좌제가 실제적으로 폐지되었고 영향을 끼치지 않는지 확인해야만 했습니다.

이런 이유와 집 형편이 좋지 않았기에

아마, 동생의 대학교가 걸리지 않았더라도 군 장학금을 신청했을 것입니다.


네 명을 뽑는데 11명이 지원을 했습니다.

성적순으로 뽑기 때문에, 교수님께 말씀드려서 11명의 2년 동안의 성적을 볼 수 있었습니다.

당시에는 개인정보에 대한 개념도 없었고, 제가 과 대표였기에 교수님께서 선뜻 보여주셨던 것 같습니다.

11명 중 제가 성적이 가장 좋았습니다.

만약 떨어진다면 이유는 딱 하나 연좌제 때문인 거죠.

대통령이 분명히 폐지 발표를 했는데, 연좌제 때문에 떨어진다면 저는 즉시 행정소송에 나설 생각이었습니다. 

이것은 저와 제 자손들에게 중요한 문제였으니까요. 

아버지께는 이 말을 드리지 않았습니다. 마음이 아프실까 봐.


그런데,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혹시 모르니 보건 장학금도 신청해야 하지 않겄냐'

보건 장학금은 장학금을 받은 연수만큼 보건소에서 근무해주는 것입니다.

군 장학금이나 보건 장학금이나 사실은 개인적으로 큰 손해인 것이죠.

헐값에 4년이라는 제 인생을 국가에 저당 잡히는 것이니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저는 보건 장학금을 신청하지 않았습니다.

기어코 군 장학금을 받아야만 하는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지요.

아버지로 기인한 것인데, 왜 아버지는 연좌제 폐지 여부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었는지 

당시에는 생각해보지 않았지만, 지금 생각하면 이해가 안 됩니다.


납부금을 내야 할 날은 다가오는데,

합격자 발표가 한 달이나 늦어지고 있었습니다.

급기야 아버지는 역정을 내셨습니다.

'그러니까 보건 장학금을 신청하라고 했잖냐. 인자 어쩔라고 그러냐'

저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만약 떨어지면 행정소송도 해야 하고, 납부금도 없으니 휴학을 하면 되지 않겠나 생각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지 일주일 후,

합격 소식을 들었습니다.

너무 기뻤습니다.

아주 중요한 문제가 한꺼번에 해결되었기 때문입니다.


ㅇ 군 장학금으로 매달 6만 원의 생활비를 지원받을 수 있었습니다.

천군만마를 얻은 것이지요. 

이제 책을 복사해서 볼 필요 없고, 사서 볼 수가 있었으니까요.

그래도 너무 비싼 책은 살 수가 없었습니다. 돈을 아껴야 했으니까요.

저희 집은 빚이 늘어만 갔습니다.

지금 같으면 그 빚은 아버지 빚이니 나 몰라라 했을 것 같은데,

당시에는 그 빚은 결국 제 몫이라 생각했습니다. 언젠가는 제가 다 갚아야 하는 빚.

그래서 고민을 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지요.

'어차피 조금씩 집에 들여놓아도 밑 빠진 독처럼 다 없어져 버릴 것이니, 지금부터 내가 모아서 한꺼번에 빠진 곳을 메워 버리자'

이때가 22살이었습니다.

한 번도 은행에 저금을 해본 적이 없기에 시내에서 장사를 하시는 막내 고모에게 갔습니다.

제 생각을 말씀드리고, 제 부모님께는 꼭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을 드렸지요.

고모는 안타깝고, 고맙고, 대견하다 하시면서 '그러마' 하셨습니다.

매달 36000원씩 고모에게 가져다 드리고 고모는 그 돈을 3년 만기 정기예금에 넣어주셨습니다.

그렇게 저의 부모님 빚 갚기는 시작되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제가 매달 6만 원씩 받는 것을 알고 계시는 아버지께서 저를 부르시더니

'너는 집이 이렇게 어려운데 가시내 똥구멍으로 다 써버리고 집에는 돈을 한 푼도 안 들여놓는 거냐'

그동안 한 번도 아버지께 반감을 가져보지 않고, 그저 얼마나 힘들면 그러실까라고 생각했었는데

순간 속이 상하고 눈물이 앞을 가렸습니다.

그렇다고 제가 돈을 모으고 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랬다가는 당장 그 돈을 집에 가져와야 하고 결국 독의 구멍은 조금도 메우지 못할 것이니까요.

제 여자 친구(지금의 아내)에게는 미안하였지만 그냥 아무 말하지 않고 그 말을 수긍한 꼴이 되어버렸습니다.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앞으로도 계속 돈을 안 줄 거냐?'

'네.'

'에라 이 나쁜 놈'

저는 참 대견한 일을 하고도 부모에게 불효자가 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나중에 이 말을 전해 들은 막내 고모는 당장 자기 오빠에게 가서 따지겠다고 하셨지만,

결국 그러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랬다가는 모든 계획이 수포로 돌아가니까요.


에고...

4편으로 넘어가야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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