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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Dec 04. 2021

엄마께는 못 해 드린 것만 생각납니다.

부모의 마음을 몰라주는 자식은 불효자입니다.

졸업하자마자 저는 군대에 가야 했습니다.

군에서 주는 장학금을 받았기 때문에 받은 만큼 더 근무해줘야만 했습니다.

원래 3년에 장학금 받은 만큼을 더한 8년을 군에 있어야만 했지요.

가족들과의 거리는 훨씬 멀어져 버렸습니다.

저는 서울에, 아내는 여수에.


비록 군인 월급은 부모님과 가족들을 부양하기에는 넉넉하지 않았지만, 그래도 맞벌이가 시작되었습니다.

심한 긴축재정을 한 덕에 부모님 빚 갚고, 군 생활 6년 차에 돈이 어느 정도 모였습니다.

비록 지방 소도시의 24평 빌라형 아파트지만, 드디어 엄마의 집을 마련해드렸습니다.

부모님과 아내와 자식들이 살았으니 어찌 보면 엄마의 집이라기보다 우리 가족의 첫 집이었지만,

엄마께는 태어나서 66년 만에 가져보는 자기 집이었습니다.


제대 후에 서울이나 수도권에서 개업하라는 주변의 권유가 많았지만 그럴 수가 없었습니다.

어차피 개업할 돈도 별로 없었지만, 돈이야 빚을 내서라도 할 수 있었지만

부모님이 연로하시므로 부모님이 계신 곳으로 내려가기로 하였습니다.

자주 뵙고, 손자들도 자주 보여드리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수도권에서 크게 해야 돈을 훨씬 더 많이 벌겠지만, 어차피 돈은 본래부터 없었던 터라 살아가는데 지장만 없을 정도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돈은 얼마를 버느냐보다 얼마를 쓰느냐에 따라 저축의 양은 정해지니까요.


부모님 빚 때문에 너무 시달렸었기에 빚을 내는 것은 너무 싫었습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소규모로 개업을 했습니다.

그래도 돈이 부족하여 처제에게 빌렸죠. 빌린 돈은 3개월 후에 은행이자보다 더 붙여서 갚았습니다.

돈이든 신세든 빚을 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 한몫했지요.


처음 샀던 아파트는 10년 만에 손해보고 팔았습니다.(제가 이런 복이 없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부동산은 제가 살고 있는 집 한 채뿐입니다. 설령 없던 복이 생겨서 부동산이 오를지라도 제가 살아야 하는 곳 외에는 더 가져서는 안 된다는 철칙이 있습니다. 더 가지는 것은 남의 것을 빼앗는 거나 다름없다는 생각입니다. 제 생각이 무조건 맞다고는 할 수 없지만, 대한민국 사람 모두가 이러한다면 집 값도 안정되고 우리 아이들이 집 걱정은 안 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얘기가 옆으로 샜네요. ^^)

부모님을 제 집 옆으로 모셔와야 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임대 아파트에 살았어도 부모님 집은 비록 작지만 사드렸습니다. 지방이라 비싸지는 않았으니까요.

아파트에 들어가는 비용, 전화비 등 일체는 다 제 통장에서 빠져나가도록 했습니다.

매달 생활비로 120만 원을 드리고 틈틈이 용돈도 드렸죠.

가능한 한 자주 외식도 시켜드렸습니다.

계획대로 자주 뵈었죠.

손자들 커가는 모습도 실시간으로 보셨습니다.

엄마께는 제가 커다란 자랑이었습니다.


써놓고 보니 쑥스러울 정도로 자화자찬을 해놓았네요.

이왕 얼굴에 철판 깐 김에.

어릴 때부터 저는 부모님 속을 거의 썩이지 않았습니다.

커서 잠깐 가출 아닌 가출도 하고, 인생이 꼬여서 걱정을 끼쳐드린 적은 있지만,

말 잘 듣고 공부 잘하고 집안일 잘 돕고 부모님 잘 섬기는 동네의 소문난 효자였지요.

엄마께서 돌아가실 때까지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습니다.(이건 저의 어리석은 판단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엄마께서 돌아가시고 나니 잘해드린 것은 없던 것이 돼버리고 못 해 드린 것만 생각났습니다.

아버지의 일탈(?)을 알고 난 이후에는 더욱더 엄마께 죄송했습니다.


아버지가 다방(지금은 카페가 대세이지만, 예전에는 다방이 많았고, 지금도 다방이 있지만 많지 않고 나이 먹은 사람들이 가는 카페이자 또 다른 기능<?>도 하는 곳)에 가는 것을 그토록 싫어하시는 엄마께

'연세 드실 만큼 드셨는데 뭔 일이 있겠어요. 그냥 가시게 내버려 두셔요'라고 말했던 것.

엄마께서 아버지가 다방에 가시는 것을 그렇게까지 왜 싫어하셨는지를 알지 못하고(엄마께서 말씀을 안 해주셨으니까 당연히 모를 수밖에 없었지만) 제 입으로 엄마 가슴에 못을 박아버린 말인 줄을 나중에서야 알았습니다.


혈혈단신, 소위 일자무식인 엄마 앞에서 아버지께 '아버지의 일생을 글로 써서 주시면 제가 책으로 만들어보겠습니다.'라는 말씀을 드렸던 것.

엄마는 이 말씀을 들으시고, 자신도 할 말이 많으셨기에 자식들에게는 말씀도 안 하시고,

생면부지인 어떤 분께 부탁하여 자신의 일생을 얘기해주시고 그것을 녹음하고 기록하셨다는 것을

엄마께서 돌아가신 후 알게 되고 전달받았습니다.

마땅히 자식이 듣고 받아 적으며 공감해드리고 위로해드리고 안아드렸어야 하는 것을,

엄마 마음도 살피지 못하면서 최선을 다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제가 한없이 미웠습니다.


드린 생활비는 아버지와 나눠서 쓰셨습니다.

엄마는 은행 일을 보실 수 없기 때문에 아버지 이름으로 된 통장에 생활비를 넣어 드렸었는데,

아버지는 이것에서 일부를 엄마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엄마는 아버지께 받은 돈으로 삼시세끼 식사를 준비하시고 남은 돈을 용돈으로 쓰셨고요.

이런 사실을 너무 늦게 알았습니다.

엄마께 직접 돈으로 드렸어야 했습니다.

마땅히 엄마께 가야 할 돈이 아버지를 통해 어디론가 사라졌다는 것을 엄마 돌아가신 후에야 알았습니다.

엄마는 평생을 빚에 쪼들려 사시다가,

나중에는 자식으로부터 용돈을 받아 생활하셨는데,

한 번도 풍족하게 돈을 가져보지 못하시고 사시다가 돌아가셔 버렸습니다.

세 명의 자식을 키워야 했고, 저희 부부의 미래도 준비해야 했기에 저축을 할 수밖에 없었기에

충분히 생활비를 드렸다고 생각했던 제가 어리석었었습니다.

돈이야 계속 벌면 되는 것이고, 자식들이야 어느 정도 키우면 스스로 살아가는 것이고,

저의 부부 노후는 연금도 있고, 정 없으면 국가에서 이런저런 도움을 받으면 되는 것이지만,

엄마는 연로하시고 언제 돌아가실지 모르는 상황이었으므로

저축에 전념할 것이 아니라 엄마를 더 풍족하게 해드렸어야 했습니다.

제가 지금 돈을 얼마를 갖고 있은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엄마는 이미 돌아가시고 제 곁에 없으신데.


엄마는 어느 날 아버지와 이혼하고 싶다고 집 하나 얻어주면 안 되겠느냐고 하셨습니다.

저는 '다 늙어서 이혼은 무슨 이혼이요. 아버지 하루 이틀 그런 것도 아니고 지금까지 사셨는데 그냥 없는 셈 치고 사시면 되죠'라고 말씀드렸죠.


엄마는 부모도 일찍 여의고 18살에 시집왔습니다.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의 시집살이와 시누들 등쌀에 시달리셨지요,

남편이라고 있는 것은 젊은 여자를 당당히 집으로 데리고 와서 살림을 차리고, 엄마는 그 젊은 여자 뒷바라지까지 하면서 온갖 구박을 견디며 사셨습니다.

그 여자가 나간 후에도 엄마는 하루도 편할 날이 없으셨고, 8년간 남편이 없는 집에서 온갖 고초를 겪으셨습니다.

시집에서 벗어나 저희들을 키우실 때도, 한량이나 다름없는 아버지를 견디며 살아오셨습니다.

그랬던 엄마의 입에서 '이혼'이라는 말이 나왔을 때는,

이유를 물어봐야 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너무 어리석게도 이유는 물어보지 않고 제가 하고 싶은 말만 해버렸던 거지요.

이혼은 말리더라도, 아버지는 집에 놔두고 엄마를 제 집으로 모셔와서 살아야 했었습니다.

엄마의 여생을 조금이라도 편하게 해 드려야 했었습니다.


엄마께서는 돌아가시기 2년 여전부터 오른팔을 잘 못쓰셨습니다.

왼손으로 식사를 하셔야 할 정도로 불편하셨지요.

수술을 시켜드리고 싶었지만, 수술받고 좋아진다는 보장도 없고, 수술 후 회복하는 동안 팔을 더 못 쓰게 된다는 이유로 수술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돌아가시기 전날, 폐렴 증상으로 집에서 수액을 맞으셨습니다.

화장실을 모시고 가려는데, 잠자리 바로 옆에(침대 생활을 하지 않으셨지요) 화장품들이 줄줄이 늘어서 있어서 모시고 가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화장품들을 발로 한꺼번에 밀어버렸지요. '왜 이런 것을 이불 옆에 놔두셨어요. 다니기 힘들게'라는 말과 함께.

엄마께서 돌아가신 날. 아내가 제게 말했습니다.

'낮에 어머님이 이제 화장 안 해야겠다고 하시더라고요. 아들이 싫어하니 안 해야겠다고'

저는 망치로 머리를 맞고 몽둥이로 가슴을 맞은 것 같았습니다.

엄마는 아무리 늙었어도 여자셨습니다.

화장을 하셔야만 했습니다.

그런데 오른팔이 아프니 제대로 하기도 힘들 뿐만 아니라 몸도 움직이는 게 쉽지 않으니 손 닿는 곳에 화장품을 놔두셔야만 했습니다.

저는 그런 엄마의 상황을 알지 못했습니다.

단지 발에 걸리적거린다는 이유만으로 화장품을 밀어버렸던 것인데,

제가 엄마 화장하는 것을 싫어하신다고 생각하실 수도 있다는 것도 몰랐습니다.

저는 나이만 먹었지 부모 마음도 모르는 어린아이와 다를 바 없었습니다.

제가 엄마께 드린 마지막 말이 '왜 이런 것을 이불 옆에 놔두셨어요. 다니기 힘들게'가 되어버렸습니다.

불효도 이런 불효가 없습니다.


오른팔을 제대로 못쓰셔서 왼손으로 화장을 하셨으니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제가 일하는 곳에서 차로 불과 5분밖에 안 되는 곳에 사셨기에,

제가 출근하면서 화장해드리고 퇴근하면서 지워드려야 했었습니다.

그것도 못 해 드리면서 뭘 최선을 다했다고 생각했는지 제 가슴을 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런 제게 엄마는 남을 통해 전해주신 유언으로

'엄마가 바라는 대로 잘 자라줘서 고맙다'라는 말을 남기셨습니다.

어찌 눈물이 흐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어찌 엄마께 죄송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돌아가신 후 7년간.

못 해 드린 것만 생각나서 자주 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의 일탈을 알게 되었고,

그 후로는 제 삶이 송두리째 부정되어버리고 결국 공황장애라는 진단까지 받게 되었지요.

아내와 후배와 저를 아는 사람은 '할 만큼 했다'라고 말을 했지만,

제가 저를 용서하고 제 삶을 받아들이기까지 많은 시간이 필요했습니다.


하지만,

엄마께 못 해 드린 것은 엄마께서 살아오실 수 없으니 여전히 못 해 드린 체로 남아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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