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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Dec 01. 2021

아버지답지 못한 사람을 아버지라 불러야 하는 힘듦 6

자식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는 아버지를 둔 사람이 부럽다

학비가 생각보다 많이 들어갔고, 집의 빚을 갚기 위해 돈도 모아야 했기에

당시에는 대학생 과외가 금지되어 있었지만,

위험을 무릅쓰고 일명 '몰래바이트'를 했었습니다.

위험수당(?)이 포함되어 있었기에 1988년 당시 매달 40만 원이라는 거액을 받고 했지요.

1년 동안 480만 원을 모았습니다.


어느 날 엄마께서 제게 말씀하셨습니다.

'집주인이 가게 전세금을 올려달란디 돈이 없다. ㅇㅇ(제 바로 아래 여동생)이 그러는데 너에게 돈이 있담서야. 엄마한테 빌려주면 엄마가 나중에 꼭 갚아줄게 좀 빌려줄라냐?'

제 막내 여동생이 월급을 집에 들여놓는 것을 막기 위해 제 통장을 보여주고 제가 돈을 모으고 있다는 사실을 동생들에게 말한 것이 결국 화근이 되어 부모님께서 제가 돈이 있다는 것을 알게 돼버렸었습니다.

집 빚을 갚기 위해서는 모아놓았다가 한꺼번에 해결해야만 하는데,

그렇지 않으면 밑 빠진 독에 물 붓기에 불과한데,

들통나버린데다가, 엄마의 부탁을 저는 결코 거절할 수가 없었습니다.

'저 돈 별로 없는데 얼마가 부족한데요?'

'삼백만 원을 올려달란다'

돈을 다 내놓지 않아도 된다는 사실에 안도하였습니다.

'삼백만 원 드리고 나면 저는 돈이 한 푼도 없어요. 그래도 드려야지요'라고 엄마께 거짓말을 하였습니다.

그렇게 가게 전세금은 해결되었지요.


1990년 26살 때 결혼을 하고(자식은 빨리 낳아서 빨리 키우는 것이 서로에게 좋은 것이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꼈었기에 빨리 결혼하리라고 단단히 결심을 했었기에 양가 어르신들에게 결혼에 드는 비용과 계획을 적은 것을 드리고 허락을 얻어 냈었습니다. 결혼할 때도 예물 등을 최대한 간소화하였고, 결혼 후에 살림을 차리지 않고 저와 아내는 두 시간이나 떨어진 곳에서 각자 생활을 했기 때문에, 저희 부모님은 결혼시키고 오히려 잉여금이 많이 남았었습니다.) 첫 아이가 태어났습니다.


저도 이제 한 가정의 가장이 된 것이지요.

이 기회를 이용하여 가장 대 가장으로 아버지께 말했습니다.

'이대로 가면 빚만 늘어납니다. 이제 장사 그만 하시죠. 금융기관의 채무는 갚지 않으면 법적으로 문제가 되니 남은 물건과 전세금 등으로 금융기관의 빚을 갚고, 사채는 제가 사채업자들을 만나서 설득을 해보겠습니다.'

그런데,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금융 기관에 대한 채무가 많았었습니다.

700만 원 정도가 부족했었지요.


제 바로 위 누나와 저는 11살 차이가 납니다.

제가 12살 때 누나는 자신보다 6살 위인 자형과 결혼을 했습니다.

제가 부탁할 사람은 세상에 딱 한 명. 자형 밖에 없었습니다.

집 사정과 저의 계획을 다 설명하고 700만 원만 협조해달라고 부탁했지요.

누나는 옆에 없었지만, 제 아내가 있는 자리였는데 자형은 말했습니다.

'니가 나한테 돈을 맡겨 논 것도 아닌디 무릎 꿇고 빌려달라고 사정해도 줄까 말까 한디 그렇게 뻣뻣이 서서 주라고 하면 누가 준다냐'

이 말에 저는 충격을 받았습니다.

아무리 자형이 남이라 할지라도 그래도 누나의 남편인데 이런 말을 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었습니다.

무려 17살이나 어린 처남이 자신의 빚도 아닌, 부모님 빚을 갚겠다고 말하면 대견스럽게 여기지는 못할망정

무릎 꿇고 부탁을 해도 줄까 말까 한다니 이게 도대체 뭔가 싶었습니다.

그래서 더 이상 얘기를 하지 않고 그 자리를 나와 버렸지요.


나온 후 곧바로 막내 고모에게 갔습니다.

이 상황과 저의 계획을 말씀드리고 고모께 빌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고모도 형편이 여의치 않으셨었습니다. 고모께서 말씀하셨습니다.

'무릎 한 번 꿇으면 700만 원이 생기는데 그것이 뭐가 힘들다냐. 자존심 같은 것은 버려불고 돈을 받아 내야제'

결국 저는 자형에게 무릎 꿇고 부탁했고, 금융기관의 채무는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사채업자들을 모두 불러서 제가 꼭 빚을 갚겠다는 각서를  써주고 나서야 부모님을 빚으로부터 벗어나게 해 드릴 수 있었지요.

아내는 교편을 잡고 있었기에, 아내가 있는 곳으로 부모님을 이사시켰고

이 후로 아내는 8년간 남편도 없이 시부모님을 봉양하고, 자식을 키웠습니다.

저희 부부는 1991년부터 아버지가 돌아가신 2017년까지

부모님의 빚을 갚고 부모님의 생활비를 책임져야 했기에

허리띠를 더 이상 조를 수 없을 때까지 졸라매고 살아야만 했습니다.


아버지가 자신의 아내와 자식 마음 몰라줘도 좋습니다.

화내고 물건을 던지고 난리를 쳐도 좋습니다.

말 안 듣는다 생각하면 회초리를 들고 때려도 좋습니다.

괜히 자식에게 욕을 해도 좋습니다.

당시에는 부인 두 명을 가진 사람도 있었으니, 엄마 몰래 바람을 피워도 괜찮습니다.(엄마는 평생 아버지가 여자들을 밝히는 것 때문에 마음고생이 심하셨습니다.)

이 보다 더한 것을 해도 다 괜찮습니다.


하지만, 아버지라면, 그래도 한 가정의 가장인 아버지라면

돈 때문에 가족이 힘들어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서 돈을 벌어야 하고,

설령, 돈을 벌지는 못할지언정 엄마와 자식들이 열심히 절약하고 모아 놓은 돈을 빼앗아서

다른 여자에게 가져다주거나 노름 판에서 날려 버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아버지라면 외부의 모든 것들로부터 가족을 지켜줘야만 합니다.

외부의 유해한 것과 곳으로 가족들을 내몰거나

가족들이 외부로부터 침해를 당할 때 지켜주지는 못할망정 오히려 몰아붙이거나

자신의 편함과 욕심을 위해 가족들을 희생시키면 안 됩니다.


아버지가 저의 마음을 몰라주고, 저에게 빚을 남겨주고, 저에게 모질게 대해서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남아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것에 대한 원망은 처음부터 없었습니다.


아버지에게 제 마음을 얘기할 수 없었기에 아버지께서 제 마음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것이고,

당시에는 저희 집이 가난하고 빚을 많이 진 이유가 아버지로 인한 것이라는 것을 전혀 몰랐었기에

가족이 함께 살아가면서 진 빚이니

만약 부모님이 못 갚는다면 제가 갚아야 한다고 생각했었고,

아버지가 모질게 대한 것은 저를 바르게 가르치기 위한 것이라 여겼었기에,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엄마가 돌아가신 지 6년 후에

어떠한 사실을 알게 되기 전까지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저 자식으로서 최선을 다해서 섬겼었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원망하게 되고, 제 인생이 송두리째 흔들리게 되고, 정신적으로 너무 힘들어진 것은

아버지 돌아가시기 2년여 전에 알게 된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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