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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Dec 07. 2021

아버지는 도대체 왜 그러셨을까?

엄마가 더 오래 사셔야 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슬픔, 가장 충격적인 일, 가장 마음 아픈 것이 배우자의 사망이라 합니다.


미국의 라이스 대학교 연구진은 사별의 슬픔이 건강에 어떻게, 어느 정도까지 영향을 미치는지 살펴봤는데

그 결과 배우자를 잃은 사람은 염증 수치가 올라가고. 심장 박동은 늦어지고, 심혈관계 질환에 걸릴 가능성은 높아졌으며, 특히 사별한 지 아직 반년이 지나지 않은 사람은 사망 위험이 41%까지 상승했다는 결과를 발표했습니다.    

사람은 마음이 아파서도 죽을 수 있기에 슬픔을 잘 다스려야 한다고 했습니다.    


11년 8개월 전. 엄마께서 갑자기 돌아가셨었습니다.

불과 30분 전만 해도 딸들과 웃으며 말씀을 나누시던 분이...

모임을 하고 있던 저는 연락을 받고 정신없이 응급실로 갔습니다.

엄마께서는 이미 돌아가신 상태였지요.

그래도 엄마의 정신이 어느 정도 살아있을지 모른다 생각하고 엄마 눈을 벌리고 바라보며 작별 인사를 했었습니다.


어릴 때 부모를 잃으시고, 형제자매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살아오신 엄마.

18살 때 시집와서, 무엇을 상상하든 그 이상으로 시집살이를 하신 엄마.

숫자도 글자도 모르시면서 거의 혼자 장사를 하시며 우리들을 키우신 엄마.

제가 돈을 벌기 시작하기 전까지 빚과 가난에 허덕이며 사셨던 엄마.

작은 집이라도 자신의 집 한 채 가져보는 것이 유일한 욕심이셨던 엄마.

아들 하나 잘 키우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라 여기셨던 엄마 셨기에,

저는 너무 슬펐었습니다. 마음이 아팠었습니다. 속이 미어터졌었습니다. 도무지 북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밤 12시가 넘어서,

엄마는 장례식장 차에 실려 병원에서 불과 5분 정도 떨어진 장례식장으로 가셨고, 저는 제 차로 갔지요.

도착해보니 엄마가 없었습니다. 방금 돌아가신 엄마를 벌써 냉동고에 넣었다는 거죠.

저는 용납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직 굳어지지도 않은 엄마를, 한 번이라도 더 만져보고 싶은 엄마를 냉동고에 넣다니, 장례식장 사무실에 가서 말했습니다.

''어차피 내일 아침까지 아무도 안 올 것이니 상주 방에 엄마를 모셔다 놓았다가 내일 아침에 영안실에 모시게 해 주십시오.''

장례식장 측에서는 절대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엄마를 냉동고에서 빼주십시오. 제가 모시고 집에 갔다가 내일 아침에 모시고 오겠습니다.''라고 악을 써버렸었습니다.

''안되지만 올려다 드리긴 할 텐데, 냉동고 보관 비용은 오늘 것까지 주셔야 합니다.''

이 상황에서 이런 말을 하는 인간들이 정말 싫었지만, 그것에 대해 따질 마음의 여유가 없었습니다.

''알았으니까 빨리 빼서 올려달라고요.'' 더 크게 악을 썼지요. 발악을 했다고 해도 맞을 것입니다.

방금 돌아가셔서 체온도 식지 않은 엄마가 단 1초라도 차가운 냉동고에 계실 생각을 하니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상주 방에서 엄마를 만지고, 보듬으며 엉엉 울었었습니다.

엄마의 얼굴이 너무 평온했고, 사후 강직도 오지 않아서인지 꼭 살아계신 것만 같았었습니다.

잠깐 잠이 들었는데, 엄마의 맥박이 뛰는 것이 느껴졌습니다.

깜짝 놀라서 일어나서 목과 손목의 맥을 짚어 보았습니다. 맥박이 뛰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어요.

그런데 아무리 흔들어도 엄마는 꼼짝도 하지 않으셨습니다.

제 맥박 뛰는 것을 엄마의 맥박으로 착각했음을 한참 후에야 알았습니다.

밤새 내내 엄마와 함께 있었습니다. 울다 지쳐 잠깐 잠이 들었다가 깨면 또 엄마를 보듬고 울었습니다.

아침까지 엄마는 그저 잠을 주무시고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아무렇지도 않으셨었습니다.


그래서인지, 돌아가신 후 11년이 훌쩍 지났지만 지금도 엄마가 살아계신 꿈을 자주 꿉니다.

꿈에서 '돌아가셨고 화장까지 했는데 어떻게 살아오셨지?'라는 생각을 합니다.


장례를 치르는 내내 저는 제정신이 아니었었습니다.

위로하러 오시는 분들께 무례한 줄 알면서도 웃을 수가 없었습니다.


제가 이러했으니, 배우자를 잃은 아버지의 슬픔은 어땠을까요.

85세의 연세로 인한 연륜 때문인지 아무렇지도 않아 보였습니다.

그래도 마음속으로는 너무 힘드실 것이라 생각했지요.


장례식이 끝난 후 아내가 제게 말했습니다.

''어머님 돌아가신 날 아버님께서 부르시더니 <시어머니가 돌아가셨어도 나한테 주는 생활비는 줄이면 안 된다>라고 말씀하셨으니 생활비는 그대로 드려야 할 것 같아요"

비록 지방 도시의 27평밖에 안되지만, 돈 벌자마자 아파트를 사드렸고, 아파트 관리비와 전화비 등을 비롯한 일체의 비용은 제 통장에서 빠져나가게 했었고, 

두 분이 식사하시거나 용돈으로 쓸 돈을 드렸었는데,

아버지는 엄마가 돌아가시면 드리는 돈을 줄일 것이라고 미리 걱정을 하셨던 모양입니다.


배우자를 잃어서 마음이 허전하실 것이니 돈이라도 넉넉히 있어야 하지 않겠느냐는 생각에

매달 드리던 금액보다 훨씬 더 드리자고 얘기를 했고,

저는 한 달에 통신비 포함하여 50만 원도 안 쓰는데

아버지께는 두 분이 계실 때보다 훨씬 더 드렸습니다. 200만 원씩 드렸지요.

친구들도 자주 만나 식사 대접도 하고, 손자들 용돈도 자주 주면서 즐겁게 여생을 보내시도록 해 드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손자들 용돈도 거의 주시지 않고, 친구들에게 식사 대접도 잘하지 않는데,

가끔 제가 일하는 곳에 오셔서 '아는 사람 손자 결혼식에 가야 한다.' '누가 죽어서 장례식장에 가야 한다'면서 돈이 없다고 돈을 달라 하셨습니다.

저는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지만, '그 돈을 다 어디에 쓰셨느냐'라고 묻고 싶었지만,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그냥 드렸지요.


그렇게 4년의 세월이 흐른 뒤,

막내 고모를 뵈러 갈 일이 있어서 간 날. 

막내 고모로부터 충격적인 말을 들었습니다.

'니 아버지가 다방 여자한테 그동안 계속 돈을 갖다 줘서 4천만 원을 넘게 줬단다. 네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도 줬는 깁더라. 젊을 때부터 그러더니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너한테는 말해야 할 것 같아서'

노인들 등쳐 먹는 중년 여성들이 있다더니, 아버지가 그런 여자에게 돈을 가져다주고 있었던 것입니다.


저는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엄마가 왜 그토록 아버지가 다방에 가는 것을 싫어하셨는지를 이때서야 알았습니다.

가장 큰 시장에서 쌀장사를 했는데, 우리 집을 제외한 다른 집들은 다 부자가 되었는데,

부자가 되기는커녕, 왜 빚에 쪼들렸어야 했는지를 이때서야 알았습니다.

노름과 여자들에게 돈을 가져다주었으니 빚을 질 수밖에 없었지요.


엄마는 죽어라 일을 하고, 저는 어릴 때부터 허리띠를 더 이상 졸라맬 수 없을 만큼 졸라맸었고,

쌀 배달을 해서 돈을 모았고, 좋은 대학교도 가지 못했고, 

납부금과 책 값이 없어서 군에 헐값으로 팔려가는 꼴이 되는 군 장학금을 받았고,

막내 동생은 고등학교밖에 가지 못하고 졸업해서 받은 월급을 거의 집에 들여놓고,

아내와 결혼 후 신혼살림도 차리지 못하고 8년이나 떨어져 살면서 돈을 모아 부모님 빚을 갚았었는데,

그렇게 힘들게 집에 들여놓은 돈들이 다른 여자에게 흘러갔었음은 물론이고,

늙어서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여전히 다방에 드나들며 다방 여자에게 돈을 갖다 바치느라 엄마께 생활비를 덜 드리고, 

엄마 돌아가신 후 제가 드린 돈도 부족하여 일하고 있는 저에게 와서 돈을 달라고 하셨다는 것을 생각하니,


엄마의 마음을 알아주지 못한 제가 너무 원망스러웠고,

그동안의 제 인생이 결국 제가 알지도 못하는 여자들을 위해 살아온 것이었다는 생각이 들면서

저의 모든 것이 송두리째 흔들려버렸습니다.

원망과 분노와 슬픔과 온갖 감정이 뒤섞여 더 이상 앉아 있을 수 없어서 그 말을 들은 즉시 고모께 인사하고 나와서 차에 앉았는데, 운전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온 몸과 마음이 만신창이가 되어있었습니다.

11살 위인 누나에게 전화를 했죠.

결국 대성통곡을 하면서 이런 얘기들을 했습니다.

얼마나 울면서 악을 썼는지 모릅니다.

옆에 타고 있던 아내도 어쩔 줄 몰라하며 함께 울었지요.

단지 저에게 시집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시아버지가 다른 여자들에게 가져다 바친 돈을 갚느라 

8년 동안 남편과 떨어져서 시부모님을 모시고 자식들을 키웠으니 어찌 그러지 않겠습니까.


이로부터 3년 후,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까지 저는 아버지께 제가 이 사실을 알고 있다는 사실을 숨겼으며,

단 한 번도 따지거나 원망의 말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제 마음에, 가슴에, 뇌리에 깊이깊이 박혔지요.

그러면서 저의 정신은 많이 망가져 버렸습니다.


그 후로 정신과 약도 먹고, 여러 노력을 했지만

엄마께 죄송한 마음과 어린 시절의 제가 생각나며 자주 눈물이 흘렀습니다.


도대체 아버지는 왜 그랬을까요?

18살 때 시집와서 엄청난 시집살이와 고생을 한, 혈혈단신인 엄마가 불쌍하지도 않았을까요?

어린놈이 돈 좀 아껴 보겠다고, 공책 한 줄을 세 줄로 나누어 필기를 하고, 배달을 하고, 자신의 인생을 밑으로 끌어내리는 것이 안쓰럽지도 않았을까요?

엄마가 돌아가신 바로 그날, 자식은 밤새 슬퍼서 울어대는데,

아버지는 왜 다방 여자에게 가져다 줄 돈이 줄어드는 것을 걱정해야 했을까요.

엄마가 돌아가신 후 혼자 남으신 아버지께 더 잘해드려야 한다고,

매일 출퇴근 시 안부 전화를 드리고, 일주일에 한 번은 꼭 외식을 시켜드리고, 여전히 엄마를 그리워하는 아들에게 미안하지 않으셨을까요?

왜 제가 일하는 곳에까지 오셔서 다방 여자에게 줄 돈을 가져가셔야 했을까요?


이 일을 알고 난 후 아버지는 3년을 더 사셨지만,

저는 지금도 아버지가 왜 그랬는지를 알지 못합니다.

물어보지 않았기에.


엄마께서 아버지보다 오래 사셨다면,

아버지가 다방 여자 등 제가 알지 못하는 여자들에게 오랜 기간 돈을 가져다줬다는 것도 몰랐을 것이고,

저의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아버지가 받은 효도를 엄마께서 다 받으셨을 텐데...


저는 지금도 자주 아버지가 나오는 악몽을 꿉니다.

꿈에서 아버지는 다른 여자를 집에 데리고 오거나, 제 속을 긁어 댑니다.


아버지가 나오는 꿈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아버지에 대한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어떠한 방법으로도 해결이 되지 않아서,

제 머리에 들어 있는 것들을 다 끄집어내어 만천하에 드러내는 방법이 도움이 될 것이라 생각하여

부끄러움을 외면하고 썼습니다.


글을 끝마치며,

꼭 벗어났으면 좋겠다는 소원을 빌어봅니다.


불쾌할 수도 있는 글

참고 다 읽어 주셔서 너무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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