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이놈의 집에 열여덟 살에 시집와가꼬 고생만 고생만 했는디 어따가 말할 곳도 없고 뭔 놈의 팔자가 이렇게 쎈지 모르겄다."
"니그 아부지는 또 어디 가서 노름을 하는지 계집질을 하고 있는지..."
"아부지 어디로 가는지 니가 한번 따라가 봐라. 엄마한테 꼭 알려주고"
"ㅇㅇ 여인숙에 가믄 니 아부지 노름하고 있을 거다. 가서 쫌 오시라 해라"
"빚쟁이들 땜시 못살겄다."
"죽자혀도 너땜시 죽지도 못하고 니가 엄마한텐 힘이여"
"내가 너 하나 보고 사니께 니가 잘 돼서 엄마한테 집도 사주고 해야써야"
"엄마 호강시켜줄꺼제?"
부모는 일찍 돌아가시고, 피붙이는 여동생 한 명 있는데 여동생마저 지적장애가 있어서
세상 어디에 가도,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사람이 없는 엄마는
제가 어릴 때부터 저에게 신세한탄을 하셨었습니다.
엄마가 울면 따라 울면서 넋두리를 들었죠.
엄마 말씀에 격하게 고개를 끄덕이며 불쌍한 엄마를 제가 꼭 호강시켜드려야겠다는 다짐을 매번 했었습니다.
엄마를 기쁘게 해 드릴 수 있는 일이라면 뭐든지 했습니다.
말도 잘 듣고, 설거지와 빨래도 하고, 가게 일도 돕고, 동생들도 돌보고, 학용품도 아껴 쓰고, 배달도 하고, 공부도 열심히 했지요.(저의 기억이므로 저에 대해서 좋은 기억만 남아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훗날 엄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 말 대로 잘 자라줘서 고마웠다"라는 말씀을 하셨으니 아주 잘못된 기억은 아닌 듯합니다.^^)
엄마 얘기를 들으면서, 엄마가 불쌍하다는 생각만 했습니다.
듣기 싫다거나, 또 같은 말을 하신다거나, 나도 힘든데 엄마는 왜 나한테 그런 말을 하시는 가에 대한 생각은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습니다.
일자무식(학교도 못 다니셔서 숫자조차 모르셨습니다.)인 엄마는 글로 쓸 수도 없으니 마음에 맺힌 것을 말로 푸실 수밖에 없으셨습니다.
엄마는 힘닿는 데까지 제 뒷바라지를 하셨었습니다.
비록 미약한 힘이셨지만, 엄마는 최선을 다하셨었습니다.
저의 인생 목표는 단 하나였습니다.
'잘 돼서 엄마를 호강시켜 드리자.'
결혼도 엄마를 잘 모시는 여자와 해야겠다는 다짐을 중학교 때부터 했습니다.
온통 머릿속에 이 생각만 있다 보니,
고등학교 1학년 때는 착하게 보이는 처음 본 여학생 뒤를 쫓아 그 집까지 간 적이 있었고, (당일에 이 사실이 발각되어 아버지에게 무지막지하게 혼나고 다시는 그러지 않겠다는 약속을 했기에 "나중에 대학교에 가면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못했었습니다.)
대학교 1학년 때 만난 여학생에게 "나에게 무슨 일이 생기더라도 엄마를 잘 모셔 줄 수 있느냐"는 말을 했었네요.
"그러겠다"라고 대답한 그 여학생은 훗날 그 약속을 지켰습니다.
일도, 공부도 엄마를 위해서 했습니다.
엄마가 그토록 원망하는 아버지처럼 되지 않기 위해서,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다 보니 마이너스로 시작한 인생이 남부럽지 않은 인생으로 바뀌어 있었습니다.
쓰고 보니 쓰기 시작할 때 의도와 다르게 제 자랑이 되어버렸네요. 머쓱.
지금 엄마는 제 곁에 계시지 않지만,
엄마의 넋두리가, 엄마의 신세한탄이, 엄마가 저에게 짊어지게 한 엄청난 부담감이
제가 잘 살게 된 원동력이었습니다.
엄마는 저에게 자신의 얘기를 여과 없이 막 쏟아내셨지만,
엄마의 모든 얘기는 저에게 강인한 정신력을 심어 주었고, 살면서 닥치는 모든 파도를 이겨내기에 부족함이 없었습니다.
그렇지 않은 엄마도 있겠지만,
엄마가 하는 모든 얘기는 '자식이 잘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오는 고귀한 말씀입니다.
누나도 있고, 여동생들도 있는데
저에게 넋두리를 끊임없이 늘어놓아주신 엄마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