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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Dec 30. 2020

넷플릭스 영화 "콜"을 보고

개연성 부족과 넘치는 모순

전화기로 연결되는 과거와 현재에서 벌어지는 스릴러 영화.

요즘 타임슬립 영화나 드라마가 유행인 듯싶다.

과거와 현재가 우체통을 통해 연결되는 '시월애',  무전기를 통해  연결되는 '시그널',  

전화를 통해 연결되는 '더 폰' 등이 이 영화와 비슷한 종류라고 할 수 있다.

다른 점은 스릴러라는 것과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문제를 만들어 상황을 악화시킨 다는 것.

그래서 앞의 세 영화는 '과거와 연결되는 무언가가 있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이 들게 했다면,

"콜"은 '모르는 전화기는 손도 대면 안된다'라는 경각심을 일깨워준다고 할 수 있다.

서연(박신혜 분)이 캐리어를 끌고 논 사잇길(언덕처럼 보이게 연출했다)을 걸어가는 장면으로 영화가 시작된다.

지나가던 딸기농장 아저씨 성호 (오정세 분)가 딸기 트럭을 몰고 지나가다가 태워준다.

"야 인마 이제야 나타나면 어떡하냐. 엄마 병원에는 가봤어?"

KTX에 폰을 두고 내린 서연은 대답 대신 "아저씨 핸드폰 좀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라고 말한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첫 대화 속에 이 영화의 많은 것이 담겨 있다.

핸드폰을 잃어버렸기에 할 수 없이 전화기를 찾게 되고 전화기를 연결하면서 사건을 일으킨다.

핸드폰만 있었다면 연쇄살인이 일어나지 않았고,

현재 살아있는 사람이 과거에 죽는 일은 없었다.


영화 내용에 대한 감상평을 쓰려고 영화를 봤다.

그런데, 영화를 보다가 너무 말도 안 되는 모순들이 많아서

이 모순을 지적하는 것이 영화에 대한 느낌을 말하는 것보다 더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폰으로 현재와 과거가 연결되는 것 자체가 이미 개연성이 없는 것이고 상상이기에

웬만한 것은 그냥 그러려니 하고 영화에 집중하는 편인데,

이 영화는 영화에 집중을 할 수 없을 만큼 너무 말이 안 되는 부분이 많았다.

영화의 내용을 말하지 않고서는 이것에 대해 말할 수 없기에 줄거리를 거의 다 얘기하게 되므로,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이 글을 읽지 마시기 바랍니다.


핸드폰을 기차에 두고 내림.

서연이는 전화기를 찾아 연결해서 자신의 폰에 전화를 걸었으나,

전화기를 주운 사람이 사례비를 달라하면서 끊어버린다.

전화벨이 울리고 “니말이 맞아. 엄마 진짜 미쳤어. 나 집에 완전히 갇혔어”

“어디에 전화 거셨어요?”

“선희네 아니에요?” 뚝.

이렇게 과거와 현재는 전화기를 통해 연결된다.

2층에 올라가 벽에 못을 박는데, 못이 박히지 않는다. 두드려보니 벽 뒤는 빈 공간.

못을 넣어보니 벽 뒤로 떨어지며 소리를 낸다. 벽을 허문다.

벽 뒤에는 있는 계단을 내려가면서 과거의 공간과 현재의 공간이 겹치지 시작한다.

서연은 오래된 상자에서 일기장과 서태지와 아이들 사진,

1999년 11월 26일에 찍은 소녀의 사진을 발견한다.

또 전화벨이 울리고,

절규하듯 울부짖는 목소리

 “선희야 나야 나.” 비명 소리.

“엄마가 지금 내 몸에 불을 붙이려고 그래”

장면은 전화기 너머 1999년대로 바뀌고 소녀가 엎드린 체로 엄마에게 끌려간다.

전화기는 내동댕이 쳐져있고.

횃불을 든 엄마가 딸의 몸에 불을 붙이려 하다가 횃불이 떨어진다.

그리고 뚫린 벽 사이로 연기가 피어오른다.

과거와 현재가 연결된 것이다.


1999년 11월 18일의 영숙이와 2019년 11월 18일의 서연이.

영숙이가 미래와 연결되었다는 것을 믿지 못하고,  믿게 하기 위해 영숙이의 일기장 내용을 읽어주고.  

이 날 비행기 추락사고가 일어날 것이라는 것을 알려준다.

티브이에 추락사고 뉴스가 나오고 영숙이는 서연이 말을 믿게 된다.

둘은 아주 친해진다.


1999년 11월 21일.

서연이와 서연이 부모는 부동산 아저씨와 함께 영숙이 집으로 집을 보러 온다.



영숙이는 서연이와 서연이 아빠 대화를 미래의 서연이에게 들려준다.

아빠의 목소리를 듣고 폭풍 눈물을 흘리는 서연이에게 영숙이는 아빠를 살려보겠다고 말한다.

서연이 아빠를 살리기 위해 버스를 타고 서연이 집에 간다. 11월 27일.

가스 폭발로 서연이 아빠가 죽은 날짜이다


전화를 기다리던 서연이의 다리 화상 흉터가 사라지고, 집의 모든 것이 바뀐다.

입고 있던 옷도 바뀌고, 서연은 바뀌는 것을 모두 보고 있고, 심지어 만지려고도 한다.


아빠도 살아있고, 20여 년 전에 이사 와서 오손도손 잘 살아온 것으로 2019년 이전의 과거가 모두 바뀌었다.

그런데 서연이는 현재 가지고 있는 기억 외에 어떠한 새로운 기억도 없다.

모든 것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서연이의 기억은 눈곱만큼도 변하지 않는다.

부모는 서연이와 20년을 함께 살아온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대하는데,

서연이만 현재의 기억 속에 갇혀있다.

그래서 너무 놀라워하고 아빠를 안고 운다.


어찌 보면 이것은 이 영화에서 가장 말도 안 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다.

백번 양보해서 어차피 공상 영화이고,

영숙이와 전화기로 연결되고 있다는 것을 잊어버리면 영화가 진행되지 못하니까

영숙이와의 통화 이후의 사실은 기억에 남겨놓더라도,

모든 것이 바뀌었으니, 과거의 기억도 새롭게 바뀌어서 부모랑 어떻게 살아왔는지 정도는 알아야 한다고 본다.

설령 이것을 알더라도 영화의 진행에는 아무런 무리가 없으니까 말이다.

물론, 이후에 계속 과거가 바뀌므로 기억도 자꾸 바뀌어야 하겠지만 그래도 영화에는 아무런 지장을 주지 않는다.

오히려, 과거의 기억이 바뀌어 있고,

이 기억에 근거해서 서연이가 무언가를 더 찾아내는 식으로 각본이 써졌다면

내용이 더 풍부하고 재미있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서연이는 영숙이에게 전화해서 고맙다고 하고, 미래가 진짜 바뀐 것을 확인한 영숙이는 신기해한다.

서태지 노래를 들려주면 둘은 급격히 가까워진다.

과거에 영숙이가 과자통을 묻어 놓으면

미래에서 즉시 서연이가 20년 지난 후의 과자 통을 받을 수 있다.

정확히 20년 차이. 날짜는 같은 것이다.

12월 3일 영숙이는 엄마 몰래 전화기를 가지러 온다.

그런데, 서연이는 부모랑 즐겁게 노느라 바빠서 전화를 받지 않는다.

영숙이가 몇 번의 전화를 한 후에야 서연이는 전화를 받는다.

깔깔대며 웃는 영숙이.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서연이.

상황이 바뀌는 장면이다. 이 영화의 진짜 시작.

거친 숨소리와 욕설. 뭔가 잘못되고 있음을 직감하고, 전화기 너머로 비명 소리가 들린다.

영숙이 엄마 목소리가 들려오고. “다신 영숙이랑 전화하지 마라. 네가 다친다."

계모는 이미 영숙이가 연쇄살인마가 될 것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퇴마 의식을 행하고, 결국 영숙이를 죽였던 것이다.

전화를 끊고 영숙이가 걱정이 되어 서연이는 2층의 뚫었던 벽으로 가보았으나,

과거가 바뀌고, 집이 바뀌면서 2층에 뚫었던 벽도 다시 깔끔하게 막혀있다.         

서연이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를 알기 위해, 인터넷 검색을 하고

신문기사를 찾아낸다.

1999년 12월 30일 자 신문이다.


11월 18일에 대화를 시작했으니, 서연이와 영숙이는 42일 동안 전화기로 대화를 했다.

그리고 영숙이는 12월 29일에 죽게 된다.

그런데, 이 기사에는 자체 모순이 있다.

위의 기사 내용을 보면,

'지난 1일 재판부는 퇴마 굿을 한다며 자신의 신딸을 살해한 혐의로 성우 모씨에게 징역 13년을 선고했다.'라고

쓰여 있다.

12월 30일 자 신문에 지난 1일이라고 했으면 아무리 늦어야 12월 1일이 될 것이다.

소제목은 '어젯밤(12월 29일) 가정집에서 벌어진 엽기적 살인'이라고 써놓고,

기사 내용은 판결까지 내려졌다니 참으로 황당한 내용이 아닐 수 없다.

그것도 지난 1일에.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바로 다음 장면부터는 아예 영숙이가 죽는 날짜가 바뀌어 버린다.

이 기사를 보고 나서 서연이가 영숙이에게 오늘 계모가 죽일 거라고 알려주는 장면이 나오기 직전에,

오늘의 날짜를 보여준다.

서연이가 저 기사를 보고 죽는 날짜를 알려주려 했으니,

당연히 이 날은 2020년 12월 29일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화면에 나오는 날짜는 12월 5일.

과거에 의해 현재의 상황이 바뀐다고 할지라도 날짜는 바뀌지 않고,

더군다나 과거에서 바뀐 것은 오직 서연이 아빠가 살아난 것뿐이고,

여전히 영숙이는 12월 29일에 계모에게 죽임을 당할 상황에 처해있고,

서연이는 위의 기사를 보고 영숙이에게 "오늘 밤 너가 죽는 것 같아"라고 말했으므로

결코 화면에 12월 5일이라는 날짜가 보여서는 안 된다.

이때부터 날짜는 뒤죽박죽이 되고, 내 머리도 뒤죽박죽이 되었다.

그렇잖아도 너무 개연성이 떨어지는데, 날짜까지 이러하니 영화에 집중을 할 수가 없었다.

차라리 날짜를 보여주지 말든지.


영화 처음으로 돌아가서 영숙이가 서연이 아빠를 살리기 전의 과거의 시각을 봐보자.

11월 18일부터 대화 시작, 11월 21일 서연이네는 영숙이 집을 보러 왔다.

11월 26일 영숙이 사진, 서연이 아빠 사망일 11월 27일.

영숙이는 11월 27일에 서연이 아빠를 살린다.

12월 3일 전화를 잘 받지 않았던 서연이에게 영숙이는 화가 난다.

서연이는 기사를 찾아보고, 12월 30일 자 기사를 읽게 된다.

12월 5일 시계를 보여주고, 서연이는 영숙이에게 '오늘 밤에 죽을 것'이라고 알려준다.

결국, 이 상황에서 보면 신문 기사의 날짜에 대해 영화가 실수를 했다고 볼 수 있다.

깔끔하게 이 신문 기사의 날짜만 바꿨다면 괜찮았을 것이라고.

나도 이렇게 생각했다.

그런데, 영화 후반부로 가면서 '아이고, 이게 뭔가'라고 탄식을 할 수밖에 없었다.


어찌 되었건, 여기까지는 영숙이가 죽은 날짜가 두 개가 되어버렸으니

일단 영화 중반부 내용에 입각하여, 여기서는 12월 5일을 선택하기로 하자.

더군다나 후반부에 나오는 서연이 아빠 묘비에는 서연이 아빠 사망일이 12월 11일로 되어 있으니,

이 날짜를 선택하는 것이 일단은 맞다.


다음 날  2019년 12월 6일 성호는 서연이 집에 딸기를 가지고 놀러 오고,

1999년 12월 6일 성호는 영숙이 집에 딸기를 가지고 간다.


이때부터 영화는 동일한 날에 과거와 현재에서 일어나는 일을 본격적으로 번갈아 가면서 보여준다.

영화의 기법상 좋은 선택이었고, 영화의 박진감과 흥미를 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성호는 영숙이에게 살해되고, 전화기로 서연이는 이 상황을 듣고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는데,

딸기 먹다가 옷에 흘린 딸기 자국이 사라지고, 아래층에 내려가 보니

미래에서는 이미 와있던 성호는 어디론가 가버리고 없고 서연이 부모는 성호라는 사람을 알지도 못한다.

경찰서에 가서 물어보니 캐비닛에서 수첩을 꺼내어 성호는 죽었고,

살인자 영숙이는 잡혔다고 한다.


1999년 12월 7일 경찰이 영숙이를 찾아가서 박성호에 대해서 물어보고, 영숙이는 횡설수설한다.

경찰은 그대로 돌아가고, 영숙이는 토막 내서 비닐봉지에 담아두었던 것들을 치우면서 서연에게 전화한다.

서연이는 영숙이에게 '연쇄 살인마 오영숙 무기징역 선고'라는 신문 내용을 알려준다.

경찰이 어떤 증거를 찾았는지 알아보라고 하는 영숙. 그럴 생각이 없는 서연.

영숙이는 아빠를 살려 준 은혜를 모른다고 욕을 해대고,

서연이는 전화를 끊고, 계속 걸려오는 영숙이의 전화를 받지 않는다.


1999년 12월 11일. 서연이 아빠는 서연이와 함께 영숙이 집에 온다.

영화 끝 부분 묘비에 서연이 아빠 사망일이 11월 27일에서 12월 11일로 바뀌어 있다.

그러므로 서연이 아빠가 죽고, 어린 서연이가 인질로 잡힌 날은 1999년 12월 11일이다.

2019년 12월 11일은 서연이가 아빠에게서 운전 연수를 받는다.

1999년에서 아빠는 죽고,

2019년에서는  조수석에 앉아 서연이에게 운전 연수를 시켜주던 아빠는 서연이가 보는 앞에서 사라지게  된다.

결국 다시 미래의 모든 것이 바뀌게 된다.

과거에 아빠가 죽어버렸으니 운전 연수도 시켜주러 왔을 리가 없는데,

서연이는 운전 연수를 받으며 들어왔던 터널에 쓰러져 있다.

이런 황당한 일이.

 그곳에 간 적도 없어야 하기에 이왕이면 서연이도 공간 이동해서 터널이 아닌 다른 곳에 있었어야 했다.

굳이 터널에서부터 다시 폐허가 되어버린 집까지 뛰어가는 장면을 만들기 위해서 이런 무리수를 써야 했는지...

서연이 아빠가 영숙이에게 죽임을 당했으니, 서연이네는 영숙이 집에 살았을 리가 없고,

집이 폐허가 되어 있었다는 것은 영숙이도 살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숙이가 경찰에게 잡힌 날은 영화에 나오지 않는다.

경찰수첩에 계모와 성호만 죽인 것으로 쓰여 있는 것을 보면, 12월 11일 이전에 잡혔어야 한다.

왜냐하면, 만약 그 이후에 잡혔다면 인질로 잡혔던 서연이도 발견했을 것이고 서연이 아빠도 살해당한 것으로 기록되어있어야 하니까.

그런데, 6일에 성호를 죽이고 11일에 서연이 아빠가 영숙이 집에 올 때까지 영숙이는 잡히지 않았다.

아직 증거를 없애지 못했음에도 말이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터널에서 한달음에 폐허가 된 집에 간 서연이는 과거의 영숙이가  바닥에 ‘전화받아’라고 쓰여 있는 글씨를 보고

울리는 전화를 받는다.

영숙이는 어린 서연이 인질로 잡혀있다는 사실을 알리고,

경찰이 어떻게 자신의 연쇄살인을 알게 되었는지 찾아서 알려주라고 협박한다. 

한 시간 준다고 한다.

서연이는 과거의 영숙이를 죽일 방법을 찾기 위해 인터넷을 검색한다.

1999년 12월 31일 사고. 이게 말이 되는가.

전반부 영화의 전개 상, 영숙이가 죽은 날을 12월 29일이 아닌 12월 5일로 선택해놓고 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죽고 나서 한 달음에 달려가 바로 전화를 받고 검색을 했는데, 12월 31일 사고를 검색한다.

아버지가 11일에 죽었고, 어린 서연이가 잡혀있는 상황인데

영숙이를 유인해서 죽이려고 무려 20일이 더 지난 후의 날짜를 검색하는 것은 말이 안 된다.

그래서 찰나에 지나가는 화순 비닐하우스 화재 사건 기사를 화면 정지하여 겨우 봤더니,

31일 사고를 검색했는데, 12월 11일 화재 사건 기사이다.

영화 전개상 12월 11일 사고를 검색했어야 하는데 실수를 한 것이다.

그런데, 왜 이런 실수가 나왔을까. 원인은 영화 후반부에 나온다.

모로 가도 서울만 가도 된다고, 다시 12월 11일로 돌아왔으니,

한 시간 준다고 하는 것도 맞고,

어린 서연이가 고통을 20일이나 당하지 않아도 되니 다행이라 여기기로 한다.

후반부에 가서 다시 뒤죽박죽 되는 것에 비하면 이 정도 실수는 그냥 애교로 넘길 수 있으니 말이다.


서연이는 영숙이를 화순으로 유인하기 위해 영숙이가 잡히게 된 결정적 증거가 되는 것이 무엇인지 검색한다.

또다시 황당한 기사.

12월 5일에 계모가 죽었고, 6일에 성호 딸기 아저씨가 죽었단다. 그리고 23일에 검찰에 넘긴단다.

이 상황도 자체 모순이 발생한다.

12월 11일 오후 5시에 화순 비닐하우스에서 불이 난다.

12월 11일에 서연이 아빠를 죽인 후에 바뀐 과거는 없으니,

경찰이 범행 도구를 발견한 시점은 최소한 12월 11일 이후이고,  

이때까지 영숙이는 잡히지 않은 것이므로

신문기사에는 당연히 서연이 아빠도 언급이 되었어야 한다.

23일에 검찰에 넘길 예정인 것으로 봐서는 더욱더 그러하다.


서연이에게 속아 화순에 간 영숙이는 죽지 않고 심한 부상을 입은 상태로 돌아와 서연이에게 전화한다.

영숙이는 과거의 어린 서연에게 뜨거운 물을 붓고 현재의 서연이 몸에는 화상 흉터가 다시 생긴다.

서연이 엄마도 그 집으로 오고 있다는 것을 영숙이는 미래의 서연이에게 알려준다.

아빠를 죽인 사람도 엄마가 아니라 서연이가 가스불을 다시 켜서 사고가 일어난 것이라고 말해준다.

엄마를 대신 죽여줄까라고 물어본다.

결국 2019년의 서연은 즉시 경찰서로 수첩을 찾으러 가고

수첩에서 증거물을 발견한 장소를 찾아내어 알려준다.

영숙이는 고물상 할아버지를 죽이고 증거물을 없앤다.


화순과 보성은 가깝다. 그러므로 증거물을 없앤 날은 12월 11일이다.

서연이 아빠가 죽은 사실은 바뀌지 않았고, 고물상 할아버지가 살해되었지만,

영화의 내용상 영숙이는 경찰에게 잡힐 가능성이 없다.

이제 영화는 다른 내용으로 방향을 튼다.


서연이 엄마는 영숙이 집에 간 남편과 서연이에게 문제가 생겼음을 직감하고

영숙이가 할아버지를 죽이는 시점에 영숙이 집에 갔다가 경찰서에 가서 실종 신고를 한다.

이때도 당연히 12월 11일이어야만 한다.

경찰은 수첩에 실종신고 접수 내용을 기록하고,

2019년 서연이가 들고 있던 수첩의 내용에도 이것이 기록된다.

영숙이가 증거물을 없앴으니 영숙이는 잡히지 않게 되고,

이때부터 영숙이는 그 집에 살면서 연쇄살인을 했다는 것을 말해주듯이

2019년의 집이 냉장고가 가득한 음산한 집으로 바뀐다.

서연이는 뛰어나오고. 그 집에서 미래의 영숙이가 과거의 영숙이에게 전화를 한다

“잘 들어 니가 죽을 수도 있어”    

이 시각 과거에서는 서연이 엄마는 경찰과 함께 영숙이 집에 도착한다.

당연히 이 날도 1999년 12월 11일이어야만 한다.

영숙이가 고물상 할아버지 죽이러 간 날, 서연이 엄마는 영숙이 집에 들렀다가 경찰서에 실종 신고를 하러 갔고, 경찰과 함께 바로 영숙이 집으로 왔기 때문이다.

경찰의 바뀐 수첩을 보고서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2019년의 서연은

수첩에 '무선전화기 사용'이라고 쓰여있는 시간에 맞춰서 전화를 받기 위해 전화기를 찾는다.


이때 영화의 정말 황당한 장면이 등장한다.

현재는 2020년 자정을 알리는 괘종시계 소리가 울리고,

과거는 2000년 보신각 종 타종 소리가 티브이에서 나온다.   

12월 31일이 끝나고, 1월 1일 0시 새해를 알리는 보신각 종 타종 소리가...

12월 11일이어야만 하는데 말이다.

영숙이의 진술을 적고 있는 경찰 뒤쪽에 있는 달력 날짜는 12월 31일.

영화 중반부부터 지금까지 12월 11일에 맞춰져 있던 시간대가 갑자기 12월 31일에 맞춰져 버린다.


어떻게 이런 상황이 발생하게 된 것일까?


전반부 기사(계모가 잡힌 것을 보도한)에 맞추면

12월 31일에 일어난 사고 기사 검색과 보신각 종 타종은 맞지만,

12월 5일 시계 달력, 5일 엄마 살해, 6일 성호 살해, 23일 검찰에 넘겼다는 기사와,

11일 아빠 살해, 비닐하우스 화재, 고물상 할아버지 살해, 경찰 살해가 전혀 맞지 않는다.

아빠 묘비에 12월 11일에 죽었다고 쓰여 있는 것도 맞지 않는다.

전반부 기사대로 라면 12월 31일에 아빠가 죽었어야 하기 때문이다.


후반부 기사(12월 5일 계모 살해)에 맞추면,

계모가 잡힌 기사, 12월 31일 기사 검색, 영숙이 집에 간 경찰 뒤로 보이는 31일 달력,

보신각 종 타종이 맞지 않는다.

이것이 맞다 하면 저것이 틀리고 저것이 맞다 하면 이것이 틀리는

완전 뒤죽박죽이다.


영화에서 절대 빠져서는 안 되는 장면 중의 하나가 보신각 종 타종인 것 같다.

보신각 종 타종은 비록 영화 막바지에 나오지만, 처음부터 작가는 이것을 염두에 두고 있다 보니,

영화의 전반적인 흐름은 11월 18일에서 12월 11일까지 일어난 사건임에도 불구하고

계모 잡히는 기사를 실은 12월 30일 자 신문, 사고 검색도 12월 31일 사고, 달력 날짜도 12월 31일로 써지는 실수를 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보신각 종 타종에 맞춰서,

서연이가 영숙이에게 죽임을 당할 것이라고 알려줄 때 보여 준 시계 달력은 12월 29일로, 

영숙이가 잡힌 후반부 기사는 12월 29일 계모 살해, 30일 성호 살해,

31일 서연 아빠 살해, 서연이를 감금했다는 내용을 쓰고 1월 23일 검찰에 넘겨졌다고 썼어야 한다.

비닐하우스 화재 시각도 12월 31일 5시로, 아빠 묘비 사망 날짜도 12월 31일로 바꿨어야만 했다.

영화의 흐름도 11월 18일에서 12월 31일까지 일어난 사건으로 구성되었어야 한다.

서연이와 영숙이가 이 기간 동안 많은 전화를 주고받고,

서연이가 부모와 즐겁게 보내는 시간도 충분히 주고,

그러다 보니 영숙이에게 소홀해져서 영숙이의 질투와 분노를 일으키게 되고,

엄마로부터 계속 시달리던 영숙이에게 서연이가 29일에 죽을 것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영화가 급박하게 돌아갔어야 한다.

날짜에 대한 것은 이것까지만 얘기하고, 상황으로 가보자


집을 여기저기 살펴봤으나 아무것도 찾지 못한 서연이 엄마는 남편에게 전화를 하겠다고 하고,

영숙이는 전화기가 고장 났다고 말하지만 서연이 엄마는 전화기를 들고 고장 나지 않은 것을 확인한다.

미래의 영숙이가 과거의 영숙이에게 죽을 수도 있다고 경고하면서 전화기를 끝까지 가지고 있으라고 말을 했는데, 전화기를 버젓이 보이는 곳에 놔두어서 전화를 하게 했다는 것은 개연성이 상당히 떨어지지만,

서연이 엄마가 미래의 서연이와 통화를 해야 이야기가 진행되므로

과거의 영숙이가 철저하지 못한 캐릭터라는 것으로 충분히 이해하고 넘어가기로 한다.


이제 본격적으로 과거와 현재가 교차된다.

서연이 엄마는 남편에게 전화를 한다.

2020년의 서연이가 전화를 받고 엄마에게 빨리 도망치라 말하는데,  영숙이가 서연이를 둔기로 내려친다.

2000년의 서연이 엄마가 보는 앞에서 영숙이는 경찰을 살해한다.

2020년에 다시 전화벨이 울리고

영숙이와 서연이는 서로 전화를 받기 위해 싸우다가(건강한 28세의 서연이가 술과 담배와 세월에 찌든 48세의 영숙이에게 전반적으로 싸움에서 밀리는 것은 애교에 불과하다)

서연이가 울리는 전화기를 들고 2층으로 도망간다.

2000년에서는 서연이 엄마가 전화기를 들고 2층으로 도망간다.

둘은 영숙이 방에 들어가 문을 잠근다.

엄마가 또 전화를 한다.

서연이 엄마는 서연이 말대로 무기가 될만한 소화기를 든다.

양 시간대의 두 영숙이는 똑같이 방문을 칼로 부수기 시작한다.

그때, 2000년에서는 문 밖에서 살려달라고 말하는 어린 서연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서연이 엄마는 문을 열고 나가서 소화기를 바닥에 내팽개치고 서연이를 껴안는다.

"엄마가 있으니까 이제 괜찮아"라고 말하는 엄마.


영숙이가 칼을 들고 설치고 있었는데 뭐가 괜찮다는 것인지.

방금까지 자신을 죽이려고 칼을 들고 설치던 사람에 대한 생각은 전혀 하지 않는다. 살펴보지도 않는다.

영숙이가 칼을 휘둘러 찔리고서야 정신을 차린다.

 

문을 나오자마자 소화기를 든 채로 영숙이부터 찾았어야 했다.

사실 이러한 상황은 이 영화에서만 그러는 것이 아니고,

딸의 울음소리에 넋이 나간 나머지 경황이 없었던 것으로 여기면 문제가 되지 않으니 괜찮다.

하지만, 서연이나 서연이 엄마는 왜 이리 머리가 돌아가지 않는지 알 수가 없다.

영숙이 빼고는 주연이든 조연이든 모든 캐릭터가 다 멍청하다.

조금 적당히 해야 하는데...

그냥 영화일 뿐이니까 까짓것 세상에 악인 빼고는 다 멍청할 수 있다고 넘어가기로 하자.

내가 너무 영화에 몰입한 나머지 실제 상황으로 여겨졌다고 내 머리를 쥐어박는 것으로 끝내자.

영화는 계속 봐야 하고,  이 영화의 큰 문제는 지금부터니까.


둘이 격투를 하다가 방으로 들어갔는데, 온몸에 피가 묻어있는 영숙이만 나온다.

이 정도라면 엄마는 죽었어야 한다. 죽은 것을 확인하지도 않고 영숙이가 나올 리가 없다.

양쪽 서연이는 영숙이에게 죽기 일보 직전이다.

아무리 칼에 찔리고 총에 맞아도 죽지 않은 주인공처럼

갑자기 방에서 엄마가 달려 나오고, 영숙이를 안고 아래층으로 떨어진다.

둘 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

서연이의 눈 앞까지 와서 칼을 휘두르려던 2020년의 영숙이는 사라져 버린다.

서연이가 입고 있던 옷도 바뀐다.

그런데 집은 전혀 변화가 없다.

영숙이가 사라졌다는 것은 죽었음을 의미한다.

집이 변하지 않는다는 것은 영숙이가 살고 엄마는 죽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이 영화는 과거에 누군가가 죽으면 현재가 바로 바뀌기 때문이다.

영숙이가 사라졌으면 집도 바뀌었어야 한다.

집은 바꾸지 않으면서 서연이 옷은 굳이 왜 바꿨는지.

자체 모순이다.


일단, 영화에서는 아직 누가 살았다는 말이 없으므로,

영숙이가 살았던지, 엄마가 살았던지, 아니면 둘 다 살고 영숙이가 잡혀갔던지, 둘 다 죽었던지

어떠한 경우에도 서연이는 그 집에서 살지 않았을 것 같은데 그 집에 여전히 살고 있었나 보다.

이것도 개연성이 없다.

서연이는 그 집에서 뛰어나와 이 영화의 처음에 등장했던 논 사잇길을 뛰어서 엄마가 입원해있던 병원으로 간다. 엄마가 없다.

경찰서에 가서 영천리 4번지에 살았던 사람 아냐고 물어본다. 경찰은 모른다고 한다.

경찰이 모른다고 답한 것은 개연성이 있다.

앞에서 설명했던 대로, 어떤 경우에도 서연이네는 여기로 이사를 온 적도 없고 산 적도 없어야 하니까.

하지만, 서연이는 그동안 과거가 바뀌면 현재도 바뀌는 것을 경험했었기에,

엄마가 이 동네에 살았던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어야 한다.

최소한 경찰이 모른다고 대답했을 때라도, 서연이는 알았어야 한다.

엄마를 찾아다니는 심정은 이해하지만, 굳이 필요했을까 싶은 장면이다.

이것은 개연성이 없는 것이니까.

어찌 되었건 경찰 말을 듣고 서연이는 엄마가 죽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경찰서에서 나온 서연이는 곧바로 뛰어서 묘지에 간다.

마치 영천리에 있는 묘지에 간 것처럼 여겨지는 상황이다.

아마 부모의 묘를 찾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차라리 엄마를 찾아다니는 장면을 빼고 곧바로 묘지에 간 것이 그나마 더 개연성이 있다.

왜냐하면, 과거가 바뀌어서 서연이네가 살았던 적도 없는 마을에 부모가 묻혀있을 리 만무하기 때문에,

서연이는 영숙이가 눈 앞에서 사라질 때,

공간이동해서 원래 살았던 집에 있거나 다른 어느 곳엔가 있고,

예전에 아버지가 묻혀있던 곳으로 가보는 것이 맞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릴 때 영숙이에게 잡혀서 뜨거운 물고문을 당하고, 엄마가 올 때까지 공포에 떨고 있다가

엄마와 영숙이가 1층으로 떨어진 것을 목격했는데도,

여전히 기억은 전혀 변화가 없고 오직 현실의 기억만이 있는 서연이,

심지어 바뀐 미래에 대한 기억은 다 가지고 있는 서연이이기에,

아빠는 예전 장소가 아닌 다른 장소에 묻혔을 것이라는 똑똑한 생각을 하게 되고

경찰서에서 나오자마자 여기저기 수소문 끝에 아버지가 묻혀 있는 곳을 알아낸 후(영화 내용상 엄마가 살아서 서연이 앞에 나타나므로 관공서에서는 아버지 묘소만 알려주었을 것이다.)  차를 타고 와서 내려서 뛰어왔다고 생각하기로 하자.


그런데, 황당한 일이 벌어진다.

오열하고 있는 서연이에게 "서연아, 너 왜 전화 안 받아. 전화를 몇 번을 했는데"라고 말하면서 엄마가 온다.

서연이는 깜짝 놀란다. 당연하다. 오직 바뀌지 않은 기억만 가지고 있으니.

"왜 울어"하면서 서연이 눈물을 닦아주는데 서연이 눈에는 엄마가 영숙이와 싸우면서 생긴 온갖 흉터가 보인다.


그렇다면, 영숙이는 죽고, 엄마는 살고, 그래서 어린 서연이를 데리고 나와서 아버지 장례를 치렀을 것이다.

그러므로 엄마는 당연히 산소의 위치를 알고 있을 테니 이상할 것은 없다.

이 장면까지는 서연이 엄마가 살고 영숙이가 죽었음을 말해준다.

엄마가 살아서 어린 서연이를 데리고 예전 살던 집으로 갔을 것이다. 혹은 다른 집으로 이사를 갔을 수도 있다.

그리고 서연이를 계속 챙겨주면서 키웠다.

그렇다면, 서연이가 병원에도 가보고 경찰서도 가보고, 영화에는 나오지 않지만 묘지를 찾기 위해 많은 곳을 다녔을 테니, 찾는 과정에서 최소한 엄마가 살아있고 자신과 같이 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어야 한다.

엄마의 묘지나 엄마가 죽었다는 기록은 어디에도 없으니까 말이다.

엄마가 살아났고 서연이와 함께 살았다는 것과 영숙이는 죽었거나 아무리 많이 봐줘도 사형 선고를 받고 감옥에 있다는 내용을 검색을 통해서든 수소문을 해서든 알아냈어야 한다.

그런 후에 엄마가 살고 있는 집에 가서 엄마를 만나고, 엄마가 살아있음을 기뻐하고,

엄마와 함께 아빠 묘소에 와서 오열하고 나서 엄마와 함께 걸어가는 장면으로 영화가 끝났으면

그나마 마지막에라도 개연성을 찾을 수 있었을 것이다.

더불어서 이 영화 끝에 생기는 모순과 관객의 마음을 답답하게 만드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작가는 다시 뭔가 새로운 것을 시도하고 싶었나 보다.

관객에게 일종의 반전을 선물하고 싶은 마음이 있었을 수도 있다.

그래서인지 영화 후반부에 이 영화가 얼마나 개연성이 없으며 모순인 지를

제대로 보여주는 실수를 하고 만다.


서연이와 엄마는 함께 걸어가고 있다.

서연이 엄마와 경찰이 영숙이를 찾아오기 직전에 2019년 영숙이가 1999년 영숙이에게 전화를 걸었었다.

“네가 죽을 수도 있어, 잘 들어. 곧 너희 집으로 경찰과 서연 엄마가 찾아갈 거야.”

“지금 온 것 같아”

“일이 잘못돼도 전화기를 끝까지 가지고 있어 그래야 다시 바꿀 수 있으니까.”라고 말한다.


영숙이가 죽었었기에 엄마가 살아서 서연이 앞에 나타난 것이다.

미래가 바뀌었다는 것은 영숙이의 죽음이 전제가 되어야만 한다.

영숙이가 살아있음에도 불구하고 미래가 바뀔 수는 없다.

이것은 이 영화가 처음부터 계속 주장했던 줄거리이다.

그런데,

위 대화 내용 중 "네가 죽을 수도 있어"만 앞에서 보여주고,

영화의 막판에, 서연이와 엄마가 즐겁게 묘지에서 걸어가고 있는 중에

대화 전체 내용을 에 공개하더니

바닥에 혼자 쓰러져 있던 영숙이가 깨어난다.


엄마가 영숙이를 안고 아래로 떨어질 때만 해도 전화기는 2층 방에 있었고 영숙이 손에는 없었다.

일이 잘못돼도, 다시 말하면 영숙이가 죽고 서연이 엄마가 살아있더라도,

전화기를 손에 가지고 있으면 다시 바꿔서 영숙이가 살아날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이 대화는 엄마와 경찰이 영숙이 집에 가기 전에 있었던 대화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영화 마지막에 뭔가 반전을 줘야 한다는 생각에,

이 대화를 빌미로 전화기도 가지고 있지 않던 영숙이가 살아난다.

설령 전화기를 가지고 있었다고 할지라도,

도대체 죽었던 영숙이를 어떻게 살렸다는 것인가?

과거에서 그보다 더 앞 시간으로 가는 것은 영화 내용상 불가능하다.

과거의 영숙이가 살아있는 상태에서 미래의 영숙이가 무엇인가를 시도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 머리로는 영숙이 가 살아난 과정을 알아낼 수가 없다.


어찌 되었건, 뭐 이것도 그냥 받아들인다고 치자.

그렇게 살아난 영숙이는 엄마를 죽였을 것이다.

서연이 옆에서 걸어가던 엄마가 사라졌으니까.

그렇다면, 엄마는 아빠와 함께 토막이 나서 영숙이의 냉장고 속에 있어야 한다.

그러하니 엄마만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산소도 사라져야 하고 서연이도 함께 사라져야 한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이 1999년에 영숙이가 서연이를 흰 천으로 덮어놓았듯이,

2020년에도 의자에 묶여서 흰 천에 덮여있는 서연이가 나오고,

천이 벗겨지면서 겁에 질려 놀란 모습을 한 서연이를 보여주며 이 영화는 끝나는데,

이대로라면,

어릴 때부터 서연이는 20년간 영숙이 집에 인질로 잡혀 있었고,

서연이는 영숙이의 살인들을 알고 있고, 목격하거나 심지어 도와주었다고 추측할만한 영화의 대사가 있었으니, 토막시체가 들어있는 냉장고들이 가득 차 있는 집에서 함께 살았다는 것이다.

영숙이가 집에 없을 때는 서연이를 의자에 묶어놓고 흰 천으로 씌워 놓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기억이 전혀 바뀌지 않은 서연이가 놀라는 표정을 지은 것은 당연하겠지만,

존재하지도 않는 산소에서 서연이는 사라지지도 않는다는 것은 도가 지나치다.

엄마와 함께 사라지게 했어야 한다.


어차피 공상 스릴러이고 현실성과는 동떨어진 영화니까 아무렇게나 해도 된다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관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이다.

영화 안에서만이라도 충분한 개연성이 있어야만 한다.

아무리 공상 영화이고, 뭔가 반전을 넣고 싶었을지라도,

이러한 마무리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고 싶다.

오히려 영화를 다 보고 나서 개운함은커녕,

화장실에서 일 보고 뒤처리를 하지 않고 나온 것보다도 더 찝찝한 느낌을 받았다.

물론, 항상 해피엔딩만 있을 수 없고, 어떻게 끝내든 그것은 작가와 제작자의 마음이지만,

아직은 대부분의 관객들이 영화를 보고 일어서면서 영화에서라도 후련함과 즐거움과 행복감을 느끼고 싶어 한다는 것을 조금이라도 감안해주었어야 한다.

그런데, 이 영화는 넷플릭스로 거의 공짜나 다름없이 집 안에서 편안하게 본 나의 기분마저 나쁘게 만들었고,

괜히 이 영화를 봤다는 생각이 들게 했다.   

다른 사람은 어떠했는지 모르겠지만, 나와 같은 느낌을 받은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을 것이다.             


과거와 현재의 상황을 같은 날짜 같은 시각으로 대비시켜서 번갈아 가면서 보여주는 장치는

재미로 보나, 극적인 효과로 보나,

스릴러의 아주 중요한 요소인 긴장감을 배가 시키기에 충분하니 칭찬받아 마땅하다.

배우들의 연기는 정말 나무랄 데 없이 훌륭했다.

특히 영숙 역할의 전종서의 연기는 '검은 사제들'의 박소담을 떠올리기에 충분했다.

더 나았으면 나았지 결코 부족하지 않았다.

그런데 온갖 모순과 찾아보기 힘든 개연성은

이러한 장점을  모두 상쇄시켜버리고, 영화를 혹평할 수밖에 없도록 만들었다.

만약 극장에서 개봉했다면 흥행이 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을 만큼.

뒤에 추가된, 즉 영숙이가 다시 살아난 것이 없다면,

그래도 조금은 더 관객이 들었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관객수에 연연하지 않은 영화들도 많이 있으니,

작가와 감독이 그 정도는 감수하고 영화를 만들었다고 할지라도,

뱀의 그림에 다리를 그린 것 같은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왜 날짜에 집착해서 감상평을 써야만 했는지 궁금하신 분들이 있을 것이다.

작가는 영화의 곳곳에서 날짜를 보여준다.

관객들로 하여금 날짜와 시간에 관심을 갖도록 만든다.

영화의 흐름과 사건들이 날짜와 밀접한 관련이 있고,

과거와 현재가 20년 차이라는 것만 다르고 날짜와 시각은 동일하게 흘러가기 때문이다.

나중에는 같은 시각에 과거와 현재에서 동시에 일어나는 상황을 교차해서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날짜와 시각은 이 영화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이 뒤죽박죽 되어 있다 보니 관객의 입장에서 영화에 대한 집중도도 떨어질 뿐 아니라,

개연성이 떨어지고 많은 모순이 발생하게 되어버렸다.


영화의 재미나 흥행에 있어 개연성이 얼마나 중요한 지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있다.

드라마 도깨비와 구미호뎐이다.

도깨비는 거의 흠잡을 수 없을 만큼 개연성에 있어서 문제가 없었던 반면에,

구미호뎐은 처음부터 끝까지 개연성이 너무 없었다.

물론 이것만으로 두 드라마를 비교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다.

여론조사도 하지 않았기에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단지, 내 견해에서 본다면

두 드라마 모두 같은 기대를 가지고 보기 시작했는데,

구미호뎐은 "아이고, 저거 너무 황당하다" "도대체 어쩌자는 거야"라는 말을 자주 하면서 봤다.

비록 한번 보기 시작한 것이라 끝까지 봤지만, 마지막 회까지 이 말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 구미호뎐보다도 훨씬 더 나를 당황시킨 것이 이 영화였다.

그 이유는 영화 내내 보여주는 뒤죽박죽 날짜와, 자체 모순을 가지고 있는 기사와 상황들이었다.


이 영화에서 느껴지는 메시지는

"과거를 바꾸면 오히려 미래가 더 암울해지고 세상은 더 나빠진다"라는 정도다.

이것 이상 아무것도 없다.

글의 맨 앞에서도 말했듯이,

과거를 바꿔서 현재가 더 나아지는 대부분의 타임슬립과는 다른 결론을 이끌어내고자 했다면

이것은 성공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과거에서 오는 어떠한 연락도 받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으니까.


하지만, 이 메시지 하나 얻자고

영화 보는 내내 황당해하다가,

영화가 끝날 때는 가슴이 답답해지고 머리가 아파지고 마음이 찝찝해지는 고통을 감수할 사람이

얼마나 있을까 싶다.


감상평을 쓰기 위해 영화를 보기 시작했다가,

어처구니없는 내용들이 보였고, 더 자세히 보고 정확히 하기 위해 몇 번을 보면서 화면을 찍고 비교했다.

지금까지 같은 영화를 두 번 이상 본 적이 없다.

그런데 이 영화는 계속 돌려가면서 몇 번이나 봤다.

그러다 보니 감상평 이벤트 공지를 본 직후부터 시작한 감사평을 오늘에야 마치게 되었다.

이렇게까지 한 이유는,

이 영화에 대한 신랄한 비판을 하기 위함도 아니요,

내가 이렇게 철저하게 분석했다고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다.


영화를 너무나 좋아하는 한 사람으로서,

어차피 공들여서 만드는 우리나라 영화를 더욱더 제대로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에서이다.

이렇게까지 파고드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알려줌으로써,

'식스센스' 보다 더 나은 치밀함과 개연성으로 재미와 감동을 모두 줄 수 있는 훌륭한 영화를 만들었으면 하는 마음에서이다.

물론 그러한 한국 영화도 많았다.

그중에 지금도 기억에 최고로 남아있고, 앞으로도 이 정도의 영화가 나올 수 있을까 여겨졌던 영화가 있다.

 '세븐 데이즈'다.


가요처럼 '영화 한류 열풍'이 전 세계를 뒤덮을 날이 속히 오기를 바라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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