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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공작세 Dec 26. 2020

트로트의 민족

김민건의 눈물

요즘 트로트가 대세다.

방송도 유행을 따라간다.

한 방송사에서 어떤 프로그램이 인기를 얻으면, 비슷한 종류의 프로그램들이 홍수를 이룬다.

방송이 미치는 영향은 상당하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방송사의 의도대로 움직이게 되기도 한다.

원래도 트로트를 좋아했던지라, 요즘 트로트의 민족을 자주 본다.

어제는 8강전이 열렸다.

5000명 중 8명이 뽑혔으니 이 8명은 실로 대단한 실력자들이다.

음악 활동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대부분이고, 전혀 몰랐던 김소연, 개그맨 김재롱도 있다.

그 사이에 12살짜리 김민건이 있다.


8강전의 1차전은 자신이 함께 하고 싶은 가수와 함께 부른다.

김민건은 '돌리도'를 선택했고, 이 노래를 부른 서지오와 함께 했다.

연습할 때 대선배 서지오에게 안무를 제안하고 가르쳐 줄 정도로 센스도 뛰어나고,

서지오가 가르쳐줄 것이 없다고 할 정도로 잘했다.

노래가 시작되고, 노래 중간쯤 넘어갈 때부터 민건이 표정이 굳어지기 시작한다.

심사위원이나 청중 평가단이나 티브이를 보고 있는 나도 느낄 만큼 더욱더 굳어져 갔다.


듣고 있던 모두가 박수를 치며 환호하고,

심사위원 중 한 분은 민건이가 서지오를 끝까지 배려하는 무대였다고 칭찬하는데,

민건이는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만다.

모두가 안타까워하며 위로를 해주지만 민건이의 울음은 그치지를 않았다.

그리고, 대기실에서 한 시간을 울었다고 한다.

상황을 보여주지 않았기에 왜 그랬는지 알 수가 없었기에 내가 판단할 수는 없었지만,

아주 많은 어른들이 있었음에도 12살짜리 민건이는 한 시간 동안이나 울었다는 것이 이해가 안 되었다.

민건이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을 것이고,

함께 있는 사람들도 위로와 함께 달래기 위해 많은 애를 썼다는 것도 충분히 짐작이 가능하다.

방송에서는 민건이가 큰 무대에서 8명이 겨루는 경연을 하다 보니 많은 부담감이 있었고,

본인이 연습한 대로 제대로 보여주지 못한 것이 속상해서 울었다고 했다.

민건이도 그렇게 말을 했고, 충분히 타당한 이유라고 여겨진다.


경연이라는 것이 승자와 패자가 있을 수밖에 없고,

누구나 열심히 노력하기에 자신이 아무리 노력해도 상대보다 더 잘하지 않으면 못한 것처럼 여겨지는 단점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송 입장에서는 흥행을 해야 하고, 흥행을 위해서는 승부를 가려야만 하기 때문에

그러한 방식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이해한다.

발표할 때도 시청자들에게 짜릿함을 주면 줄 수록 시청률이라는 보상이 커진다고 여기는지

온갖 방법을 동원해서 긴장감을 조성한다.

정작 경연에 참가한 당사자는 피가 마름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스릴을 즐긴다.

어느 정도의 긴장감은 경연만이 아니라 실생활에서도 있을 수밖에 없고, 때로는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이것을 인정하면서도 나는 너무 심하게 긴장감을 조성하여 출연자의 피를 말리는 프로그램은 좋아하지 않는다.

트로트의 민족은 다행히(?) 아주 적당한 긴장감만을 조성하는 것 같다.


그런데, 민건이는 펑펑 울었다. 왜 그랬을까?

민건이가 울고 있을 때 "왜 우느냐"라고 물어본 사람은 없었을 것이다. 의미 없는 질문이니까.

질문은 하지 않을지라도 왜 우는지에 대한 생각은 모두 했을 것이다.

그리고, 각자의 결론에 따라 민건이를 위로했을 것이고...

어떤 결론을 내렸었는지는 아무도 알 수 없으나,

방송에 나온 모습들을 보면 거의 공통된 생각을 했을 가능성이 높다.

민건이가 말하기도 한 것처럼 "너무 큰 부담감이 있었고, 연습한 대로 제대로 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도 처음에는 이에 동의했다.

한 시간 동안을 울었다는 말을 듣고,

민건이에게는 물어볼 수 없지만

 "왜 그랬을까?"라는 질문을 모두가 스스로에게 해봤어야 한다고 생각이 되었다.

왜 우는지를 정확히 알 수 있다면 제대로 된 위로를 할 수 있을 것이었기에,

아이가 한 시간 동안이나 울게 하지 않았을 것이기에.

물론, 어떻게 위로를 했더라도 상황은 바뀌지 않았을 수도 있겠지만,

울고 싶을 때는 펑펑 울어야 한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나지만,

그래도 그 많은 어른들 사이에서 아이가 한 시간을 울었다는 것을 듣고

"어른으로서의 역할을 다 했는가"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내가 그 자리에 있었더라도 민건이 본인이 아니기에, 설령 민건이의 마음을 100퍼센트 이해하고 위로했더라도

더 많은 시간을 울었을 수도 있다.

모든 것은 직접 보지 않고서는 모른다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제대로 된 위로를 하기 위한 훈련을 해야 한다고 다짐하고 있기에

내 나름대로 이유를 생각해보았다. 완전히 틀릴 수도 있지만...


노래를 시작할 때는 아주 표정이 밝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멋지게 부르고 멋지게 춤을 추었다.

그러다가 동작이 조금 틀렸다.

아무도 이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았지만, 민건이는 알고 있었다.

그 후로 표정이 굳어지고 춤도 유연성이 떨어지고 춤의 박자가 잘 맞지 않았다.

민건이는 서지오 씨를 배려할만한 여유가 없었다.

자신이 망쳐버렸다는 생각이 계속 들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실수했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마무리한 것을 두고 '배려했다'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민건이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말은 전혀 와 닿지 않는다.

딴지를 걸자는 것이 아니다.

민건이의 마음을 제대로 헤아려보자는 것이다.


산전수전 다 겪은 나라도 그 상황에서 민건이보다 더 나은 표정을 지을 자신이 없다.

이유는 자명하다.

혼자 한 게 아니다. 대선배이자 원곡 가수와 함께였다.

연습할 때부터 남다른 재능으로 서지오 씨를 깜짝 놀라게 하고 감동을 시켰던 민건이다.

엄마와 같은 대선배인 서지오 씨는 일부러 시간을 내고, 온 마음을 다해 함께 했다.

민건이는 그 사실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고 있다.

그런데, 자신이 망쳐버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실 누가 봐도 망친 게 아니다. 실수를 모를 만큼 아주 잘했다.)

어느 누가 울지 않겠는가?

얼마나 미안할 것이며, 얼마나 속상하고, 얼마나 마음이 아플 것인가.

"너무 잘했어"

"야 이거야 이거"

아무리 칭찬을 퍼부어도 민건이는 결코 마음이 편할 수가 없다.

제대로 실력 발휘를 못한 것에 대한 속상함도 있었겠지만,

결국 이 마음도 경연을 자신이 망쳐버렸다는 생각에 귀결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칭찬은 도움이 되질 않는다. 스스로가 잘못한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실수를 했는데도 칭찬을 한다면 이것은 부작용을 낳게 된다.

실수를 했을 때, 당연히 절대로 그에 대해 지적을 하거나 나무라서는 안되지만,

칭찬은 더욱더 안된다.

자칫, 실수를 정당화시킬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실수는 실수로 인정해주고 "또 실수할 수도 있지만, 안 하려고 노력하자"라고 말해주면 된다.


민건이는 실수를 했을 뿐이다.

작은 실수를 큰 잘못을 한 것으로 생각하고(그 상황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다) 울음이 터져버린 것이다.

대기실에서 어른들은 어떠한 위로의 말을 했을까?

꽤 많은 사람들이 한 마디씩 하기도 하고, 안아주기도 하고, 손도 잡아주었을 것이다.

함께 눈물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나름대로의 노력을 했을 것이고, 그 노력들은 칭찬받아 마땅하다.

"잘했는데 울지 마"

"너무 멋졌어"

"민건이 최고" 등등의 칭찬이 주를 이루었을 가능성이 높다.

민건이의 울음이 그칠 리가 없다.

오히려 더 터져 나올 수밖에 없다.

너무 열심히 해주시고, 너무 잘해주신 대선배에게 더 미안해질 수밖에 없다.

당연히 잘했어야 하는 것을 망쳐버린 자신이 속상할 수밖에 없다.

어떠한 말도 할 수가 없다.

민건이 자신도 왜 계속 눈물이 나오는 지를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어버린다.

그렇게 한 시간을 울었다.

개인 미션을 하러 나온 민건이의 눈은 퉁퉁 부어 있었고,

사회자는 "한 시간이나 울어서 눈이 퉁퉁 부었다"는 말을 해버린다.

겨우 추스르고 나온 12살밖에 안된 어린 민건이에게 말이다.

민건이는 다시 눈물을 보인다.

안타까워서 한 말인 줄은 안다. 나도 사실 때에 맞는 말 잘 못하는 편이다.

하지만, 이건 아니다 싶다. 굳이 건드릴 필요가 없었다.

마음 잡고 다시 경연을 해야 하는 어린 마음에 굳이...

어른의 역할을 잘못한 것이다.


나라면 어찌했을까?

그 상황에 있어보지 않았기에 솔직히 잘 모른다.

어젯밤부터 이 글을 쓰기 전까지 생각을 했다.

나라면,

이미 지나간 것에 대해 한 마디도 하지 않았을 것 같다.

누군가가 말하려 한다면 그 입을 막았을 것 같다.

그리고 민건이에게 말했을 것이다.

"민건아, 개인 미션에서 실력 발휘 제대로 해보자. 넌 충분히 할 수 있어. 아자아자 아자자"

이 말만 하고 민건이 눈 앞에서 사라졌을 것이다.

민건이가 울 때, 섣불리 과거를 들먹이며 위로하려 하지 말고,

잠깐만 위로해주고 그 앞에서 모두 떠나야 한다.

아이에게 자꾸 이런저런 말을 하는 것은 아이를 더 울리겠다는 것 밖에 안된다.

넘어진 아이도 자신을 보고 있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을 알면, 툴툴 털고 일어난다.

넘어져서 엄마가 보이는 순간 큰 소리로 운다.

12살. 어리다면 어리지만, 자신의 감정 정도는 어느 정도 조절할 수 있는 나이다.

특히 민건이는 더 어른스럽기에 충분히 가능하다고 본다.

스스로 추스르고, 스스로 일어설 시간을 주어야 한다. 건드리지 말고.


민건이가 우는 모습을 보면서 "저렇게까지 심적 부담이 있는 프로그램에 아이를 꼭 내보내야만 하는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다른 프로그램에서 아이들이 우는 모습을 보며 나도 같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아이들을 온실의 화초처럼 키우는 것은 오히려 더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그런 면에서 아이가 이겨낼 수 있다는 확신이 있다면 충분히 시도해보게 해야 한다.


개인 미션 도중 민건이는 자꾸 터져 나오려는 울음을 참고 끝까지 노래를 불렀다.

물론 음과 박자에 울음이 방해를 했지만.

심사위원은 노래를 끝낸 민건이에게 "이제 오늘로서 민건이는 프로가 되었다"라는 내용의 말을 했다.

눈물이 터져 나옴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잘 참고 끝까지 노래를 했기 때문에 프로의 길에 들어섰다고.

이에 적극 공감했다.

아주 적절한 위로요, 격려요, 칭찬이었다고 여겨진다.

노래가 끝난 후 인터뷰에서 민건이는 또 울면서 말했다.

"이것은 기쁨의 눈물이에요."


불과 몇 시간 동안, 여러 가지 감정의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마지막을 기쁨의 눈물로 장식했다.

눈물만이 만들 수 있는 작품들을 민건이는 어린 나이에 벌써 꽤 완성시켰다.

이렇게 민건이는 한 단계 성장했다.

5000명 중 8등.

실로 대단한 업적이다.

이 업적과 이번에 흘린 눈물은 민건이의 인생에 엄청난 나비효과를 일으킬 것이다.

(사진 ㅡMBC  트로트의 민족 캡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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