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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우신조?

말이라고 다 말이 아니고 글이라고 다 글이 아니다

by 공작세

누군가와 말을 할 때는 아무리 좋은 말이라 할지라도 '과연 이 상황에서 적절한 말인가?'를 생각해봐야 하며

누군가가 보는 글을 쓸 때는, 특히 대중들이 보는 글을 쓰는 경우에는 더욱더 '과연 이 상황에서 적절한 글인가?'를 생각해봐야만 한다.


말과 글은 한쪽을 높이려다 보면 본의 아니게 반대쪽을 낮춰버리는 잘못을 범할 수가 있다.

어느 한쪽에 대해 좋은 말을 하다 보면 다른 이에게는 상처를 줄 수 있다.

이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어른은 없을 터인데,

글을 읽거나 대화를 하다 보면 이러한 경우를 너무 많이 본다.


어제 광주에서 철거 중이던 5층 건물이 무너지며 버스를 덮쳐 17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도대체 철거를 어떻게 했길래'

'누가 책임질 거야'

이러한 말들은 현재로서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저 불의의 사고로 명을 달리 한 사람들과 그들의 가족의 마음을 살피는 것에 모두 주력해야 할 때이다.

사고 원인 규명 등은 관계기관에서 철저히 진행할 것이기에,

언론들도 이러한 사고가 있을 때에는 유가족들에 대한 예의를 갖추어야만 한다.

사건 사고가 있을 때마다 느낀 것이지만,

우리나라의 언론들이 싫다.(국민들의 편에 서서 최선을 다하고 있는 일부 언론인들에게는 죄송합니다.)


대문 사진은 오늘 올라온 보도 내용이다.

'통근버스에 9명 탑승. 천우신조로 화 면해'

그분들께는 참 다행이다.

하지만, 지금 이 시점에 이러한 보도를 이러한 식으로 해야 하나?

'천우신조'라니.

그러면 무너지는 건물에 깔린 분들은 하늘이 버린 사람들이라는 말인가?

뭐 이따위 기사가, 이런 기자가 있나 싶다.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러한 단어를 함부로 사용하는지 묻고 싶다.

굳이 구사일생 한 사람들에 대한 기사를 쓰고 싶다면, (사실 이러한 기사도 어느 정도 시일이 지난 후에 하는 게 예의다)

'통근버스에 9명 탑승. 가까스로 화 면해'라고 쓰면 될 일이다.


잘못된 한 단어가 사람을 죽이는 무기가 될 수도 있다.

기자라면 누구보다도 단어 선택에 주의를 기울여야만 한다.

어른이라면 아이보다는 단어 선택을 더 잘해야만 한다.


모든 종교가 신에게 온갖 소원을 빈다.

나는 이러한 행위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다.

'신은 인간사에 결코 개입하지 않는다'라고 확신한다.

니체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한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신에게 의지 하지 말라는 것,

세상의 모든 문제는 인간 스스로, 혹은 인간들에 의해 발생하고

그 문제에 대한 해결 또한 인간이 해야 한다.


스스로 할 수 없다고 여기기에, 혹은 어딘가 기댈 곳이 필요해서 신을 찾고 신에게 소원을 빈다.

하지만, 이것은 자신에 대한 위로, 혹은 자신에게 부여한 일종의 희망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신은 결코 인간의 일에 개입을 하지 않으니까.


세상이 엉망이 되어도, 아무 죄 없는 사람들이 고통 속에서 죽어가도, 세상 곳곳에서 지금도 수많은 사람이 핍박을 받고 있고, 소아암 병동에서 왜 자기가 아파야 하는지도 모른 체 아이들이 병마와 싸우고 있음에도,

정인이가 양부모로부터 학대를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신은 아무것도 해주지 않으니까 사람들은 신 존재 자체를 부정한다.

신이 있다면 그럴 리가 없다는 것이다.


솔직히 신이 있는지 없는지는 나는 모른다.

이것은 각자의 믿음의 문제이므로 누가 옳고 그르다는 판단은 나의 영역이 아니다.

굳이 내 입장을 말하자면,

'신은 존재한다. 하지만 인간사에 결코 개입하지 않는다'이다.

인간사에 개입하지 않음으로 인해 자신의 존재가 소멸되어버릴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개입하지 않는다.


이 말이 뜬금없는 소리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신이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명확히 알아야만 사람은 각자의 역할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다고 여기기에 감히 도발을 감행한다.


어떤 목사님께서 예배 시간에 간증이랍시고 이러한 말을 했다.

"아이를 갖게 해달라고 눈물로 열심히 기도를 드렸더니 하나님께서 저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드디어 아이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이 말에 거의 대부분의 성도들은 '아멘'하며 하나님께 감사했다.

아이를 가지지 못하다가 드디어 아이를 갖게 된 것은 누구라도 온 마음을 다해 축하해야 할 일이다.

이 말을 그냥 그러려니 하고 들어도 되지 않느냐고 나에게 핀잔을 주는 사람도 있겠지만,

이 목사님은 큰 실언을 한 것이다.

눈물이 아니라 피 눈물로 기도를 하고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중에 과연 몇이나 문제가 해결되는가?

해결되지 않는 사람이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다.

도대체 이 목사님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예뻐하셨기에 이 목사님의 기도만 들어주신 것인가?

도대체 내가 알고 지내던 분은 하나님께서 얼마나 미워하셨기에 교회의 모든 사람들과 부모가 그토록 열심히 기도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어린 나이에 암이라는 병에 의해 목숨을 잃어야 했다는 말인가?

저런 간증은 자신을 자랑하는 말이요 다른 사람을 힘 빠지게 하는 말이다.

물론 '나도 더 열심히 기도해야겠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이것을 노린 것이라면 그 목사님은 이러한 사람에 대해서는 소기의 목적을 달성한 것이겠지.

하지만, 이러한 결론에 도달하게 한 것은 결국 목사님이 하나님을 죽인 것이다.

언젠가 이 사람은 '신은 죽었다'라고 말할 테니.


어떤 사고가 일어났을 때, 그 사고를 일으킨 것도 해결하는 것도 인간이 해야만 한다.

위로도 인간이 해야만 한다.

목표하는 것을 이루기 위한 것도 인간이 해야만 한다.

인간으로서 도저히 할 수 없는 것은 그저 최선을 다하는 것으로 만족해야만 한다.

인간이 할 수 없는 것은 신도 할 수 없다.

만약 인간으로서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생각하고 열심히 기도하면서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더니, 가능하게 되었다면, 이것은 신이 한 것이 아니라 인간이 한 것이다.

가능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판단으로 불가능할 거라고 예단한 것일 뿐이다.


"6개월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의사는 무거운 표정으로 시한부 선고를 한다.

"아니 이런... 오늘부터 일천번제를 드려야겠다. 그러면 더 살게 해 주실 거야"

환자는 더 이상 붙잡을 것이 없기에 하나님께 매달리기로 한다.


2년 후. 예배시간.

"저는 2년 전에 6개월밖에 살지 못한다고 했지만, 지금 이렇게 살아있고 병도 다 나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불가능을 가능으로 바꾸셨습니다."

거기에 모인 모든 사람들은 '할렐루야, 아멘'을 외치며 하나님을 찬양한다.

"믿고 정성으로 기도하면 이루어진다. 우리는 이러한 능력의 하나님을 믿고 있다"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것은 의사의 오판이다.

의사가 어찌 인간의 수명을 알 수 있겠는가?

의사도 자신이 가진 지식 안에서만 판단할 수 있다.

그 판단이, 혹은 그 지식이 온전하게 옳다고 할 수 없다.

그저 통계라는 것에 의지 하여 시한부 선고를 한 것뿐이다.

나는 시한부 선고에 반대한다. 그 시한을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통계는 나에게 해당되면 백 퍼센트요 해당되지 않으면 영 퍼센트가 되어버리는 것이다.

다른 것에는 몰라도 수명에 대해서는 통계를 들이대어 속단하면 안 된다.

의사의 잘못된 판단에 근거하게 되니

'기도발'이 라는 말이 먹히게 되는 것이다.


'천우신조'

없다.

모든 사고가 인재다.

자연재해도 인재일 수 있다.

인재가 아닌 자연재해는 우리가 인재인 줄 모르고 있거나 그냥 지구 상에 일어나는 하나의 현상일 뿐이다.

우리는 불안정한 지구에 살고 있을 뿐이다.


인도네시아에 쓰나미가 일어났을 때 어떤 몰지각한 어떤 대형교회 목사가 한 설교가 떠오른다

"예수를 믿지 않기 때문에 일어난 재앙이다. 하나님께서 심판하신 것이다"

이런 미친...

만약 하나님께서 개입하시게 된다면 이 목사부터 심판하시리라 믿는다.


# 이번 참사에 희생되신 분들과 유가족들께 마음으로나마 위로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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