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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시작하면서..

기말감사시즌을 마무리하면서 회계개혁에 대해 생각하다.

회계업계로 돌아온 지 3년. 다시 시작한다는 말이 좀 어색하지만, 형식적으로는 돌아왔으나 머리에 남은 것은 거의 없어서, 시험에 겨우 합격하고 회계법인에 들어온 뉴스텝이나 다름없었으니, 나 스스로를 ‘늦깎이 공인회계사 겸 세무사’로 칭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나마, 진짜 시험을 다시 보지 않고 돌아오게 된 것에 감사할 따름이다.)


요즘 세간에선 MZ세대들의 전문자격증 취득 붐에 힘입어, 공인회계사시험이 무척 인기란다. 감사보수가 많이 오르고, 덩달아 연봉수준도 많이 오르면서, 공인회계사의 인기가 상한가를 기록 중이라는 것이다. 공인회계사 전성시대! 그 틈을 타서 나도 이렇게 직장생활을 시작했던 지점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으니, 이것 또한 감사하지 않을 수가 없다.


공인회계사의 본업인 회계감사를 하며 기말감사시즌을 보낸 것이 이제 세 번. 정신없이 보내다 정신을 차려보니 4월. 이번 시즌도 대부분의 상장사 주총과 함께 기말감사시즌이 마무리되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매년 회계감사의 업무강도는 자꾸 높아져가는 느낌이다. 특히 상장회사 회계감사는 매년 해야 할 일이 늘어만 간다. 왜 이렇지?


사실 이런 상황의 시작은 몇 년 전 대우조선해양 회계스캔들의 영향으로 감사인 주기적 지정제, 표준감사시간, 내부회계관리제도감사제도의 도입 등이 포함된 주식회사의 외부감사에 관한 법률(외감법) 개정안이 2017년 국회를 통과하면서부터라 할 수 있다. 이른바, 회계개혁. 내용은 복잡하지만, 그냥 간단히 말하면, 독립적 외부감사인으로서 충분한 시간을 투입하여 제대로 감사를 하라는 것이다. 


그 동안 현실상황(이를 테면, 낮은 감사보수와 이에 기인한 짧은 감사일정)이나 이른바 전문가적판단에 따라 생략했던 여러 절차들 중 건너뛰어선 안 될 감사절차들을 수행하라는 것이었고, 이렇게 해야 할 일이 늘어났으니, 투입되는 시간도 그 이전보다 1.5배~2배 늘어났다. 물론, 감사보수도 그만큼 늘어났다. 


감사를 받는 회사들의 반응은? 당연하지만, 불만이 하늘을 찌르고, 입은 나올 대로 나와 있다고나 할까. 외부감사라는 것을 애당초 ‘돈 주고 매맞는’ 일 정도로 여기던 회사라면 더더욱 그럴 수밖에 없다. 기업부담가중과 회계개혁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하며 폐지 내지 완화주장이 끊이지 않는다.


현장에서 부쩍 늘어난 회사들의 부담에 동감하면서도, 회계감사 업무를 직접하고 있는 ‘늦깎이 공인회계사’로서 이제야 좀 제대로 감사를 하게 되나 싶었던 터에 우려스러운 마음도 적지 않다. 처음 회계사가 되고 나서 회계감사를 하다가, ‘이 일은 하면 안되겠구나’하고 떠났던 기억이 되살아난달까. 아직 갈 길이 먼데 말이다.


예전에 비해 회계개혁 이후 가장 중요하게 바뀐 것은 각 감사업무 당 투입하는 시간이 많이 늘어났다는 점이다. 이것이 중요한 이유는 간단하다. 충분한 감사시간은 곧 회계감사기준에서 요구하는 감사절차를 수행할 수 있는 여유를 뜻하기 때문이다. 결국 외부감사인으로서 나의 목표이자 의무는 감사기준에 따라 감사절차를 계획하고, 감사증거를 수집하여 전문가적 판단에 따라, 회사의 재무제표에 전체적으로 부정이나 오류로 인한 중요한 왜곡표시가 없는지 합리적인 확신을 얻어 감사의견을 표명하는 것이다.


여기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전문가적 판단’이라는 용어다. 간혹 잘 모르는 사람들은 회계사시험에 합격하고 자격증이 나오면 전문가가 되고, 전문가적 판단이 자동으로 척척 이뤄지는 것인 양 착각을 한다. 


전혀 그리고 절대 그렇지 않다. 심지어 오랜 경험이 쌓인다고 해서, 저절로 전문가적 판단이 되고, 재무제표만 보기만해도 감사의견이 형성되는 것도 아니다. 뉴스텝보다야 낫겠지만, 여전히 회사와 산업에 대한 이해, 위험에 대한 평가, 이에 대응한 충분한 감사 증거 수집이 있은 후에야 비로소 전문가적 판단이 발휘되고, 제대로 된 감사의견도 표명될 수 있는 것이다.


‘전문가적 판단’이란 이런 것이다. 전문지식 뿐만 아니라 현 상황에 대한 충분한 증거와 데이터가 있을 때나 가능한 그런 영역이란 말이다. 시간에 부족해서 취해야 할 절차를 수행하지 못하고, 충분한 감사증거를 확보하지 못한다면? 전문가적 판단은 없다. 따라서, 감사의견은 형성될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충분한 감사증거 수집을 위한 감사투입시간의 확보는 감사인에겐 너무나 중요하다.


지난 시즌 나는 충분한 감사증거를 확보하고, 이를 기초로 전문가적 판단에 따라 감사의견을 형성한 후 감사보고서를 발행했을까? 솔직히 감사시간이 늘어나긴 했어도 허용된 시간은 여전히 아쉬웠고, 취하지 못한 절차도 적지 않았다.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아직 갈 길이 멀다. 


회계개혁으로 인해 기업의 부담만 과중되었고, 그 성과는 불투명하다는 회사의 주장보다는 시장이 회계감사 결과를 신뢰한다는 신호를 확인할 때까지, 노력은 지속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를 진심으로 바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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