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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TJ부부의 결혼 25주년기념 스페인 자유여행기_01

I. 여행할 결심

무너지지 않기 위해 여행을 결심하다


몇 년 전부터 아내와 이야기했었다. 결혼 25주년이 되는 해에는 멀리 좀 떠나보자고. 25년. 오랜 세월이다. 함께 하면서 겪었던 많은 일들을 뒤로하고, 앞으로 다가올 나날들을 맞이하면서 조금은 더 특별한 시간을 가져보자. 


돌이켜보면, 항상 즐겁고 행복하지만은 않았지만 25년이나 함께 살아왔고 조만간 ‘헤어질 결심’을 할 것 같진 않다. 세부적인 삔뜨는 잘 안맞았지만 그래도 엇비슷한 성격과 성향을 가진 덕분에, ‘도저히 이 사람과는 살 수가 없다.’ 보다는 편안한 기분을 느낄 때가 더 많았던 지난 시간이었다. 자축하고 서로 위로할 만한 25년이다.


간간이 이야기했던 예정대로라면 결혼기념일인 5월 16일에 맞춰서 저 멀리 어디론가로 떠나야 했다. 그러나, 언제나 그렇듯이 참 마음대로 잘 안된다. 구정을 기점으로 80세에 접어드신 어머니께서 많이 편찮으셨다. 정확히 구정날 구급차에 실려 병원행, 수술, 심정지 후 소생, 중환자실, 퇴원, 다시 입원, 퇴원, 응급실, 퇴원, 수술, 입원, 퇴원, 외래, 다시 응급실. 그냥 반복… 1월 하순에 시작된 이 고난의 루프가 끊임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상태가 나아졌나 싶어도 불안감은 계속되었다. 당연히 여행도 예약하려다 미루고, 상황이 좋아졌나 싶어 다시 알아보다 포기하고를 반복하고 있었다.


9월 초 다시 응급실에 다녀오던 날이었다. 가장 길게 응급실에 갇혀 있었던(?) 기록이 20시간이었고 대략 12~14시간은 꼼짝없이 응급실에 머물게 되는 데, 이 날은 6시간 만에 퇴실이었다. 그래서였는지, 보통 힘들어서 아무 생각도 안 나는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역시 은혼식 기념 여행은 못 가는 거지? 편찮은 분을 두고 어떻게 가냐? 그런데, 내년은 갈 수 있을까? 내후년은? 30주년을 기약해야 하나? 그 전에 우리가 헤어지진 않겠지?’ 


헛웃음, 아니 쓴웃음이 나왔다. 다음 순간, 편찮은 어머니 때문에 여행을 못 가서 아쉬운 마음보다 이렇게 못 가게 된 것에 대해 어머니를 원망하게 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확 밀려왔다. 고통과 희생, 힘든 기억만으로 간병생활을 채우고 싶지 않았다.


‘그래. 마냥 미루는 거, 이건 아니야. 떠나야겠어. 그것도 멀리 다녀와야 해.’


망설이는 아내를 설득하고 결심을 공유했다. 간병인을 구하고, 부산에 있는 동생에게도 무리하게 도움을 청했다. 어머니께도 말씀드렸다.


사실 우린 떠나야 했다. 결혼 25주년을 기념하는 목적도 있었지만, 간병생활이 채 1년도 되지 않았음에도 거의 소진되어 버린 몸과 마음의 기력을 보충할 브레이크 타임이 필요했다.



언제, 어디로, 어떻게?


“이렇게 떠나도 계속 마음 한 편은 부담으로 가득 차 있을 텐데. 여행이 제대로 될까? 또 여행 중에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어떡하지?” 


일리 있는 아내의 지적이었다. 그래서, 다가온 추석연휴로 일정을 잡았다. 그나마 상황이 괜찮은 지금 어서 다녀오자는 생각이었다. 남들은 다음 해 달력을 체크하며 1년 전에 예약 잡기를 한다는 데, 우린 이제사 예약이라니. 엄청난 비용이 예상되었지만, 그래도 감당하기로 했다. 가야 한다면 지금이다. 


어디로 갈까? 오라는 데는 없어도 항상 갈 곳, 가고 싶은 곳은 많다. 하지만, 이번엔 쉽다. 스페인. 둘째가 교환학생으로 가 있는 스페인으로 가자. 멀리 가고 싶은 우리의 바람과도 부합한다. (그렇다. 우린 break time 뿐 아니라 break away가 필요하다) 스페인어도 잘 못하면서 어떻게 교환학생을 가느냐고 핀잔을 한 지 얼마 지나지도 않았는데, 둘째가 일본이나 중국으로 교환학생을 가지 않은 게 너무 고마웠다. 이곳저곳 고민하지 않게 해 준 것만으로도. 게다가 꽃보다 할배의 그 ‘스페인’ 아닌가! 


자, 이젠 어떤 식으로 갈지를 정할 차례다. 이것 또한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별 고민하지 않고, 자유여행을 도전하기로 했다. 여행사의 패키지상품도 좋지만 우리에겐 ‘자유’로운 시간이 더 필요하고 중요했다. 물론, 챙길 것들이 많아, 알아보고, 계획하고 예약을 하며 상당 부분 후회도 했지만, 결과적으로 큰 후회는 없다. 나중에 더 이야기하겠지만, 여행책, 블로그, 유튜브 등등 유용한 정보는 엄청나게 많았고, 너무 많은 정보의 홍수가 혼란스러울 정도였다. 또한, 자유여행을 위한 여러 인프라도 예전보다 엄청나게 좋아졌다. 충분히 도전할 만했다. ‘자유’를 위해 감내가능한 적정한 대가라고 할까나.


어쨌거나 이런 것들 모두가 여행의 매력 아니겠나? 우리가 수집한 정보를 정리하며 생각했다. 이번 여행을 사진 몇 장과 시간이 가면 희미해질 추억만으로 흘려보내지 말고, 하나에서 열까지, 여행을 가자는 결심에서부터 집에 돌아와 짐을 풀고, 여행 사진을 정리해서 앨범으로 만드는 그 시점까지를 꼼꼼하게 정리해 보자. 어렵게 결심한 이 소중한 시간과 경험을 적어도 우리가 함께 하는 한 생생하게 기억할 수 있는 기록을 남겨 우리 자신에게 선물해 보자. 



ISTJ에게 자유여행이란…


MBTI가 참 유행이다. 옛날에 입사하고 연수받았을 때, 미국 교환근무 시절 팀웍 트레이닝 받았을 때 이 테스트를 했었다. 나의 유형은 ISTJ였고, 다른 유형을 받은 동료들의 특징과 더불어 이런저런 코칭을 받았던 기억이 있다. 그런데, 내가 그때 들었던 바로는, 이 MBTI유형은 잘 바뀌지 않는 성격(인격?)하고는 좀 거리가 있고, 상황에 따라 가변적일 수 있다. 많은 통계가 쌓여 사람들의 행동양식 등을 설명하는 데 상당히 유용하긴 하나, 맹신할 척도나 지표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지 뭐든 MBTI유형을 기준으로 분류하고 해석하는 느낌이 든다. 비타민이나 영양보조제를 만병통치약인 양 너무 오남용 하는 느낌이랄까. 이런 현상을 분석하고 비판하고자 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그냥 MBTI유형을 이용해서 이야기하는 것이 젊은 세대, 우리 아이들과 의사소통 하는데 도움이 된다. 마치 요즘 젊은 세대의 이해 안 되는 행동을 보면 ‘역시 MZ는 달라’하고 치부해 버리는 것처럼, ‘얘는 왜 이렇게 생각(또는 행동)하지? 역시 ENFP는 달라.’하고 마는 것이 서로에게 편하다. 완전한 이해보다는 약간 불완전한 오해와 받아들임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지혜 아닐까?


우리 부부는 스스로 골수 ISTJ라고 규정한다. 일반적으로 거론되는 ISTJ의 특성 중 ‘맞아, 이건 우리야’라고 꼽는 항목들은 이렇다.


• 안정적인 방향을 선호하며, 혼자서도 일을 잘하는 편이다.

• 예고 없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매우 싫어한다.

• 정리정돈에 집착을 하는 경향이 있다.

• 원리, 원칙적이며 약속을 잘 지킨다.

• 집돌이, 집순이인 경우가 많아서, 휴일에도 집에서 주로 지낸다.

• 본인 얘기를 잘 안 하는 편이라, 남들이 속을 모른다고 말한다.

• 겉보기에 차가워 보인다.

• 기본이 없는 인간을 특히나 싫어한다. 약속을 어기거나 무책임한 인간 등


특히, 집돌이, 집순이로서 정리에 집착하고, 안정적인 방향을 선호하며, 예고 없이 갑작스러운 변화를 매우 싫어한다는 점에 완전 공감한다. 솔직히 이런 특성이라면 여행사 패키지를 선택하는 것이 매우 적절하다. 그럼에도 자유여행. 자유여행의 특징 내지 본질이 바로 불안정성과 예고 없는 변화일 텐데,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도전하는 셈이다.


“뭐 항공권 하고 호텔만 예약되었으면, 준비 끝 아냐? 그다음엔 카드하고 여권만 들고 가면 되는 거지!”라고 생각하거나 말하는 것은 우리 둘과는 거리가 있다. 아주 먼 거리가. 꼼꼼하게 챙기고, 뭔가 구체적으로 계획되어 확실하게 준비되지 않으면 불안하며, 계획대로 실행되지 않으면 당황하고 좌절감에 휩싸일 것이 뻔한 ISTJ 둘이서, 어디까지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사랑스럽고 행복한 기억만 남기고 이번 여행을 마무리할 수 있을까?


이런! 이렇게 말하는 순간 이미 이번 여행은 하나의 숙제가 되는 거다.


나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그렇다 해도 여행이, 더군다나 결혼 25주년 기념을 하고 싶은 뜻깊은 여행이 하나의 과제나 숙제가 되어 버리는 건 바람직하지 않다. 우리에게 여행은 축제여야 한다. 스케줄이 어긋나고, 길을 잃어 헤매는 일이 일어나도, 쇼핑을 하다 바가지를 쓰고, 잘 모르고 들어간 레스토랑에서 형편없는 식사를 하더라도, 이 모든 것이 설렘과 흥분 그리고 기쁨을 주는 축제가 되길 바란다. 아니, 그렇게 만들어야지. 


숙제나 과제를 완수하듯 하지 말고, 축제를 즐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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