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재천, 숙론
대학에서 최재천 교수님의 ‘인간 본성의 과학적 이해’라는 특이한 제목의 수업을 들었었는데, 수업을 들으며 다시 이과로 가고 싶을 만큼 흥미진진했었다.
최근 나온 <최재천, 숙론>에서 교수님이 무려 9년을 기다려 본인 수업에 관련한 모든 책임을 홀로 감당할 수 있게 된 2003년에야 이 수업을 개설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미국식 토론 수업을 만들어내는 과정도 어려웠지만 대학 본부 수업과에서 과목명이 너무 길다며 줄여야 한다고 해서, 그 고집을 관철하는 과정 또한 쉽지 않았다고 한다.
하고 싶은 일은 한다는 것의 다른 말은 책임을 감당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본인 수업에 관해 풀 오너십을 가졌을 법한 교수님이 본인의 프로젝트를 추진하는 것도 이렇게 어렵다는 점을 보면, 모든 조직의 어려움이 왜 생기는지, 그리고 어떻게 뚫고 나가야 하는지도 깨닫게 된다.
자신의 역할과 의무를 충실히 하는 대학 본부 수업과로 인해 혁신적인 교수의 수업의 탄생이 방해받는 사례는 ‘안된다. 규정과 다르다. 절차에 없다’라는 매우 흔한 레퍼토리이기에, 그걸 깰 수 있는 계획과 전략이 필요하다. 가장 쉽게 사용할 수 있는 전략은 상대보다 윗사람을 등에 업고 이야기하는 것인데, 이건 상대의 진심과 지지로부터는 멀어지는 길이 된다.
더 나은 방향은 대의명분 혹은 조직이 추구하는 바가 이런데, “우리 같이 이렇게 해야 하지 않을까요”이다. 여기서도 부족한 것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먼저 듣고 알려는 과정을 충분하게 거치지 않는 것이다. 올더스 헉슬리는 1945년에 출간한 <영원의 철학>에서 “우리는 우리가 아는 것만 사랑할 수 있다”라고 단언하며, 사랑을 지식의 한 유형으로 규정했다. 그렇다면 어떤 일이 여러 레버를 움직여야 하는 일이라면, 상대방과 접촉하는 것, 입장을 아는 것, 이해하고 애정을 갖는 것은 원하는 것을 달성하기 위한 시작점일 것이다.
이 책을 가장 건네고 싶은 사람들은 국회의원 300명이라고 쓰셨다. 국회는 여야를 막론하고 지극히 단순하게 국민의 안전과 행복을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이고 그 목적에만 충실해야 한다. 조직도 마찬가지다. 여러 팀, 여러 분야로 기능적인 전문성으로 나누어져 있더라도, 이러한 숙론과 합의의 과정을 통해 신뢰를 단단하게 구축한다면, 보다 세련되고 뿌듯하게 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