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것도 아닌 일로 힘들어하지 말라는 몰상식한 말을 흘려보내고, 이 시기를 마무리하며 마주친 <긴긴밤>은 올해 읽은 많은 한국 소설 중 별 다섯 개를 준 단 한 권의 책이다.
코뿔소인 노든은 코끼리 고아원에서 평생을 사는 삶 대신, 밖으로 나가는 삶을 선택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노든을 아끼는 코끼리 할머니는 밖으로 나가고 싶어 하는 노든의 욕구를 잘 알고 있었고, 다른 코끼리들이 인간이 정해준 방향이 아닌 스스로의 방향을 선택했듯이 노든 역시 자신의 욕구가 향하는 방향을 스스로 선택한다.
그렇게 마주한 삶에서 노든에게 닥쳐온 시련과, 분노와 복수를 다짐하던 순간들에도 불구하고, 노든을 앞으로 나아가게 한 것은 복수가 아니었다. 펭귄인 ‘나’와 아버지들, 그리고 그들이 들려준 바다에 대한 이야기였다.
코뿔소인 노든은 자신과는 아무 관련 없는, 그러나 ‘나’에게 의미가 있는 바다라는 종착지를 통해 비로소 복수를 희망으로 바꾸는 삶으로 한 발짝 나아간다.
내가 바다에 가게 되면 노든이 나를 알아보지 못할까 걱정하는 내게, 이름이 필요하지 않을까 고민하는 내게, 노든은 이렇게 말한다.
“코뿔소가 키운 펭귄인데, 내가 너를 찾아내지 못할 리가 없지. 이름이 없어도 네 냄새와 말투, 걸음걸이만으로도 너를 충분히 알 수 있으니까 걱정 마.”
노든과 ‘나’의 여정을 돌이켜보면, 모든 것이 기적이었다. ’나’는 시간이 흐른 뒤에야 알게 된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른 우리가 서로밖에 없다는 것이 얼마나 대단한 일인지.
26년 봄이 오기 전 맞이한 이별을 비로소 떠나보낸다. 아직 찬바람이 세차게 불어오는 겨울의 끝자락에서, 나는 최소한 나 스스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사실을 설명했고 진심을 전달했다.
그리고 오늘 찬란하게 활짝 핀 꽃길을 걸었다. 다시 걸으면서 나는 <긴긴밤>의 ‘나’처럼, 아직 오지 않은 올해의 봄에 다시 가슴이 설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