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심으로 얼큰한 감자탕을 양껏 먹었다. 커피까지 내려 마시고 포만감에 취해 있는데, 설거지하던 아내가 저녁은 수제비라고 통보한다. “갑자기 웬 수제비?” 하니 감자탕 국물이 많이 남아서란다. 오랜 시간 정성스레 우려낸 감자탕으로부터 본전을 뽑겠다는 의지의 내세움인 동시에 반죽 밀 준비를 하라는 명령이다. 순간 ‘며칠 전 먹었던 수제비를 또?’ 하는 말을 내뱉으려다 다행히 삼켰다. 대신, 얼큰 칼국수에 대한 갈망이 불쑥 고개를 내민다.
나는 조심스럽게 “칼국수는 번거롭겠지?” 했다. 아내가 ‘이 남자가 무슨 꿍꿍인가’ 싶은 표정으로 잰다.
“아니……, 갑자기 프랑스 시절 해 먹던 칼국수 생각이 나서……”
프랑스라는 말에 아내 눈이 반짝인다. 아내는 이내 “번거로울 게 뭐가 있겠어” 하며 동의한다.
삼십 년 전, 프랑스 한 시골 도시에서 유학 생활을 시작하던 때다. 면 음식을 좋아하는 우리는 출국하며 챙겨온 라면으로 그 고픔을 채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라면도 동이 났다. 아시안 가게나 대형 식료품점을 샅샅이 뒤졌지만 한국 물품을 취급하는 가게는 없었다. 다행히 일본 라면은 구할 수 있어 그것으로나마 욕구를 달래야 했다.
어느 날, 아내가 더는 참기 어려웠던지 “밀가루 사 와서 칼국수 해 먹자”고 재촉했다. 내가 “칼국수 요리를 할 줄 알아?” 하니 어렸을 때 시골에서 엄마가 하는 걸 봤다며 “그대로 하면 되지 않을까?” 했다. 영 믿음이 가지 않았지만 나도 면 고픔에 시달리고 있기는 마찬가지인지라 의기투합할 수밖에 없었다.
아직 살림에 서툰 20대 아내는 밀가루에 조금씩 물을 부어가며 한참을 치댄 끝에 용케도 칼국수 반죽(?) 비슷한 걸 만들어냈다. 그러고는 양푼에 넣고 천으로 덮었다. 내가 “반죽을 숙성시켜야 하나 보네” 했더니 아내는 “기억에 엄마가 이렇게 몇 시간 두었다가 미는 걸 봤어.” 했다.
ⓒ 정승주
식사 때가 되었다. 아내가 반죽을 밀어달라 했다. 그런데 너무 묽었다. 밀가루를 묻혀가며 밀었다. 문제는 다음이었다. 얇게 민 반죽을 접어 칼로 썰던 아내는 당혹스러워했다. 썰고 난 면 가닥들이 서로 붙어버린 것이다. 어쩔 수 없이 아내는 밀가루를 연신 묻혀가며 가닥들을 하나하나 떼어내 큰 쟁반에 군대 열병식 하듯 줄지어 세웠다. 번거로운 일은 인내심이 바닥날 즈음 끝났다.
드디어 미리 준비한 멸치다시물에 면을 넣고 끓이니 우리 부부의 첫 공동 칼국수 작품이 완성됐다. 아내와 나는 첫 젓가락을 입에 넣고 동시에 감탄사를 외쳤다. 일본 라면과는 ‘비교 불가’였다.
후로 더는 면 가닥 열병식 작업을 하지 않아도 되었다. 요리 횟수에 비례해 솜씨는 늘었고, 우리의 공동 칼국수는 그렇게 프랑스 시절의 최애(最愛) 간편식이 되었다.
저녁때가 되자 아내가 반죽을 밀어달라 했다. 나는 수제비 반죽 미는 솜씨에 더해 정성까지 넣어 밀었다. 면 가닥 제조는 이제 아내 몫이다.
첫 면 반죽을 썰 때 가닥이 붙었다. 내가 “가닥 열병식을 해야 해?”하니 아내는 “그 정도는 아니고, 밀 때 밀가루를 조금 묻혀 밀어달라” 했다. 눈 깜짝하는 사이에 칼국수 면이 접시 한가득 준비됐다.
우리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얼큰 칼국수 한 젓가락을 입에 넣었다.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와우! 괜찮네!”를 합창했다. 한껏 상기된 아내는 “귀국한 후로 우리가 왜 한 번도 해 먹지 않았을까……”라며 아쉬워했다. 아내와 내가 추억을 맛보고 있는 사이, 프랑스 시절 끝 무렵에 태어난 식탁 건너편 막내는 아는지 모르는지 무심하게 칼국수를 먹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