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날이 장날

by 서옹

내가 은퇴한 후로 우리 부부의 나들이는 대개 한나절을 넘기지 않는다. 멀리 행차해 봐야 기껏 일산 집에서 전철 타고 서울 구경 가는 정도다. 밖에서 자고 돌아온 적이 언제였나 싶다. 그랬던 우리 부부가 말로만 듣던 ‘호캉스’라는 걸 하게 됐다.


더위가 절정으로 치닫던 7월 마지막 주 어느 오후, 우리는 1박 2일 일정으로 집을 나섰다. 목적지가 차로 한 시간이 채 걸리지 않는 용유도라 단출한 짐처럼 마음도 가벼웠다. 에어컨을 켜고 음악도 틀고 한없이 느긋하게 운전대를 잡았다. 자동차전용도로에 들어서서 속도를 내니 세상에! 아내가 콧노래를 다 불렀다.


인천공항고속도로에 접어들고 십 분쯤 지났을까. 가속페달을 밟아도 속도가 나지 않는 느낌이 왔다. 곧이어 시원하던 에어컨 바람이 뜨거워졌다. 이내 차 안은 찜통으로 변했고, 아내와 나는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15년 된 차에 문제가 생긴 게 틀림없었다.


당황해서 어찌할 줄 몰라 하는데 다행히 휴게소 표지판이 보였다. 천천히 진입해 차를 주차장에 세웠다. 본네트를 열었다. 부동액이 들어있어야 할 냉각수 통이 비어 있는 게 한눈에 들어왔다. 더 이상 운행하면 안 될 것 같았다.


불안과 걱정 많은 기질이 작동해 머리가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차가 견인되면 택시를 불러 호텔에 가야 하나? 오늘 내로 수리가 안 되면 호텔에서 집까진 택시를 불러? 아니면 호텔 예약을 취소해야 하나? 호텔 근처 근사한 뷔페식당에 저녁 식사 예약한 건 또 어떻게 하지? 혼돈에 빠진 뇌만 붙잡고 연신 혼잣말로 ‘어떡하지?’를 연발하니 아내가 아무렇지 않은 일인 양 ‘어떡하긴, 보험사에 전화하면 되지’ 했다.


차 옆에서 고장 난 로봇처럼 시키는 대로 전화하려는데 아내가 시원한 휴게소에 들어가서 하자며 팔을 잡아끌었다. 휴게소 의자에 앉아 숨을 고른 뒤 보험사 긴급 콜에 전화했다. 상담원에게 상황을 설명하니 견인차를 보내겠단다. 아내도 여파가 있는지 뷔페식당에 갈 마음이 싹 없어졌다며 저녁 식사는 대충 때우자 했다. 내가 동의하자마자 아내는 바로 식당 예약을 취소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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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승주


한참 만에 견인차 기사분으로부터 연락이 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냉각수가 없어 그런 것 같다고 했더니 수돗물로 보충해 보라 했다. 화장실에서 생수병을 비워내고 수돗물을 받아 알려준 대로 했다. 신기하게도 에어컨에서 다시 시원한 바람이 뿜어나왔다.


기사분에게 다시 전화해 견인하지 않아도 될 듯하다 했다. 하지만 기사분은 거의 도착한 상황이라며 휴게소를 떠나는 동안 확인차 따라갈 테니 천천히 운전해 나오라 했다. 속도를 조금 올려도 무리가 없는 느낌이 들었다. 따라오던 견인 차량도 어느 순간 보이지 않았다.


호텔에 도착하여 체크인하고 객실에 들어오니 그제야 긴장이 풀렸다. 창문으로 보이는 바다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감탄이 절로 나왔다. 그 순간만은 모든 시름이 걷혔다. 아내도 마음이 진정됐는지 고속도로에서 멈췄다면 어쩔 뻔했냐며 이 정도라서 정말 다행이라고 연신 말했다.


저녁을 대충 때우기로 했지만 그래도 명색이 나들이인데 싶어 주위를 검색해 봤다. 걸어서 10분이 채 안 되는 거리에 해물칼국수 집이 있었다. 면을 좋아하는 아내에게 제안했다. 예상대로 흔쾌히 받아들였다.


바닷가라서 그런지 호텔 밖은 덥지 않았다. 도망간 여유를 되찾으려 천천히 걸었다. 이국에 온 듯 주변이 모두 새로웠다. 큰 함바집 모양의 식당은 손님으로 가득했다. 싱싱하고 알찬 해산물이 푸짐하게 들어있는 칼국수 - 메뉴판 속 명칭이 <바다속칼국수> - 는 대만족이었다. 대충 때웠다면 아쉬울 뻔했다고 입을 모았다.


돌아오는 길에 호텔 주변 산책로를 걸었다. 비행기가 공항에 연신 내려앉았다. 노을과 어우러지는 바닷가 풍경은 멋졌다. 우리가 이런 호강을 맛보다니 싶었다.


다음날 이른 아침 저절로 눈이 떠져 커튼을 살짝 열어봤다. 막 일출이 시작될 모양새다. 다급하게 아내를 깨워 발코니로 함께 나갔다. 점으로 보이는 비행기들이 커지며 연신 공항에 내려앉고, 해는 수면 위로 빨간 얼굴을 내비치기 시작했다. 떠오르는 해 앞을 지나는 비행기는 멋진 앙상블을 연출했다. 해와 비행기의 이중주였다.


느긋한 오전을 즐기다 방을 나와 체크아웃하고 차로 갔다. 본네트를 열고 냉각수 수위를 살펴봤다. 어제보다 조금 줄어있었다. 어디선가 조금씩 새는 게 분명했다. 준비한 수돗물로 다시 채우고 조심스레 시동을 걸어보았다. 엔진과 에어컨이 잘 작동하는 듯했다. 에어컨을 약하게 틀고 운전대를 잡았다. 하루의 경험도 경험이라고 어제보다 긴장이 한결 줄었다.


한 시간여 정속 운전 끝에 드디어 집 도착. 현관문을 열자 눈 앞에 펼쳐진 지극히 익숙한 우리들의 공간과 삶의 흔적들. 아내와 나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집이 최고야!’를 외쳤다. 그렇게 우리는 짧지만 긴(?) 호캉스를 마무리했다. 성공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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