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설레서 너무 무섭다
말이 나를 앞서가고 나를 능가한다. 말이 나를 유혹하고 나를 변경시키며, 내가 조금만 주의를 소흘히하면 이미 상황이 끝나버린다. 내가 말하지 않은 것들이 이미 말해져버리고 만다. 혹은, 적어도 그 이상의 일이 벌어진다. <클라리시 리스펙토르, 소피아의 재앙 中>
“너무 설레서 너무 무섭다.”
라고 요괴(호저의 전애인)는 말했다. 호저가 요괴에게 이 대사를 처음들은 것은 2019년 4월 8일이다. 그날은 요괴와 호저가 처음 사귀기로 한 날이고 그날 호저는 그의 말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 호저는 그 말이 무슨 말인지 알 것도 같다고 생각한다. 내가 먼저 고백했다는 건 내가 먼저 시도했다는 것이고 책임을 전가할 대상이 오직 나 자신밖에 없다는 뜻이다, 라는 게 호저의 생각이고, 이 다소 오만한 생각은
내가 지금 시도하고 있는 초월일기와도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내 이름은 호저. 소개를 좀 하자면, 문창과를 나왔고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하고는 다니 지만 실제로는 소설보다는 시를 더 많이 쓰는 인간이다. 이제 나는 무엇을 초월할 수 있을 것이며 어떤 방식으로 내가 쓴 일기들을 뒤섞고, 번복하고, 확장시킬 것인가? 처음에는 일기가 작성된 날짜들로 문단을 나누고 형식을 만들어보자는 생각도 들었지만, 이 일기에서 그게 정말 중요할까?
요괴가 보고 싶다.
뜬금없지만 구독자 신청 확인을 위해 구글 플랫폼을 자꾸 들어갔을 때 호저는 그런 생각을 했다. 왜냐하면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호저에게 제일 먼저 연락을 해주곤 했던 게 그녀의 전애인, 그러니까 요괴였으므로. 호저와 요괴가 애인 사이가 아니었을 때도, 그는 늘 호저에 게 무슨 일이 생기면 그게 좋은 일이든 나쁜 일이든 가장 먼저 눈치 채고 말을 걸어오곤 했다. 그러니까 그가 유일무이한 <내 편> 이었다는 걸 방금 전에야 깨달은 호저는, 과외를 하 다 말고 왈칵 눈물이 쏟게 된다. 당황한 과외생은 말했다.
“괜찮아요? 샘. 괜찮아요.” 정말? 나는 묻고 싶었지만
이제 호저는 녹색식탁에 앉아있다. 녹색식탁은 앞으로 호저가 어떤 생각을 하게 될 때마다 앉게 될 식탁이고, 호저의 맞은편에 앉아있는 인간은 요괴다. 호저가 근 1년간 가장 많이 생각했고 봐왔던 사람이 요괴였기에. 이 일기가 하필 과거를 소환해 시공을 초월하는 방식을 택했기에, 그가 등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거짓말일 테니까. 여기에서까지 거짓말 하긴 싫으니까. 블로그에서는 한동안 거짓말을 많이 했다. 거기에서는 요괴에 대해 못 썼으니까. 걔가 볼까봐. 실제로 보기도 했고. 걔한테 들키기 싫었다. 아직도 내가 너 생각한다는 거, 자백하기 싫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 일기의 구독자가 소수면 좋겠다는 생각도 했던 것 같고.
“행복했던 일들이 많았다.”
이것은 호저와 헤어지고 두 달이 다 되어갈 무렵 요괴가 블로그에 적은 문장이다. 헤어진 당시에는 동의하지 못했던 이 말을 호저는 이제 동의한다. 인정하지 못했던 일이나 이해할 수 없을 것 같았던 일들은 어째서 반드시 내 멱살을 움켜쥐는 것도 모자라 기어코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걸까. 업보인가? 다음은 과거의 호저가 쓴 일기들이다. 호저는 일기를 쓸 때, 자신을 <나>가 아닌 3인칭 <호저>로 부르는 습관이 있다.
* 2019년 8월 28일
: 차가워
미쳤다 물이야?
무슨 색입니까
일종이입니다
아니 우리는 여전하다 나비와는 아주 약간 다르다
속았지?
멘홀 뚜껑 닫을 생각하지 마 아직 구토할 시간이니까 토사물이 쏟아질 때마다 목구멍이
찢어졌지 딱 그만큼
할 수 있는 말이 늘어났던 것도 같아
흑 씨발 흑
흑흑 씨발
미안해? 햇빛도 이따위로 쳐웃지는 않아 *
* 2019년 9월 19일
: 눈을 떴는데 별안간 계속 행복한 순간만 반복되지 않는다는 게 계속 행복할 수도 있는 비결이라는 생각이 들었고 그래서 행복했다. 요괴는 호저가 있으면 자신이 무궁무진해질 수 있다고 말했고 호저는 나도! 라고 말했다. 그가 뭔가를 말할 때마다 호저는, 나도! 나도! 라 고 소리치고 싶어질 때가 많다. 행복하다! 호저는 생각했다. 요괴에게 정말 고맙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요괴를 보면 다시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나를 지키고 싶다가도 마음을 지키고 싶어진다, 고. 요괴는 종종 호저가 어떤 사람인지 모르겠다고 말하곤 했다. 그 말이 맞을 것 이다. 호저가 이 마음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너는 모를 것이다. *
불안하다.
호저는 설레임과 불안함을 구분하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