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시절을 떠올리면 그때 왜 그랬을까? 하고 마음은 땅을 치고 후회하는 일들이 있다. 그것의 무게가 너무 커서 생명은 쓰러져 금방이라도 없어질 것만 같다. 그러나 ‘이만큼 살아올 동안 어찌 후회할 일들이 없겠는가? 지난 일들이니 오늘 되돌릴 수도 없으니 마음을 다잡아 먹고 지금 열심히 살자’ 하고 일어선다. 그런가 하면 또 어떤 시절은 세월이 흘러도 변함없는 보석처럼 빛이 나기도 한다. 어둠 속에서 돌이켜 보면 더욱 그렇다.
나는 지방의 어느 여학교에서 삼십 대 초반을 보냈다. 유난히 많은 목련과 덩굴장미, 은행잎들이 교정에서 피고 졌다. 나는 아이들이 좋아 교무실에 앉아있지를 못했다. 교실에 있을 아이들 생각에 늘 안달이 났다. 수업시간 중 어쩌다 내가 해주는 영화 이야기에 아이들은 열광하기도 했다.
3학년 영주는 어느 날 고운 체크무늬의 투피스를 차려입고 사진기를 들고 와서 나와 사진을 찍자고 했다. 영주가 내 팔짱을 꼭 끼고 팬지 꽃들이 핀 정원에 앉아 찍은 사진은 아직도 내 앨범 속에 남아 있다. 공개수업이 있던 날 나는 아이들과 함께 이호우의 ‘달밤’을 낭송했다. ‘무엔지 그리운 밤 지향없이 가고파서’라는 대목에서 우린 함께 대상도 없는 어떤 그리움을 노래하듯 낭송했던 것 같다.
세희는 늘 머리를 단정하게 뒤로 묶어 다녔다. 살이 약간 오른 계란형 얼굴과 머리 모양이 잘 어울렸다. 국어를 재미있어하고 또 잘했다. 한창 수업에 열중하다 언뜻 보면 유난히 눈에 꽂혀 들어왔다. 선생님의 설명 한 마디도 빠뜨리지 않으려는 열의가 내게까지 어떤 기운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똑똑한 세희에게 나는 학급 서기를 맡겨놓고 사소하고 개인적인 심부름까지 시켰다. 학교 밖의 은행에 갔다 오는 일도 여러 번 세희를 통해 해결하곤 했다. 쉬는 시간이나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갔다 오려면 몸을 재바르게 움직여야 한다. 세희는 숨을 헥헥 거리며 돌아와서 ‘선생님, 갔다 왔어요.’ 하곤 했다. 볼이 빨갛게 상기되어 빠르게 말하던 세희의 모습이 떠오른다. 삼십 대 초반, 선생님으로서 나는 생각이 덜 여물었다. 심부름을 시키는 것이 그 학생에 대한 나의 신뢰를 보이는 것이라고도 생각했던 것 같다. 싫어하는 기색 하나 없이 내 심부름을 해내던 세희에게 나는 지금 너무 미안하다. 세희를 생각하면 내가 늘 깊은 그늘 한편에 서게 되는 이유이다. 세희는 교육대학에 진학했다는 소식을 나중에 전해 들었다. 지금쯤 중년 교사가 되어있을지 모르겠다.
학년 말 세희를 비롯한 아이들은 3학년으로 올라가야 하는 때가 왔다. 나는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아이들도 마지막 시간이 다가오자 아쉬워하는 듯했다. 여우들이라 내 앞에서만 그런 표정들을 지었는지도 모른다. 아이들은 3학년으로 올라가고 나는 또 다른 2학년 아이들과 인연을 맺었지만, 한동안 나는 세희와 같은 학년 그해의 아이들을 잊지 못했다. 합창대회에서 준우승을 차지한 날 아이들은 모두 합창할 때의 차림인 한복을 입은 채 나를 둘러싸고 사진을 찍었다. 김동환 작시의 ‘남촌’을 부르던 사춘기 소녀들의 그리움에 젖은 듯한 음성과 노랫말을 나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아름답고 그만큼 또 후회와 아쉬움이 많은 시절이었다.
빼어난 의성적 울림을 가진 윤선도의 시조에 몰입하여 '지국총지국총 어사화'를 낭송하면 눈을 반짝이며 십 대 소녀들은 따라와 주었다. 그런 순수의 시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