먼 다리

누구나 첫 발걸음은 설레었을 것이다

by 석정호




사람들 사이에는 인연이 오고 가는 다리가 있다. 한때 다정했으나 무관심의 강물 속으로 그 다리를 흘려보내고 후회하기도 한다.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 찾아보지만 인연의 흔적은 없고 혹은 불행한 후일담이 들려와 마음은 애처롭게 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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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가 쪽으로 먼 일가에 순희라는 나와 동년배의 여자애가 있었다. 외사촌 누이와 함께 길가에 쌓인 눈 무더기를 피해 가며 종종 걸어서 놀러 가면 순희는 라디오를 켜놓고 자수를 놓다가 우리를 맞아주곤 했다. 따뜻한 이불속으로 다리를 집어넣고 우리는 수다를 떨기도 하고 손이나 발로 하는 게임들을 하며 놀았다. 나를 대하는 순희의 눈길은 늘 따뜻했다.

나는 대구의 고등학교로 진학을 하고 순희는 부산의 어느 공장으로 취직하여 갔다. 낯선 곳에서 외로웠던 나는 순희가 있는 부산의 주소를 알아내어 편지를 보내곤 했다. 순희도 외로움을 나의 편지로 달래는 듯했다. 그때는 멀고 가까움에 상관없이 편지가 소통의 중요한 수단이었다. 한동안 우리는 편지를 주고받았지만 점점 대구에서 친구들도 생기고 학교생활에 적응이 되자 나는 순희에게 편지를 보내지 않게 되었다. 몇 년 뒤, 순희는 병을 얻어 고향으로 돌아와 지낸다는 소식을 어렴풋이 들을 수 있을 뿐이었다. 그 뒤로도 나는 편지를 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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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교 2년 후배 경자와는 우연히 친하게 되었다. 어느 날 친구 원하와 나는 경자에게 한 가지 제안을 했다. 돌아오는 토요일 똑같은 영화를 상영하는 서로 다른 두 영화관 앞에서 각각 기다리고 있을 테니 두 사람 중에 마음에 더 드는 사람이 기다리는 곳으로 나와라. 경자도 재미있다고 생각했는지 ‘오케이’ 했다. 나는 다림질로 바지에 줄을 곧게 세우고 하얗게 빨아놓은 운동화를 신고 약속 장소로 나갔다. 과연 경자가 내가 기다리는 곳으로 나올까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경자는 그날 내가 있는 곳으로 나왔다.

그날 이후 우리는 캠퍼스의 구석진 곳으로 다방으로 음악감상실로 쏘다녔다. 군밤을 사서 주머니에 넣고 서로 상대방 주머니의 그것을 꺼내먹으며 겨울 밤거리를 걷기도 했다. 점심시간에는 인적이 뜸한 캠퍼스의 나무 아래에서 서로 싸 가지고 온 도시락을 꺼내 같이 먹었다. 둘이서 노래도 불렀다.

사람들은 우리를 보며 연애를 하는구나 하고 생각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경자를 향한 내 마음은 일정 정도 이상으로 끓어오르지는 않았다. 언제부턴가 경자와의 만남이 시들하게 느껴졌다. 무엇이 내 마음에 싸늘한 바람을 불게 했을까? 사람의 감정이란 오묘한 것이다. 나는 경자와 늘 만나던 장소에 나가지 않았다. 가끔 우연히 마주칠 때 왜?라고 묻는듯한 경자의 눈망울을 무심한 듯 외면했다. 그때의 일을 떠올리면 비겁한 나의 행태가 부끄러워 얼굴이 뜨거워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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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은 불완전한 존재라 자책과 후회의 길에 수없이 들어선다. 돌이켜 보면, 환하게 비치는 햇빛처럼 미소를 짓게 되는 일들도 어두운 골방처럼 지워 버리고 싶은 자책감으로 떠는 일들도 있다. ‘그렇게 하지 말았으면 좋았을 것을....’ 하고 그때로 돌아가 내가 치워버린 인연의 다리를 다시 올려놓고 싶은 일들도 있다.

허망하게 끝나버린 인연들도 첫 발걸음은 무척 설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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