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27일 리움홀 / 연주곡: 드뷔시 아라베스크 No.1
1. 아침을 깨운 작은 행운 — “오늘은 나를 챙기는 날”
연주회 아침, 얼마 전 인스타그램을 켰다가 우연히 접한 ‘연주회 당일 가이드’ 같은 콘텐츠를 다시 한번 떠올렸다.
거기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연주회 당일엔 연습보다 컨디셔닝에 집중하라.”
연주회 당일은 그간 연습했던 것을 최상의 컨디션에서 발휘하는 날이지
그간 미뤄뒀던 연습을 하는 날이 아니라는 내용이었다.
이 말이 나에게는 작은 행운처럼 다가왔다.
누군가 내게 “오늘은 스스로를 괴롭히지 않아도 된다”라고 말해주는 듯한 느낌을 받았고, 그간 조금조금 쌓은 연습의 시간들이 아침의 여유로 보답받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이성이 납득했다’와
‘심장이 안심했다’는 전혀 다른 문제였다.
결국 나는 아침 7시, 연습실로 향했다.
다만 그날의 연습은 평소와 달랐다.
스트레칭에 더 신경을 쓰고 연주 중간중간 충분히 쉬어주고
무대 인사를 어떻게 할지 고민하는 등 그저 “피아노와 함께 머무는 시간“을 갖고 싶었다.
2시간 정도 연습실에서 시간을 보낸 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고 가족들에게 아침을 챙겨주고,
소파에 앉아 오늘의 곡 아라베스크 No.1을 다시 들었다.
‘마리아 주앙 피레스’의 아라베스크는 유난히 부드럽게 들렸다.
마치 “오늘 너는 괜찮을 거야” 하고 건반 너머에서 말하는 듯했다.
옷을 몇 벌 갈아입어 보다가
곡의 분위기와 오늘의 정신상태와 가장 비슷한 옷을 선택했다.
그리고 천천히 리움홀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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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그림 속 빛을 품고 — 소로야와 함께한 마음 준비
연주회장으로 가는 길,
가방에는 악보와 함께 호아킨 소로야 도록을 챙겨 넣었다.
“소로야의 빛을 떠올리며 손끝으로 몽글몽글 그림을 그리듯 연주한다"
다시 한번 연주할 때 마음가짐을 머릿속으로 되내며 자동차 시동을 걸었다.
리움홀에 도착하니
로비로 연주자들의 연습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소리만으로도 “아, 오늘 다들 준비에 열심히구나” 하는 기운이 전해졌고 약간의 긴장감이 느껴졌다.
리움홀 연습실을 따로 예약하지 않아 로비에서 기다려야 하나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찰나에
함께 연주할 연주자님이 다가와 말했다.
“연습실 같이 들어가요.”
너무 감사한 초대에 염치 불고하고 한마디 거절하지 않고 “감사합니다!”를 외쳤다
연습실 안에는 이미 다른 한 분이 쇼팽 왈츠를 연주하고 있었다.
2주 만에 이렇게 좋아지는구나. 대단하다”
2주 전 리허설보다 훨씬 깊어진 사운드에 적잖이 놀랬다. “
그다음은 날 초대해 준 연주자님이 리스트의 ‘라 캄파넬라(엄청난 난곡이다)’를 연주하셨다. 그분의 악보를 보며 연주를 감상했는데 정교함과 셈여림이 대단히 좋아진 게 아닌가. 그리고 그 긴 곡을 암보를 해내다니..
그 광경을 보며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연습의 시간은 절대 배신하지 않는다.”
한참 감상에 빠져있는 나에게 연주자분께서 연주를 해보라고 하셔서 마지못한 척하며 피아노 앞에 앉았다.
그런데, 이상하리만치 손을 떨지 않았다. 그전에는 옆에 누가 있다고 생각하면 수전증 걸린 듯 손을 떨었는데 놀랍도록 손이 평온했다.
“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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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무대 리허설 — 아무 말도 떠오르지 않는 하얀 순간
그렇게 한 번의 연습을 끝내고 대기실에 올라가니 연주자분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가벼운 인사, 작은 웃음, 손가락을 풀어보는 소리.
그러다 선생님께서 최종 리허설을 알렸다.
오늘 두 번째 만나는 피아노를 눌러보았다.
2주 전에는 낯설다고 느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아무 감정도 없었다.
좋지도, 나쁘지도 않은
그저 무색무취의 “피아노”로 느껴졌다.
리허설 연주 역시
질문도 욕심도 없이 그저 했다.
손이 가는 대로, 음이 흐르는 대로.
대기실로 돌아와 앉아 있는데
공기가 눈에 띄게 달라졌다.
다들 긴장을 풀기 위해서 인지 오랜만에 만난 얼굴이 반가워서 인지 조금은 수다스러워졌다.
그렇게 웃어도 웃는 게 아닌 상태에서 담소를 나누고 있던 중에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렸다.
“연주회 시작할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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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연주회 시작 — 기억이 증발하는 순간
나는 3번째 연주자였다.
1번째 연주자가 무대를 올라가고
2번째 연주자가 무대 출입구에서 대기를 하고 있는 동안
이상한 변화가 찾아왔다.
정확히 표현하지는 못하겠지만 일종의 ‘멍해짐’이었다.
“악보가 뭐였지?”
“첫 소절은 어떻게 시작하지?”
“손가락이 어디로 가야 하더라…?”
연습했던 모든 기억이
깨끗하게 지워진 듯했다.
불안이 조용히 스며드는 게 아니라
댐이 무너져 내리듯 몸을 장악하려 했다.
손바닥에 차가운 땀이 맺혔다.
하지만 그때 나는
억지로 악보를 떠올리려 하지 않았다.
손가락 동선을 복기하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그 대신 아주 단순한 말만 반복했다.
“나는 대가다.”
“연습한 게 얼만데, 분명히 된다”
“어떻게든 해낸다.”
물론 이런 주문을 한다고
악보가 마법처럼 떠오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 말들이
내 무감각과 불안을 ‘조금은 온기 있는 공간’으로 만들어주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리허설 전 연주에서 느꼈던 ‘평온’의 정체는
극도의 긴장 아래서 감각이 꺼진 것과 상태였던 것 같다.
불안이 보이지 않는 방향으로 숨어 있다가 몸의 감각을 아주 낮은 톤으로 누르는 상태랄까.
2번째 연주자가 무대 아래로 내려왔다.
이제 내 차례다.
나는 무대 출입구 문 앞에 선 채로 맞은편 거울 속 내 모습을 바라봤다.
이상하게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 같이 어색했다.
익숙한 옷, 익숙한 얼굴이지만
묘하게 낯선 표정이었다.
“저게… 난가?”
옷매무새를 가다듬어 봤다.
옷에 뭍은 먼지를 털어 내보고, 소매도 정리해 본 뒤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러고 나서는 더 이상 거울을 보지 않았다.
더 이상의 잡념은 허용하고 싶지 않았다.
생각이 이 정도에 닿았을 때 무대 문이 조용히 열렸다.
나는 머릿속이 완전히 빈 채로 무대 중앙으로 걸음을 내디뎠다.
본능적으로 관객석에서 가족들을 찾은 뒤 살짝 새어 나오는 미소와 함께
관객들에게 진심을 다해 인사를 했다. 110도 정도 깊이 고개 숙이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앉아 내가 해야 할 일을 시작했다.
“깊은 심호흡 두 번”
“어깨에 힘은, 손목의 무게로..”
“오른손은 또렷하게…”
“또… 뭐였지? 아 그림, 그림”
그렇게 연주는 시작하려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