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피아노 1년 농사 추수감사제 ‘연주회’ (2)

성장했음이 분명해

by Double P

1. 1993년의 아이


정확하진 않지만, 아마 초등학교(당시에는 국민학교) 3학년이었을 것이다.

학교 앞 피아노 학원을 다니던 나는 생애 첫 ‘연주회’라는 행사에 참여하게 됐다. 그때는 지금처럼 곡 해석이 어떻고, 이미지가 어떻고 이런 걸 고민하던 시절이 아니었다. 원장 선생님이 시키면 시키는 대로, 가끔은 연습이 싫어 사과를 여러 개 그려가며 그저 시간을 보내던 그런 때였다.


어떤 곡을 연주했는지 기억은 나지 않는다. 주황색 표지의 소나티네 책의 한 곡이었던 것 같고, 셋 잇단음표로 곡이 시작했던 것 같기도 하다. 그때는 몰랐는데, 무려 암보를 하고 연주를 하는 무대였다. 따로 곡을 외우려고 노력했던 것 같지도 않고 어떻게 연습했는지도 모르겠다. 정말 아무 대책 없는 소위 ‘무대포’였다.


긴장을 하긴 했을 것이다. 당시 연주용 턱시도를 대여했는데, 드레스숍에서 턱시도 셔츠를 굉장히 작은 것을 가져다줘서 한동안 당황하다 모르는 형에게 셔츠를 빌려 입고 무대에 올랐다. 만약 지금 그런 일이 생겼다면 과연 제정신에 무대에 설 수 있을까 싶다.


어쨌든 무대에 오른 나는 연주를 시작했는데, 중간 부분쯤에서 악보를 까먹었다. 한 5초쯤? 갈 곳 잃은 손가락이 틀린음을 더듬거리다 어찌어찌 연주를 마무리했다. 공연이 끝나고 인사를 하자 어머니가 꽃다발을 건네주셨는데, 어쩐지 어머니의 미소가 안타까움의 미소로 기억하고 있는 것을 보니 그때 연주 실수에 대한 상처 혹은 아쉬움이 꽤나 컸나 보다.


나중에 받은 사진을 보면 잔뜩 굳은 얼굴로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있는데, 아마도 그 틀린 순간을 포착한 사진이었을 것이다.


2. 2025년의 어른


이상하게 그 기억들이 대기실에서 떠올랐다. 손이 떨리거나 심장이 두근거리지도 않아서 긴장을 안 하고 있는 줄 알았더니, 별안간 어릴 적 기억이 떠오르다니… 그것도 무대에 오르기 직전에…


무대로 향하는 문이 열렸다.

1993년의 나를 대기실에 남겨두고, 문을 통과해 무대로 올랐다.

환한 무대에서 오른편 관객석을 바라보니 제법 많은 분들이 자리를 하고 계셨고, 그중에 가족들이 어디 있는지 얼른 확인했다. 그리고, 고개를 한껏 숙여 인사를 올린 뒤 피아노 앞에 앉았다.


깊은 숨을 두 번 들이킨 뒤 코로 길게 내쉬었다. 긴장해서 굳은 어깨를 풀기 위해 무대 위 천장을 한번 쳐다보고 어깨의 긴장을 손목 방향으로 내리려고 의식적인 노력을 했다. 그리고, 머릿속에 호아킨 소로야가 그린 스페인의 바다를 떠올리려고 했지만 솔직히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다고 마냥 이미지가 떠오르길 기다릴 순 없었기에 생각이 쫓아올 틈을 주지 않고 첫 음을 누르기로 했다.

악보? 모르겠다. 어차피 무대는 시작됐고, 연주는 해야 했기에 그냥 나를 믿고 시작하기로 했다.


3. 무대에 나는 없었다


정말 한동안 아무런 생각도 나지 않았다. 분명 눈앞에 피아노 건반을 누르는 내 손이 있고, 가끔 눈을 감았다 뜨거나 시선을 멀리 던지기는 했지만 그 어떤 동작들도 의식적으로 하는 것은 없었다. 보다 정확히 말하면 그 순간의 무대에는 ‘나’라는 존재가 없었다.


틀린 음을 누를까 걱정하는 나도 없었고, 잘하고 싶다고 기도하는 나도 없었다. 그저 피아노를 연주하는 ‘누군가’가 있었다. 숨소리가 멀어지고, 시간 감각이 느슨해지고 머릿속은 하얗게 비워졌다. 오로지 건반 소리만 들렸다. 생각은 사라졌고, 움직임은 멈추지 않았다.


그런 상태로 제법 시간이 흘렀다는 생각이 문득 들면서 의식이 돌아왔다.

‘…. 곡이 언제 끝나지? 어? 벌써 끝부분이네?’ 연주는 어느샌가 종지를 향해 있었고 집중이 흐트러지지 않으려 마지막 힘을 내며 차분한 엔딩을 만들어냈다.


나중에, 영상을 확인해 보니 의식이 돌아온 순간 템포가 순간 빨라지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마치 '이곳에서 나로 돌아왔다'라는 것을 표시해둔 것처럼. 생각해 보면 의식을 되찾는다는 건 다시 실수할 수 있는 존재로 복귀한다는 뜻이었고, 나에 대한 의심으로 스스로를 흔들 수 있는 상태로 돌아오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연주하는 나 아닌 나


4. 무대라는 도파민


선생님의 ‘브라보’ 소리와 함께 관객들이 박수를 치기 시작했다.

그 소리에 나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고, 의자에서 일어나 다시 한번 깊은 인사를 관객들에게 건넸다. 후련한 마음으로 선생님과 눈을 한 차례 마주친 뒤 대기실로 이동하였는데, 관객들의 박수가 여전히 귀에 맴돌았다.


무대 뒤편으로 들어가자 다른 연주자분들이 웃으며 맞아주었다. 박수를 쳐주시는 분도 계셨고, 악수를 건네는 분도 계셨다. ‘수고했다’, ‘대단했다’ 등등 기분 좋은 말들을 건네주셨다. 한숨 돌리고 보니 이마에 땀이 주르륵 흘렀다. 그제야 내가 엄청 긴장을 많이 하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후 다른 분들의 연주를 맘 편히 감상하며 연주회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오자 가벼운 몸살이라도 한 듯 온몸이 저릿저릿해왔다. 졸음과 피곤함도 무너진 둑의 강물 마냥 몸을 덮쳐왔다. 딱히 졸음을 버텨야 할 이유도 없었고 후련함과 뿌듯한 마음에 가족들에게 이른 취침을 고한 뒤 그대로 침대 위로 쓰러지며 내 인생의 기념비적인 날을 마무리했다.


문뜩, 어릴 적 학원 연주회에서 실수를 하지 않고 제법 괜찮은 연주를 했다면 나는 어떤 삶을 살았을까라는 의문이 든다. 그때 제대로 준비하고, 연습해서 스스로 만족하는 연주를 펼쳤다면 그래서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더라면 아마 피아니스트를 꿈꿨을 것 같다 (장래희망 ‘피아니스트’를 쓴 적이 분명 있다)


그만큼 이번 무대에서 얻은 기쁨은 컸다. 여러 사람의 박수가 나를 향해 쏟아질 때 그 쾌감은 생각보다 강렬했고 관객들의 미소에서는 따뜻한 마음을 느꼈다. 좋은 연주를 들려주기 위해 노력했던 순간들을 보상받고도 남는 경험이었다.


그래서인지 가슴속에서 ‘무대에 서고 싶다’라는 마음이 조용한 불씨를 댕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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