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 인상을 연주하고 싶다

소로야와 드뷔시 - 인상주의가 좋다

by Double P

1. 그림을 보다가 연주가 바뀌었다


어느 날 교보문고에 들러 우연히 외국서적 코너를 들렀는데, 마침 50% 할인을 하고 있었다.

그곳에서 스페인의 모네라고 불리는 호아킨 소로야의 도록을 보게 되었다.

그의 그림은 선명한 윤곽보다 빛과 공기의 흔적이 먼저 보이는 작품이 많았다.

해변에서 물놀이를 하는 아이들, 젖은 피부에 붙은 바닷물,

그리고 그 위로 반짝이며 떨어지는 태양빛.


그의 그림을 보다가 문득 신기한 느낌이 들었다.

분명 멈춰있는 그림인데 ”스페인의 태양, 소금기 있는 바닷바람과 공기“가 느껴졌다


형체는 흐릿해도 존재감은 분명했다.

그런데 색과 빛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소로야의 그림에 감탄했다.

그 순간, 묘하게도 드뷔시의 음악이 떠올랐다.



2. 빛으로 존재를 드러내는 그림, 공기로 존재를 드러내는 음악


나는 피아노 앞에 앉아 드뷔시의 아라베스크를 다시 연주해 봤다.

이 곡을 그동안 ‘예쁜 선율’ 정도로 생각했었다.

하지만 소로야를 보고 난 다음부터는

이 곡이 형체로 그려진 음악이 아니라, 공기로 번지는 음악처럼 연주하고 싶어졌다.


그림 속 아이들의 젖은 팔뚝 위에 빛이 흔들리듯,

음 하나하나도 작게 반짝이며 울려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날부터 연주 방식을 조금 바꿔보기로 했다.

• 곡 전체를 균일하게 치지 않고

• 주제가 되는 선율은 또렷하게,

• 그 이외의 부분은 마치 배경처럼 조금 부드럽게


그림에서 시선이 머무는 곳만 선명하고

나머지는 빛과 공기 속에 녹아들어 가듯이.


그렇게 연주하자

악보는 그대로인데, 곡의 깊이감이 달라졌다.

음이 선율의 순서대로만 들리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음은 반짝이고, 어떤 음은 뒤로 물러나며

‘빛의 층’처럼 들리는 순간이 생겼다.



3. 반짝이는 소리를 만들기 위해 나는 무엇을 바꿨나


나는 손끝에 작은 ‘반짝임’을 담는 기분으로 건반을 눌렀다.

너무 세게 치지 않고, 그렇다고 흐릿하게 흘리지도 않고.

물결 위에서 햇빛이 흔들릴 때처럼

음 하나하나가 아주 작게 떨리는 느낌을 의도했다.


페달은 조금 얕게 밟고,

손가락은 건반에 오래 머물지 않고 톡 하고 빠졌다.

그 순간 소리는 더 오래 울렸고,

그 울림 속에 빛과 공기 같은 여운이 생겼다.


그때 나는 확신했다.


“연주는 손가락으로 하는 게 아니라,

내가 경험한 세계 전체로 하는 것이다.”



4. 연주 기술도 중요하지만, 감상 경험이 더 넓혀준다


연주자에게 테크닉은 당연히 중요하다.

하지만 기술만으로는 음악이 살아나지 않는다.

감상의 폭이 넓어질 때, 연주는 비로소 깊어진다.


소로야의 그림 한 장이

내 페달 깊이를 바꾸고,

손가락의 속도를 바꾸고,

곡 전체의 분위기를 바꿔버렸다.


잘 들으려면, 더 많이 봐야 하고,

잘 표현하려면, 더 많이 경험해야 한다는 것을 경험했다.


물론 매번 잘 되는 것은 아니지만 감상을 연주에 담아보려고 노력 중이다.

그림을 보고 연주가 달라지고,

산책 중 느낀 바람 때문에 템포가 바뀌고,

어떤 날의 공기 때문에 페달이 더 얕아진다.



5. 빛을 연주한다는 마음으로


아라베스크를 연주해 본다.


악보 위의 음이 아니라,

그 음을 감싸는 공기와 빛을 떠올리면서.


그래서 나는 스스로에게 조용히 묻곤 한다.


“지금, 내 소리는 반짝이고 있는가?”

“지금, 음악 속 공기가 흐르고 있는가?”


그 질문 하나가, 곡의 분위기를 조금씩 바꿔놓는 것이 느껴질 때

작은 행복감이 든다.


어떤 순간이, 어떤 풍경이 또다시 나의 연주 혹은 삶을 달라지게 할지 기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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