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 전율의 밤 - 베를린필 내한 공연을 듣다

가을에 어울리는 완벽한 공연

by Double P

11월 7일, 예술의전당에서 열린 베를린필하모닉 내한 공연.

표를 기다리는 긴 줄, 숨죽여 음악에 집중하는 관객, 그리고 한 음 한 음이 전하는 전율.

바그너의 따뜻한 목가부터 브람스의 폭풍 같은 교향곡까지 완벽한 가을을 느끼게 해 준 베를린의 숨결에 감사드린다.


1. 공연이 시작되기 전부터 다른 분위기


11월 7일 저녁, 예술의전당.

고대하던 베를린필하모닉의 공연이 있는 날이었다.

바람도 세지 않았고, 살짝 차가운 가을 공기는 공연을 즐기기 딱 좋은 날씨였다.

분수대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갔고, 공연표를 받으려는 줄도 상당히 길었는데, 이 공연을 기다리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실감할 수 있는 모습이었다.


사람들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그들의 눈빛과 표정에서는 공연을 기대하는 마음이 얼마나 큰지 알 수 있었다.


노란색 프로그램북을 받아 들고 베를린필의 연혁과 현재, 그리고 오늘의 공연 내용을 꼼꼼히 읽어봤다. 공연을 많이 즐기신 분에게는 어쩌면 평이한 레퍼토리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베를린필 아닌가! 기대감이 더 커졌다.


2. 바그너 지크프리트 목가 - 따뜻한 아침 공기를 음악으로 그려내다


지휘자 키릴 페트렌코가 등장하자, 큰 박수가 그를 맞이했다.

그는 크지 않은 제스처로 인사를 하고, 곧바로 지휘석에 올라섰다. 잠시 집중을 하고 손끝으로 오케스트라를 이끌며 첫음이 울렸다.


바그너가 아내 코지마의 생일을 맞아 헌정한 사랑스러운 곡.

사랑과 평화가 넘치는 아침을 노래하는 음악.

곡의 배경 설명이 없더라도 이미 눈앞에는 따뜻한 아침햇살, 기분 좋게 바스락 거리는 베개와 이불. 그리고 한 사람을 위해 연주하는 악단이 그려졌다.


플루트와 오보에의 선율은 몽글몽글한 공기를 그려냈고, 현악기는 그 공기 안을 부드럽게 오고 갔다. 음악을 들었지만, 포근한 아침 공기를 들이마시는 기분이 들었다.


포근한 질감의 소리, 따뜻한 체온의 소리.

음악을 듣고 있지만 다른 감각이 반응했다.


3. 슈만 피아노 협주곡 - 호흡이란 이런 것


피아니스트 김선욱이 무대로 걸어 나왔다.

그의 표정은 담담했고, 지휘자와 친근한 미소로 인사를 나눴다.

그리고 피아노 앞에 앉아 공간을 가르는 첫 페시지를 연주해 나갔다.


김선욱 피아니스트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피아니스트이기도 해서 그의 다른 연주를 곧잘 듣곤 했는데, 현장에서 듣는 그의 피아노는 또 다른 매력이 있었다.


부드럽지만 단단한 손끝. 작지만 또렷한 여린 음으로 홀 전체를 채우고, 베를린필이 그 음을 받으며 다시 긴장감을 이어가며 음악을 완벽히 이어갔다.


연주 중간에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부분은 피아니스트와 악단이 굉장히 많은 눈빛을 주고받으며 실제로 대화를 하듯 연주를 이어가는 모습이었다. 뭐랄까, 피아니스트와 지휘자, 악단 이렇게 세 그룹이 커피 테이블에 앉아 서로의 이야기에 집중하며 대화하는 모습 같았다.

그래서 그런지 그들의 연주는 조화로움이 최고로 느껴졌다.


앵콜곡(브람스의 로망스)에서는 김선욱 피아니스트의 감정이 오롯이 느껴져 너무 좋았다. 여린음으로 길게 이어가는 트릴이 어떻게 그렇게 귀에 꽂힐 수 있는지 미스터리다. 이 감정을 정의하면 그 감정의 폭이 줄어들 것 같아 ‘너무 좋다’라는 감상만 남겨두고 싶다.

4. 브람스 교향곡 1번 - 등줄기에 흐른 전율


휴식 후, 브람스 교향곡 1번이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관악기 연주자들에게 경의를 표했다. 어떻게 저렇게 균형 잡힌 소리로 이 넓은 홀을 밀도 있게 채우는 것일까. 단순히 잘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관악기 연주자들 간의 호흡도 너무 훌륭했고, 목관과 금관이 주는 다른 느낌도 너무 절묘했다.


또 하나, 콘트라베이스의 저음이 굉장히 돋보이는 연주였는데, 다른 공연에서는 느낄 수 없는 그 저음만의 힘이 확실히 들렸다. 곡 전체의 리듬을 책임지는 것에 머물지 않고 하나의 악기로 소리를 책임지는 악기의 역할을 훌륭히 해내는 모습 또한 잊을 수없다.


시간이 어떻게 흐르는지도 모르고 어느새 4악장에 돌입했는데, 폭풍이 몰아치듯 모든 악기가 터져 나왔고, 음악은 관객석과 무대를 종횡무진했다. 어느 순간 다리부터 찌릿찌릿한 전기가 타고 오르더니 허리, 등, 목을 거쳐 지휘자의 종지와 함께 머리끝까지 다달았다.


아마 그런 기분을 느낀 것은 나뿐만이 아니었을 것이다.

음악이 끝나자마자 관객들은 음악의 마지막 한 마디처럼 한 목소리로 환호를 지르고 박수를 쳤다. 나는 손바닥이 뜨거워질 때까지 박수를 칠 수밖에 없었다. 그건 단순한 찬사가 아니라 ‘이 밤을 잊지 않겠다’는 고백과 같았다.


5. 음악은 향기를 남기고


홀을 나서면서까지 손의 얼얼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누군가는 ‘계속 듣고 싶다’며 아쉬움 섞인 감상을 토로하기도 했다. 나도 마음 한 켠에 공연이 끝난 것에 대한 아쉬움에 서늘한 가을바람에 손을 맡기며 집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매년 가을이 와도 ‘또 오는 가을이구나’하고 무심코 지나쳤는데, 올해는 가을의 향기를 음악으로 느꼈던 순간이다. 가을에는 브람스를 들어야 한다고 하던데, 왜 그런지도 알 것 같다.


공연 하나로 참 많은 것을 알게 해 준 베를린필이다. 베를린필이 유명한 이유가 음악도 음악이지만, 이런 교육적인 측면도 있어서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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