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주의와 행복의 역설
취미로 피아노를 즐긴 지 1년여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피아노 이전에는 야구, 골프 등 운동 종류의 취미를 즐겼습니다. 돌이켜 보면 그때도 실력은 비루하지만, 운동을 대하는 마음만은 프로 선수와 다름없었습니다. 레슨을 받고, 시합을 뛰고, 장비에 공을 들이고… 단순한 ‘취미‘의 영역을 넘어서, ‘프로’의 영역에 닿고 싶은 욕구가 강했습니다.
피아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계이름도 바로 읽지 못하고, 화음을 짚을 때면 손가락 하나하나 위치를 잡아줘야 하는 상태지만, 작곡가의 삶과 시대 배경을 공부하며 작곡가의 고뇌에 공감하려 했습니다. 기본적인 테크닉 연습으로 손가락 힘을 기르려고 하고, 유명 연주자의 레코딩을 청음하며 나름의 분석을 시도했습니다. 미세한 보물을 캐내는 고고학자의 작업과 같이 연습하며 보물을 빚어내고 싶었습니다. 피아노에 관한 열정이 강했기 때문일 수도 있고, 혹은 성실하려는 태도의 연장으로도 볼 수 있겠습니다.
그러던 중 문득 ‘도대체 어느 정도 곡을 완성해야 하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왕이면 프로 피아니스트의 수준으로 연주한다면 좋겠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은 너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내가 목표로 삼아야 하는 수준은 어느 정도인 건지가 궁금해진 것이죠.
그래서 피아노 선생님께 다른 분들은 어느 수준까지 곡을 완성시키는지 여쭤봤습니다.
“사람마다 다르지만, 곡을 한번 경험해 보는 정도에서 연습을 마무리하는 분도 계시죠. 곡의 절정을 맛보고 아쉬움 없이 다음 곡으로 가볍게 넘어가시는 분들도 있고요. 또 어떤 분은 그날그날의 기분에 따라 즉흥적으로 곡을 바꾸시는 분도 계시고요. “
저의 엄격한 완벽주의(?)의 잣대로는 그분들의 연습은 너무나 무계획적으로 보이고, 성급한 포기처럼 비쳤습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 미완성 아닌가?’, ‘곡의 깊은 맛을 모르고 수박 겉핥기잖아!’, ‘어떻게 저 정도에서 만족할 수 있지?’ 정말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최근 그분들과 사석에서 만나 얘기를 나눴는데, 다들 본인의 피아노 라이프에 상당히 만족하고, 그 경험에 감사하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리고 저의 속단을 내려놓고 그분들을 바라보자, 저는 중요한 사실을 알았습니다. 그분들은 자기 자신의 연주와 연습에 만족하면서, 건반 위에서 해방된 듯 빛나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죠. 그분들의 연주는 남들이 정한 잣대가 아닌, 스스로 정한 내면의 만족이라는 기준에 이미 도달해 있었습니다.
‘이 부분이 오늘 연주되었으니 충분하다’
‘이 곡을 통해 오늘 하루의 스트레스가 녹아내렸어’
엄격한 기준이라는 채찍 대신, 자유라는 부드러운 손길로 자신을 어루만지고 있던 것이죠.
저는 그때서야 우리가 어떤 일의 목적 혹은 환성의 기준을 어디에 두는지에 따라, 그 일에 임하는 태도는 물론, 삶의 빛깔과 향기까지 완전히 달라진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나의 기준으로 상대방을 해석하려 했던 것이 얼마나 편협한 생각이었으며, 어쩌면 폭력적이었던 것 같아 미안함마저 생겼습니다.
이제 다른 연주자들의 연습 방식이나 연주를 저의 기준으로 재단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그들만의 호흡과 속도로 충실히 행복한 연주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득 픽사 애니메이션 <소울(Soul)>이 떠오릅니다. 주인공이 위대한 재즈 연주자라는 “거창한 불꽃(Spark)”를 찾으려 헤매지만, 결국 삶의 목적은 그저 걷고, 맛보고, 듣는 일상의 찰나 그 자체였던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피아노 건반 위에서, 혹은 인생이라는 무대 위에서, 너무 거대한 ‘완벽’만을 찾으려 애쓰지는 않는지 주변을 살펴봐야겠습니다.(특히, 저는 자녀를 대하는 태도에서 그러지 않는지 살펴볼 생각입니다)
제가 추구했던 완성도는 ‘타인의 박수’에 맞춘 것이었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이제 저의 연주는 ‘나의 평온’이라는 멜로디를 찾아보려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당신이 추구하는 완성도는 남들이 정한 최고의 수준이 아니라, 바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정하는 행복의 기준에 있을 것입니다. 당신의 삶이 당신의 리듬으로, 당신의 빛깔로 연주되길 바라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