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로 블랙홀을 만드는 도사님
지메르만의 피아노 리사이틀을 관람했다. 아니, 영접했다고 해야 할까.
먼저 공연에 앞서 우연히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지메르만의 공연 후기를 먼저 접했다.(아마, 다른 지역의 공연을 본 분의 글인 듯) 그분은 공연에 대해 다소 부정적으로 평가하였는데, 사진촬영 금지라든지 박수 제한과 같이 '피아니스트가 관객의 행동을 과도하게 제한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모양이다.
'얼마나 까탈스럽길래 그런 거지?'
팔랑귀인 나는 공연이 별로면 어쩌지? 피아니스트의 심기를 건드리면 어쩌지? 이런 걱정들을 안고 다소 불안한 마음과 함께 객석에 앉았다.
[마법사는 존재한다]
먼저, 공연에 앞서 피아니스트의 메시지가 있었다. 피아니스트는 작곡가와 관객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한다. 이 시간은 피아니스트와 관객의 프라이빗한 시간이다. 이런 소중한 시간을 SNS를 통해 공개한다는 것은 서로에 대한 배신이다. 대략 이런 내용들이었던 것 같다.
'과연 듣던 데로 예민하군!'
평소 공연을 보러 가도 사진을 남긴다거나, 인스타그램과 같은 공간에 (자랑하듯) 기록을 남기는 타입이 아니었기에 피아니스트의 메시지가 그렇게 거북하게 들리진 않았다.
잠깐의 시간이 흐른 뒤 무대로 지메르만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등장했다.
지메르만의 모습은 유튜브를 통해 봐 왔던지라 나의 머릿속엔 그의 젊은 시절 이미지가 대부분이었다. 갈색머리에 탄탄한 몸매의 모습이 머릿속에 있었는데, 무대에 등장한 그는 완전히 하얀 백발에 눈썹과 수염까지 새하얀 할아버지였다! 살짝 분홍빛의 그의 얼굴색이 아니었다면 피아노에 앉은 그의 모습이 흑백 TV라고 해도 믿었을 것이다.
그는 마치 어명이 적혀있을 법한 두루마리처럼 생긴 악보를 펼친 뒤 연주를 시작했다.
사실, 공연장에 살짝 늦게 도착한 덕분에 그가 무엇을 연주하는지 알지 못한 채로 관람을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오히려 그 점이 더 좋았다.(그의 공연은 '오마카세' 같이 연주자가 선택한 전주곡 24곡을 연주해 주는데, 공연 당일에 곡 리스트가 공개된다)
첫 번째 곡은 공연에 집중해 나가는 시간이었고, 그에 대한 불만 섞인 후기를 씻어내는 시간이었다. 문제는 두 번째 곡부터였는데, 바흐의 전주곡 1번 다장조 첫 세음을 듣자 정말 피아노 소리가 새벽녘 안개처럼 상쾌한 바람과 함께 온몸을 통과하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행복감에 눈물이 살짝 고이는 게 아닌가.
그 후로는 무대 중앙 지메르만을 중심으로 강력한 인력이 작용해 그대로 무대로 빨려들어 갔다. 그냥 홀려버렸고, 그 넓은 홀에서 피아니스트와 나 둘만의 시간이 만들어 졌다. 그가 무슨 곡을 연주하고 있는지는 그다지 중요한 문제가 되지 않았다. 피아니스트와 관객의 프라이빗한 경험은 이걸 말하는 것이었다.
그가 처음 무대에 등장했을 때 그의 백발을 보고, '산신령' 같다고 생각했었는데, 그는 정말 산신령이었고, 간달프였고, 덤블도어였다. 피아노로 이런 마법을 부릴 수 있다니... 그날의 감상을 제대로 표현하지 못하는 나의 글재주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