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0. 조성진 리사이틀(2)

피키소의 모습을 보다

by Double P

1. 팬이 아닌 관찰자가 발견한 '이야기'


솔직히 고백하자면, 나는 소위 말하는 조성진의 '열혈 팬'은 아니다. 그의 연주는 좋아하지만 조성진 개인에 대한 호불호는 없다. 그렇기에 이번 리사이틀에서는 오로지 그의 '연주'에만 몰입하는 것이 맞았을 테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공연이 진행될수록 내 머릿속엔 연주 너머 그가 건네는 '이야기'가 선명해졌다.


몇몇 곡에서는 피아니스트가 화자가 되어 메시지를 전하곤 한다. 쇼팽의 발라드 1번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날의 공연은 특정 곡이 아닌, 프로그램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서사시처럼 느껴졌다. 어릿광대를 자처한 그가 무대 위에서 자신의 세계관을 펼쳐 보이고 있었다.



2. 슈만이 던진 힌트: "변화"라는 예고장


그는 관객들에게 친절한 감상의 힌트를 남겼다. 바로 1부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슈만이었다. 제목 속 '광대'가 본인이라는 암시와 함께, 그가 던진 주제는 바로 **'변화'**였다.


시시각각 변하는 박자와 악장별 분위기. 베토벤을 경외하면서도 그 틀을 깨고 자신만의 스타일을 펼친 슈만의 변신. 조성진은 그러한 슈만과 같이 자신의 '다음'을 예고하고 있었다. "이제 저의 변화를 지켜봐 주세요"라고 말이다.



3. 쇼팽 왈츠 14곡: 변주의 향연


인터미션이 끝나고 2부, 쇼팽의 왈츠 14곡이 흐르기 시작하자 나의 추측은 확신이 되었다. 우리가 알던 '정석에 능한 조성진'과는 확연히 달랐다. 기존 레코딩에서는 들을 수 없었던 새로운 호흡, 과감한 루바토(Tempo Rubato), 그리고 예상치 못한 변주와 애드리브까지.


놀라운 것은 이 14개의 짧은 곡들이 하나의 완벽한 기승전결을 가진 대곡처럼 들렸다는 점이다. 다소 생경한 비유일지 모르나, 이상적으로 우상향하는 주식 차트 같았달까. 밝게 시작해 무거운 심연으로 침전했다가, 다시 에너지를 응축해 결국 제목 그대로 '브릴랑테(Brillante, 찬란하게)' 마무리되는 흐름. 그의 영리한 설계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4. 조성진, 피아노계의 피카소로의 여정


그동안 그는 헨델, 모차르트, 쇼팽, 드뷔시, 그리고 라벨에 이르기까지 피아노사의 이정표가 되는 곡들을 섭렵하며 자신의 기반을 다져왔다. 그리고 이제 그는 그 견고한 '정석'의 성벽에서 걸어 나와 자신만의 언어를 역사에 새기려 하고 있다.


이번 공연에서 문득 그와 피카소가 겹쳐 보였다. 어린 나이에 이미 선배 화가들의 화법을 마스터했던 피카소가 모방을 넘어 재해석과 변형을 통해 세기의 화가로 거듭났듯, 조성진 역시 그 위대한 도약을 시작한 것이 아닐까.


그동안 쌓아온 완벽한 스타일을 스스로 깨트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는 그 쉽지 않은 도전을 특유의 무덤덤한 표정으로 묵묵히 수행해 나가고 있었다. 그런 그를 어찌 응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 여정의 시작점에, 같은 공간과 같은 시간을 향유했다는 것이 나에게는 커다란 감동이었다.



5. 에필로그: 평온한 밤을 위한 배려


앙코르곡은 쇼팽의 <녹턴 Op.9-2>. 아마도 격정적인 변화의 시간을 함께 통과한 관객들이 평온한 밤을 맞이할 수 있도록 배려한 그만의 마지막 인사였으리라.


단 한 번의 감상으로 한 예술가의 커리어를 논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 공연을 통해 나는 비로소 그의 '팬'이 되었음을 고백한다. 정석이라는 안전한 길을 떠나 자신만의 지도를 그려나가는 그의 여정을 앞으로도 조용히, 그러나 뜨겁게 지켜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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