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여, 그대에게 자유를 허하노라
“선생님, 이 곡 연습해보고 싶어요. 멘델스존 ‘무언가’요. Op.67 No.2.”
말을 꺼낸 순간, 선생님의 입이 살짝 벌어지며 눈이 커졌다.
“그 곡, 제가 제일 좋아하는 곡이에요!”
그 말에 순간 마음이 뿌듯해졌다.
‘아, 이 선곡 센스 어쩌면 좋아.’
물론 친구의 추천이 먼저였지만, 자뻑의 영역에 양심을 기대하긴 어렵다.
하지만 곧 묘한 압박감이 따라왔다.
‘그렇게 좋아하시는 곡이라면… 실수 없이 잘 쳐야겠어.’
내가 그 곡을 망치면, 선생님의 기분까지 상하게 할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그건 선생님의 기대가 아니라 내가 스스로 만들어낸 부담감이었다.
(솔직히, 선생님이 나한테 큰 기대를 하고 있을 리가 없지 않나!)
나는 예전부터 실수와 실패에 예민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학창 시절에도 스타크래프트 같은 경쟁 게임은 꺼리고,
디아블로처럼 혼자 몰입할 수 있는 롤플레이 게임을 즐겨했다.
그 성향은 지금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다르게 말하면 지나치게 주변 눈치를 보는 편이다.
피아노를 연주할 때에도 틀리는 걸 무척 두려워한다. 자존감 전체가 흔들리는 듯한, 작은 붕괴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하지만 요즘은 조금 다른 시선을 가지려 한다. 실수는 불편하지만 그 또한 음악의 일부이고 내가 연주한 음이다. 한국어가 나의 모국어임에도 나는 맞춤법을 틀리고, 문법도 실수한다. 하지만 말을 멈추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피아노라는 언어에 막 입문한 내가 음 하나의 미끄러짐에 낙담하는 것은 어쩌면 건방진 일일지도 모른다. 그저 연주할 수 있음에 감사하고, 틀린 음을 다음엔 틀리지 않도록 부지런히 연습하면 그만이다.
이런 생각의 전환을 도와준 책이 있다.
케니 워너의 『완전한 연주』. 연주 불안을 겪는 사람들에게 전하는, 따뜻하면서도 뼈 있는 조언이 가득한 책이다. 글 가운데 지금도 마음속에 남아 있는 내용이 있다.
“관건은 내려놓는 것이다. 가장 먼저 내려놓아야 할 것은 바로, 연주를 잘하려는 강박적인 욕구이다.”
“과제곡이 편안해질 때까지 연습해야 한다. 시간을 들이는 일은 더디고 지루하게 느껴지지만,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성장의 길이다.”
처음엔 솔직히 ‘이건 나도 말하겠다’ 싶었다. 하지만 선배 연주자께서 직접 글을 써서까지 전하고 싶을 정도라면, 이건 그냥 예쁜 말이 아니라 삶에서 체득된 진실 아닐까?
연습일지에 이 글을 써두고 연습 때마다 이 말을 떠올렸다.
그리고 정말 신기하게도, 실수가 점점 **'문제'가 아니라 '자연스러운 과정'**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제야 나는 실수가 나의 한계가 아니라 그저 낯섦에서 오는 불편함임을 깨달았다.
꾸준한 연습은 그 낯섦을 익숙하게 만드는 시간이었다.
나는 마흔을 넘긴 나이에 살고 있지만, 그중 피아노와 함께한 시간은 고작 4~5년.
성인이 되어서 다시 시작한 기간은 1년도 되지 않는다. 그런데도 나는 완벽한 연주를 기대했다.
실수 없이, 멋지고 감동적으로. 게다가 별다른 노력 없이.
참으로 오만한 생각이었다. 그런 기대를 가졌다는 것 자체가 부끄럽기까지 하다.
그래서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실수해도 괜찮다. 언젠가 무대에 섰을 때 하는 실수는 용납해서는 안되지만, 지금은 익숙해지는 시간이니까 실수에 관대해지자. 실수에 자유를 부여하자.
그리고 음악은 실수투성이로 시작해서 하나하나 실수를 지워가는, 익숙해지는 모든 시간을 품은 이야기니까.
이 글을 쓰다가 무심코 연습일지를 펼쳐봤다.
‘무언가’를 처음 연습한 날짜는 5월 30일.
벌써 두 달 가까이 이 곡과 함께한 셈이다.
처음엔 얼마나 낯설었던지, 손가락은 더듬거렸고, 일주일 연습 후 선생님 앞에선 긴장으로 손끝이 얼었다.
‘이 곡을 내가 칠 수 있을까?’ 의심이 앞섰던 그 시간들이 떠올랐다.
하지만 두 달 동안 실수할 자유를 마음껏 누리고 나서야
이 곡과 조금 친해졌다는 느낌이 든다.
요즘은 한 음을 틀려도 그걸 지우려 애쓰기보다는, 그 음이 내게 묻는 질문에 조금 더 천천히 대답하려 한다.
“너의 소리를 조금 더 천천히 들려주지 않을래?” “한 번 다시 얘기해 줘.”
말 없는 노래(Song Without Words).
가사가 없었기에 오히려 나의 마음이 이 곡을 통해 더 선명히 느껴지는 듯하다.
고마워요, 멘델스존. 그대는 정말 천재가 맞습니다.
지금은 듣는 이 없지만, 솔직한 음으로 나의 마음을 전달하는 순간이 오리라 믿으며,
오늘도 피아노와 친해지려고 부단히 애써본다.
'밥은 먹었니, 피아노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