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다른 경험에 대해
난 누군가와 대화하는 것이 어렵게 느껴진다. 그 이유는 상대방과 나의 경험에 공통분모가 거의 없다는 것이 의식이 되어서 인 것 같다. 누구나 조금씩 다른 정도로 다 그걸 의식하며 살고 있겠지만...
내가 내 경험과 상대방의 경험이 다른 점들을 너무 크게 보고 있거나, 공통분모의 필요성에 너무 초점을 두고 있는 걸 수도 있지만, 또 마냥 그렇다기엔 또 다른 면, 실제적으로 대화를 어렵게 만드는 면이 있다.
상대방에게는 중대한 무언가가 상대방의 상황과 환경에 놓이지 않았던 나에게는 단지 “아, 저 사람에게는 중대하겠지”가 되는 게 의식된다. 나는 상대방과 똑같이 그 중대함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3인칭의 거리감을 가지고 바라보게 된다. 하지만 상대방은 1인칭의 “직접성”과 조급함이 있을 것이다. 그리고 난 그 사실을 알면서도 상대방이 “걷고 있는 길”에 동참할 수 없게 느껴진다. 마치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 선악과를 먹지 않은 사람을 보며 그 사람이 어떻게 세상을 보는지 상상은 되지만 동참하지 못하는 것처럼? 안 먹은 사람은 안 먹은 세계만을 알 것이고, 먹은 사람은 안 먹었을 적을 기억하고 또 안 먹은 사람이 지금 이렇겠구나 느끼겠지만 그의 세계를 이미 벗어난 것이라는 측면에서 말이다. 비유에서 돌아와 말하자면 그 둘의 세계 중 한 사람의 세계는 자신의 세계의 존재만을 알고 두 번째 사람의 세계는 둘 모두의 세계의 존재는 알지만 자신의 세계만을 알 수 있다는 걸 안다고 했을 때, 어떤 게 좋다는 것도 안 좋다는 것도 아니라 각자 얻는 게 있고 잃는 게 있다는 말이다. 각자가 가진 것은 가지고 있고 안 가진 것은 가질 수 없다는.
그렇다고 분명 공통분모가 없는 게 아니다. 사실 공통분모가 없는 분야는 겉치레적인 것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우리의 가슴을 울리게 하는 것들에 있어서는 우리가 다 인간이기에, 그래서 인간으로서의 공통된 경험들이 있기에 너도 그렇게 살고 있구나, 나도 그렇게 살고 있어 하는 더 근본적인 공통분모들이 있는 것 같다. 다른 사람들이 자신의 생각을 쓴 글들을 보면 개개인의 색체가 뚜렷이 보이면서도 너무 공감되고 신기할 정도로 나의 생각과 비슷한 걸 본다.
하지만 또 그 “겉치레적인 것들”이란 게 인생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어, 밥을 먹는 것, 지하철을 타는 것, 할 일 하는 것, 장 보는 것. 말을 겉치레적인 것이라 했지만 사실 내 뜻은 “평범하다, 일상적이다, 모두가 어떤 형식으로인가 해야 한다는 것에 있어서 공통적이다”이다. 우리가 진솔한 대화를 하거나, 누군가의 목숨을 살리거나, 대상을 타거나 하는 것과 같이 중요하게 느껴지지는 않고 인상적이지도 않다는 의미에서 겉치레적이라고 한 것이다. 그것들이 우리가 인생을 살 때에 있어서 어떤 형식이 됐든, 지하철 대신에 택시를 타든 걸어가든, 한식을 먹든 중식을 먹든, 그리고 수능 공부를 하든 악기 연습을 하든 회사 일을 하든, 필요하다. 그런데 그렇게 형식이 달라버릴 수가 있고, 형식이 달라버렸을 때 공통분모가 없는 것처럼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이렇게 느껴지는 갭을 어떻게 넘을 것인지 생각할 때 나는 “뻔당기”가 떠올랐다. “공통분모가 없다고 동참할 명분이 줄어든다고 생각하지 말고 뻔뻔하고 당당하고 기막히게 사람들에 관계에 있어서 달라붙자”는 의미에서. 나는 이렇게 마음을 먹지 않으면 달라붙지도 않고 오히려 예의 있게 거리를 두기 때문에, 나에게는 이게 유용한 것 같다.
모순적이게 들릴 순 있지만, 난 이 글을 누군가는 나와 경험이 다를 것이기 때문에 쓸 수 있었다. 엄마한테는 이미 알고 계시기 때문에 말할 필요가 없어서 이걸 굳이 말하지 않았을 거다. 분명 공통분모가 없는 것은 그 자체로 대화를 어렵게 하는 건 아닌 것 같다, 내가 너무 그런 걸 느끼고 있을 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