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란 산물, 나의 산물

by 장여결

요새 왜 이렇게 마음이 벅찬지 모르겠는데, 많이 벅차다. 꼭 안 좋은 의미로 벅찬 것이 아니고 오히려 안 벅찬 것보다 이것이 훨씬 마음에 들지만, 마음이 벅차면 그걸 느끼고 소화할 충분한 시간이 있었으면 좋겠다. 항상 뭔가를 앞질러가기보다 뭔가에 쫓기는 느낌이고, 당장 닥치는 걸 당장 맞닥뜨리며 숨이 ‘턱’ 차오르는 느낌이다. 또 엄청 그렇다는 게 아니라 (‘그 정도’라는 게 아니라), 종류가 그렇다는 것이다… 그리고 나만 이렇게 벅찬 게 아닌 걸 알지만 이건 나만의 문제이다 (개인적인 문제).


저번 학기 수업 (Literary Criticism 문학비평)을 듣던 중 글 쓰는 사람의 글이 개인적이면 안되고 굉장히 비개인적이어야 한다는 T.S. Eliot의 글을 읽고 그때 생각하던 흐름과 맞아 깊은 인상을 받았다. 그래, 일기는 (차인표 씨가 한 말을 빌리자면) 나중에 스스로가 읽기 위해 쓰는 거지, 하지만 다른 사람이 읽으라고 쓰는 글은 일기와 달라야지, 싶었다. 내가 쓰는 글, 브런치스토리에 올린 글도 너무 개인적인 어투/어휘라 누구도 알아듣지 못하고 누구에게도 도움이 안 될 것 같아서 고민하고 있던 터였다. 나에게 예술이란 인생의 어느 요소 자체를 내놓는 것이라기보다는 인생의 어느 요소를 꼭 승화한 것 같았기에, 이에 일맥상통하는 T.S. Eliot의 말이 epiphany 같았다.


그런데 계속 생각을 하는데, 자꾸 내가 글을 쓰려면 이 마지막 학기를 마치고 졸업하면 다른 나라들을 여행해야겠다, 새로운 경험을 하고 눈을 이름다운 광경들로 가득 채워야겠다 (또 그래야 한다) 싶은 것이다. 그런 경험이 글의 자원이 되기 때문에. 이전에도 다른 경험이 부족하다는 점이 나의 한계로 느껴져 왔기에 대학에 오려고 했고, 작년 영국에서 보낸 한 학기는 더더욱 세상이 나보다 넓다는 사실을 알려주었다. 더 이전으로 거슬러 오르자면 내가 어려서 영국에서 생활했던 것이 몇 년 전까지만 해도 내 자원이었다. 이제는 기억이 많이 흐려지고 한 곳에 정착/정채 되면서 소모가 됐지만, 그때는 그래서 그렇게 상상력이 풍부할 수 있었고, 자연을 묘사하려는데 머릿속이 하얗지 않았다.


이번 학기에는 C.S. Lewis의 글이 와닿았다. “I am a product of long corridors, empty sunlit rooms, upstairs indoor silences, attics explored in solitude, distant noises of gurgling cisterns and pipes” (나는 기다란 복도와 햇살이 비치는 빈 방들, 실내의 고요함, 홀로 여행한 다락방, 수조와 파이프를 통해 들려오는 물소리의 산물이다 - Surprised by Joy 예기치 못한 기쁨 중). 자신의 어릴 적 집을 묘사한 문장이다. 꼭 어릴 적일 필요는 없겠지만 그에게는 그때가 자신을 만드는 중요한 시간이었다. (내 친구 한 명은 아마도 그런 시기가 고등학교 때가 아닐까 싶다. 자꾸 그때가 생각난다고 한다.)


당신의 인생이, 당신의 개인성만이 쓸 수 있는 글이 분명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글에서 말끔히 빼낼 것도 아니고 억지로 가미할 것도 아닌, 어쩔 수 없이 배어 나오는 것이라고. 어쩔 수 없다 했지만, 어쩔 수 없는 것 치고 굉장한 가치가 있는 것 같다.


물론, 그 개인성을 예술/문학/글로 승화시키는 것이 좋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승화시키지 못하더라도, 또 지극히 개인적이더라고 그것은 그렇게 큰 하자가 되지 않을 것 같다. 더 큰 하자가 되는 건 새로운 할 말이 없는 것, 생각이 없는 것, 그저 무의미하게 말만 늘어뜨리는 것이 아닐까? (결국 글 자체도 잘 써야 잘 쓴 글이지만, 가장 순수한 내용 면에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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