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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밤, 최 과장에게 잡혀 공장장 집까지 끌려갔다. 퇴근하던 최 과장이 어? 용 사원 차잖아, 하면서 다가왔고, 차창으로 얼굴을 불쑥 들이밀어서는 나를 기겁하게 했고, 그렇게 혼이 빠진 나를 차에서 강제로 끌어내렸다. 완력으로 내가 이길 수 있는 상대가 아니었다. 반항하기를 포기한 나를 최 과장이 자신의 차 안으로 패대기치듯 밀어 넣었다. 가는 도중에 슈퍼에 들러 막걸리와 소주를 샀다. 최 과장이 말한, 공장장의 집으로 술 마시러 가는 이유는 단 하나였다. 진짜 이유는 나중에 밝혀졌지만.
“그 집 음식이 맛있어. 아주머니 손맛이 아주 일품이야.”
공장장과 최 과장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나를 도마 위에 올려놓고 멋대로 찌르고 자르고 끊어냈다가 붙였다가 했다. 하지만 나는 여느 때와 달리 반응하지 않았다. 아무런 흥이 나지 않았고 쉴 새 없이 떠들어대는 수다 또한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집요하게 묻는 최 과장에게는 이렇게 말했다.
“다 끝났어요.”
그 뒤로도 최 과장의 질문과 수다가 계속됐는데 다른 건 기억나지 않고 무슨 법칙 어쩌고 하는 얘기만 간간이 생각났다.
“용 사원 0, 34, 4 법칙이라고 알아?”
최 과장이 물었지만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현자가 한 명 있어. 이 사람이 가는 곳마다 사람들이 동전을 건네. 좋은 일에 써달라고. 일종의 기부지. 위탁 기부. 현자는 한곳에 머물지 않고 세상을 돌아다니니까 좋은 일을 할 기회가 많을 거라고 생각했지. 그런데 왜 다들 동전을 건네느냐면 현자가 지폐는 안 받는다고 했거든. 무리하지 말라는 뜻이지. 사람들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이기도 하고. 의도는 가상한데 여기엔 한 가지 단점이 있어. 바로 동전의 무게야. 지폐보다 가치는 떨어지면서 지폐보다 수십 배는 무거운 게 동전이지.”
공장장이 호로록 소리를 내며 막걸리를 마셨다. 최 과장은 개의치 않고 얘기를 계속했다.
“동전의 무게 때문에 더 이상 걷기가 힘들어지면 현자는 망설임 없이 동전을 모두 꺼내서는 다른 사람에게 맡기는 거야. 길 위에서 만난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목적지에 도착하면 사람을 보내 찾아가겠다, 그러니 그때까지만 맡아달라고 말하면서. 그러고는 또 유유히 길을 나서지. 방향이 같아서 우연히 현자와 동행하게 된 여행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현자에게 이렇게 물어. ‘저 사람을 아십니까?’ 현자가 대답해. ‘모릅니다.’ 여행자가 또 물어. ‘오늘 처음 본 사람인데 뭘 믿고 동전을 맡기십니까?’ 그러자 현자가 대답하지. ‘저는 저 사람을 믿지 않습니다.’ 의외의 대답에 여행자가 깜짝 놀라서 ‘그런데 왜 동전을 맡긴 겁니까?’ 다시 물어. 현자가 대답하지. ‘저는 처음에 0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중간에 34였다가 지금은 4입니다.’ ‘그래서요?’ ‘제게 중요한 것은 지금 제가 4를 가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가만히 생각하던 여행자가 결국 고개를 갸웃거리며 이렇게 말하지. ‘그게 무슨 뜻인지 도통 모르겠습니다.’ 그러자 현자가 대답해. ‘저는 지금 과거에 얽매이지 않기를 실천하는 중입니다.’ 그 말을 곰곰이 생각하던 여행자가 마침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하지. ‘현자님 덕분에 큰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침묵이 흘렀다. 공장장은 막걸리를 마셨고, 최 과장은 소주를 마셨다. 어느새 솔깃해진 내가 이어질 말을 기다렸으나 최 과장은 묵묵히 소주만 마실 뿐이었다.
“이게 끝이에요?”
기다리다 못한 내가 물었다. 응, 최 과장이 대답했다.
“이게 무슨 뜻인데요?”
또 내가 물었다. 최 과장이 소주 한 잔을 더 마신 뒤 대답했다.
“과거에 얽매이는 것만큼 어리석은 건 없다는 뜻이지.”
“이게 어디 나오는데요?”
내가 다시 물었다.
“어젯밤에 꾼 꿈이야. 현자가 내 꿈속으로 찾아와서는 큰 깨달음을 줬어.”
“과거에 많이 연연하는 편이세요?”
“나 말고 용 사원 자네 말이야. 과거는 잊고 그냥 우리랑 같이 일하는 건 어때? 잘 지냈잖아, 우리. 트랜스미션 15만 대 추가 생산 성공하고 축배 들던 때를 생각해봐. 그때의 그 희열, 감동, 성취감. 얼마나 소중해. 기뻐서 서로 얼싸안고 건배하고 노래도 불렀잖아. 아무 데서나 그런 벅찬 감정 못 느낀다고.”
최 과장이 자신의 잔에 자작으로 술을 따랐다.
“벌써 소주를 두 병이나 드셨어요.”
“과거에 얽매이지 말라고 했는데 또 이러네. 소주 두 병은 이미 과거고, 매 순간, 한 잔 한 잔을, 처음인 것처럼.”
“소주 많이 드시려고 별 법칙을 다 궁리해내셨네요.”
“나 말고 자네를 위해서라니까.”
그런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지만 성과도 있었다. 최 과장의 승낙을 받아낸 것. 이중장부에 관한.
이중장부
경비조차 꾸벅꾸벅 조는 야심한 시각, 최 과장과 나는 평택 공장 담을 넘었다. 혹시나 담벼락에 센서 같은 게 부착되어서 손이 닿자마자 번쩍번쩍 경광등이 켜지거나 사이렌이 울릴지도 모른다고 걱정했지만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다. 어이없을 정도로 손쉽게 우리는 공장 안으로 잠입했다. 역시 최 과장의 말처럼 공장은 공장일 뿐 아무리 많은 비밀을 품었다 하더라도 비밀연구소급 대우는 받지 못했다.
우리는 공장 마당 여기저기 쌓인 원료 더미에 몸을 숨기며 조금씩 사무실이 있는 건물을 향해 나아갔다. 최 과장의 부탁을 받은 고 주임이 마지막 호의라며 공장 약도를 그려 팩스로 보내주었다. 이 친구 서울로 쫓아버리고 자네 스카우트하려고 내가 이 지랄을 하는 거잖아. 최 과장은 미안함을 그런 너스레로 대신했다.
야심한 시각에도 기계는 쉬지 않고 돌아갔다. 가끔 야간 근무자가 하품을 하며 우리 눈앞을 지나가기도 했다. 어둠 속 저 멀리 반딧불처럼 반짝이는 것은 흡연자가 피우는 담뱃불이었다. 최 과장이 앞장서고 내가 뒤를 따랐다. 출발하기 전 최 과장은 쇠붙이에 걸려 넘어질 수 있으니 발밑을 잘 보라고 주의를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는 조심한다고 했는데도 뭔가에 걸려 두 번이나 넘어질 뻔했다. 그때마다 최 과장은 움직임을 멈추고 주위를 살폈다.
마침내 사무실이 있는 건물에 도착했다. 우리는 재빨리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자판기 뒤에 몸을 숨겼다. 여기서 기다려, 최 과장이 말했다. 마치 이 공장 직원이기라도 한 듯 최 과장이 자판기 앞으로 가더니 하품을 하며 커피 한 잔을 뽑았다. 그러고는 커피를 들고 태연하게 사무실로 갔다. 잠시 후 최 과장이 손짓으로 나를 불렀다. 사무실에는 아무도 없었다. 새벽 네 시, 사람이 가장 피곤을 느끼는 시간이라고 했다. 그 시간쯤이면 당직자도 자러 가고 없을걸. 최 과장의 예상이 들어맞았다.
사무실로 들어간 뒤에는 곧장 공장장실로 갔다. 거기 구석에 고 주임이 말한 철제 캐비닛이 있었다. 낡고 오래돼서, 게다가 발로 차였는지 옆구리가 찌그러지기까지 한, 그 안에 그토록 중요한 장부가 있으리라고는 누구도 상상하지 못할, 캐비닛이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그런 캐비닛이, 고 주임의 말처럼 공장장실 구석에 버젓이 있었다. 캐비닛 위는 먼지까지 쌓여서 오래전에 버렸어야 하지만 깜빡 잊었거나 혹은 귀찮아서 그냥 놓아둔 고물처럼 보이기도 했다.
“정말 캐비닛 맞아? 저 금고 아니고?”
최 과장이 또 다른 구석의 금고를 가리켰다. 오래된 물건이지만, 아니 그래서 오히려 더 육중하고 견고해 보이는 금고. 주인이 아니면 절대 내 속을 보여주지 않겠다, 온몸으로 말하는 듯한.
“아! 내가 잘못 들은 건가…….”
그쯤 되니 나도 헷갈렸다. 금고를 보기 전까지는 캐비닛이라고 확신했는데, 금고를 보는 순간 내가 잘못 들은 게 아닌가, 혹은 고 주임이 경리부 직원으로부터 잘못 들은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그만큼 금고는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그런 금고를 두고 캐비닛에 장부를 보관한다는 건 어쩐지 어리석어 보이기까지 했다. 최 과장이 금고 쪽으로 가서 손잡이를 당겨보더니 이거 잠겼네? 하고 당연한 소리를 했다.
“어떡하지? 이 금고가 맞는 것 같은데…….”
최 과장은 금고에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하지만 캐비닛이라 굳게 믿고 드라이버 하나 달랑 챙겨 들어온 우리로서는 금고를 상대할 방법이 없었다.
“우선 캐비닛이라도 열어보죠.”
“어쩔 수 없지.”
최 과장이 작업복 안주머니에서 드라이버를 꺼내 캐비닛 문 사이에 끼우더니 힘껏 비틀었다.
“내 별명이 최가이버야. 만능 해결사 맥가이버 알지? 잘 봐.”
최 과장이 나를 보며 으스댔다. 하지만 문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최 과장이 다시 문 사이에 드라이버를 끼워 힘껏 비틀었다.
“맥가이버는 주로 머리를 쓰던데…….”
“머리 쓸 데 있고 힘 쓸 데 따로 있는 법. 이까짓 갖다 버려도 시원찮을 캐비닛에 머리는 과분하지.”
한 번 더, 다시 한 번 더 비틀고 또 비틀었다. 이까짓 갖다 버려도 시원찮을 캐비닛 때문에 최 과장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드라이버로 되는 거 맞아요?”
그 순간 캐비닛 문이 열렸다. 되잖아, 최 과장이 우쭐해하며 말했다.
모두 다섯 칸이었다. 칸마다 서류며 장부들이 수북이 쌓여 있었다. 애걔? 기대도 안 했으면서 최 과장은 실망한 표정이 역력했다. 우리 헛다리 짚은 거 같은데, 아직 찾아보지도 않았으면서 미리 포기하고 있었다.
“설마 이 캐비닛 안에 우리가 찾는 장부만 있을 거라고 생각하셨어요?”
“그럼 아냐?”
“여기 좀 보세요. 서류들 위에 먼지 쌓인 거 보이시죠? 그런데 맨 아래 칸은 먼지가 없어요. 게다가 다른 칸은 서류와 장부들이 뒤죽박죽으로 섞여 있는데 맨 아래 칸만 서류뿐이에요.”
“그게 왜?”
대답하는 대신 맨 아래 칸에 쌓인 서류들을 꺼내기 시작했다. 모두 네 덩이였다. 바닥에 나란히 놓았다. 그런 다음 한 덩이씩 발로 차서 쓰러뜨렸다. 여전히 미심쩍은 표정이면서도 최 과장은 내가 하는 대로 내버려두었다. 네 번째 덩이에서 장부가 나왔다. 흐트러진 서류들 사이에서 두꺼운 종이 재질의 검정색 표지 두 개가 삐죽 튀어나왔다. 오우오, 최 과장이 기괴한 소리를 내며 감탄했다.
표지에는 아무것도 쓰여 있지 않았다. 그래도 우리가 찾는 물건이 맞는다는 건 최 과장이 확인해주었다.
“허구한 날 들여다보는 건데 딱 보면 알지. 하나는 자금 조성 내역이고 하나는 상납 내역인 것 같은데?”
“누구예요? 상납한 사람.”
“글쎄, 이니셜로 적혀 있네.”
우리는 서둘러 흐트러진 서류들을 정리한 뒤 원래대로 캐비닛에 넣고 문을 닫았다. 그런 다음 공장장실을 빠져나왔다. 하늘 한쪽이 희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고, 차에 탄 뒤에야 최 과장이 긴 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장부가 맨 아래 칸에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나는 차를 출발시켰다. 새벽 시간이어서 그런지 아니면 도시 외곽이어서 그런지 신호등마다 노랑 초록 빨강이 모두 붉은빛을 내며 깜빡거리고 있었다.
“서류요. 먼지도 그렇지만 맨 아래 칸만 서류뿐이었잖아요. 필요할 때마다 꺼내야 했을 테니 다른 장부와 섞어놓을 수가 없었겠죠. 그러면 찾는 데 시간이 걸릴 테니까.”
“나 여기 있소, 아주 광고를 했네.”
“그 광고도 못 알아본 사람이 누구일까요?”
“아이쿠, 피곤하다. 나 지금부터 잘 테니까 깨우지 마.”
내가 알아내지 않았어도 시간 차이일 뿐 결국 최 과장이 그 트릭을 읽어냈을 것이다. 그만큼 캐비닛 안의 트릭은 단순하고 허술했다. 방심했겠지. 비밀요새 같은 금고를 두고 낡고 찌그러진 캐비닛을 털 거라고는 생각 못 했을 테니까. 고 주임의 언질이 없었다면 나 역시 금고를 의심했을 게 틀림없었다. 유유히 도망치는 지금까지도 어떻게든 금고를 열어보겠다고 온갖 방법을 다 쓰는 중이겠지. 초조함에 속이 바짝 타들어가면서도.
“참 구질구질하게도 해먹었네. 이럴 때 보면 제 버릇 개 못 준다는 말이 맞다니까요.”
장부를 들여다보던 최 과장이 말했다. 최 과장은 자금 조성 내역이 담긴 장부를, 공장장은 상납 내역이 적힌 장부를 보고 있었다.
“노후 설비 교체할 비용까지 가로챘어, 이 죽일 놈이.”
최 과장이 연신 투덜거렸다. 공장장은 묵묵히 페이지만 넘겼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최 과장의 말에 의하면 아주 대놓고 돈을 빼돌렸다는데, 그렇다면 왜 사장은 가만히 있는 걸까. 혹은 모르는 걸까. 의문은 금방 풀렸다. 최 과장이 다시 투덜거렸다.
“사장이 공장 운영에 관여 안 한다더니 아주 제 마음대로 주물럭거렸네. 이래서 사람 보는 눈이 있어야 한다니까. 맡길 사람한테 맡겨야지, 이건 뭐 고양이한테 생선가게 맡긴 거랑 다를 게 없네.”
“저기, 그런데 이 장부들로 불량 원인을 밝혀낼 수 있을까요?”
내 관심사는 오로지 그것뿐이었다. 불량 원인이 평택 공장에 있다는 걸 밝혀내서 내가 내 자리로 돌아가는 것. 그것이 아니라면 고양이가 생선가게를 보든 말든 내 알 바 아니었다. 어떤 대답이 나올지 잔뜩 긴장하며 공장장과 최 과장을 번갈아 살폈지만 두 사람 다 말이 없었다. 내가 다시, 꼭 그래야 하는데……, 그랬으면 좋겠는데……, 중얼거려봐도 마찬가지였다. 나는 두 사람의 관심 밖에 있었다.
“J가 누굴까요?”
최 과장이 고개를 쭉 빼서 공장장 손에 들린 장부를 넘겨다보며 물었다. 상납은 주로 J에게 행해지고 있었다. K나 C가 등장하기도 했지만 그건 모래사장에 박힌 유리 조각 수준에 불과했다. 한두 줄을 제외하곤 페이지마다 온통 J로 채워져 있었다. 몇 년에 걸쳐 J에게로 백 단위, 혹은 천 단위의 돈이 흘러갔다.
미래모빌스 사람이겠죠? 최 과장이 묻자 그제야 공장장이 음, 하는 신음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왜요? 묻고, 최 과장이 한심하다는 듯 나를 돌아보며 혀를 차고, 그와 동시에 공장장이 장부를 덮고 물을 마셨다. 왜요? 최 과장이 혀를 차기만 할 뿐 대답을 하지 않아서 한 번 더 물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건 침묵뿐이었다. 잠시 후,
“누굴까요?”
최 과장이 공장장에게 묻고,
“정은신.”
컵에 물을 따르며 무심하게 툭, 공장장이 던졌다.
“네?”
나도 모르게 목소리가 커졌다.
“J라면 다른 성도 많잖아요. 전 장 조 주 진…… 성이 아닐 수도 있고요.”
정 부장을 편들기 위해서 한 말은 아니었다. 다만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가 궁금했다. 이번에도 왜요? 라고 물었다간 혀 차는 소리만 돌아올 것 같아서 방법을 바꾸었을 뿐이었다. 하지만,
“확신하세요?”
최 과장이 다시 공장장에게 묻고,
“아마도.”
망설이지도 않고 공장장이 대답했다. 나는 또 무시당했다. 내가 모르는 뭔가를 두 사람이 공유하는 듯한데, 평소에는 알아서 잘도 상대해주더니 오늘은 묻는 말에조차 대답하지 않았다. 궁금해서 죽을 것 같았지만 일단은 두 사람을 지켜보기로 했다. 이번에도 최 과장이 먼저 말을 꺼냈다.
“안 이사도 관련되었을까요?”
(안 이사?)
“정이 그쪽 사람이라고 했지?”
“입사 때부터 쭉 그랬죠. 그래서 유난히 승진도 빨랐잖아요.”
“그렇구먼. 이제야 아귀가 맞네.”
“그렇죠? 부장 혼자 감당하기에는 덩어리가 너무 커요.”
(아! 안 이사까지!)
“이제 어떡하죠?”
(어떡하긴 뭘 어떡해요? 경찰서에 가서 신고해야죠!)
“글쎄.”
(대답이 뭐가 이래요? 물증도 있겠다, 지금 당장 가서 조사해달라고 하자구요!)
“안 이사 때문이에요?”
“그것도 있고.”
(안 이사가 왜요? 이렇게 증거까지 확보했는데 안 이사가 뭘 할 수 있다고요.)
“회사 걱정돼서요?”
“꼭 그렇다기보다는.”
(무슨 대화가 이 모양이지?)
“먼저 만나봐야 할까요?”
“아무래도.”
(누구를요?) 이 선문답 같은 대화 때문에 나는 답답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지난번처럼 흐지부지 끝나는 건 아니겠죠?”
“이번엔 다르겠지.”
“안 이사까지 갈 수 있을까요?”
“그렇게 만들어야겠지.”
“이 천방지축은 어떡하실 거예요?”
“돌려보내야지 뭐.”
귀가 번쩍 뜨였다. 참견하지 말자고 결심한 것도 잊고서 내가 얼른 끼어들었다.
“저요? 저 말씀하신 거예요? 저 돌려보낸다고요?”
하지만 두 사람은 내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다만 최 과장이 이렇게 투덜거렸을 뿐이었다. 제가 천방지축인 건 아네. 그 순간 나는 폭발했다. 참는 것도 한계가 있고, 인내심에도 바닥이라는 게 있다. 제발 혼자 내버려뒀으면 할 때는 징글맞게도 데리고 놀더니 정작 내가 필요로 할 때는 냉정하게 외면하는 심보들이 얄미웠다. 여기서 더 참는다는 건 내가 바보라고 인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말씀해주세요. 네? 이걸로 제 무죄 밝힐 수 있는 거예요? 불량 책임이 평택 공장에 있다는 걸 증명할 수 있냐고요? 저한테는 횡령보다 불량 문제가 더 중요해요. 혹시 횡령하고 불량이 서로 연결돼 있나요? 그런 거예요? 저는 이제 어떻게 될까요? 제발 말씀 좀 해주세요. 제발요.”
최 과장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날 나는 그보다 더할 수 없을 정도로 ‘징징’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