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온한 당신

by 모카모카

출발해야 할 시간, +∞


목 대리에게서 연락이 왔다. 전화벨 소리에 깬 나는 급히 물 한 잔을 마신 뒤 큼큼, 헛기침을 해 목소리를 가다듬었다. 목 대리가 어디야? 묻더니 아 참, 회사겠군, 혼잣말했다. 나는 비밀 휴가 중이라고 굳이 정정하지 않았다. 목 대리는 믿을 만한 사람이지만 정 부장의 유도심문을 능란하게 빠져나갈 만큼 노련하지는 않았다.

“얘기 들었어?”

목 대리가 말했다.

“응? 무슨 얘기?”

“부장 처남, 죽었대.”

목 대리의 목소리는 나보다 더 조심스러웠다.

“부장? 정 부장?”

“우리한테 정 부장 말고 또 무슨 부장이 있어?”

“아아 참, 그렇지. 멀리 떨어져 있으니까 정 부장 존재도 잊어버리게 되네.”

이해해, 목 대리가 말했다.

“그런데 죽었어? 왜?”

내가 물었다. 정 부장에게 처남은 한 명뿐이었고, 내가 4월 중순쯤에 만난 그 사람이었다.

“교통사고래. 이송 중에 사망.”

그 순간의 나는 부장의 처남이 본인 회사의 사망보험을 들었는지 어쩐지 그런 것이 궁금했다. 사람이 죽었다는데 어쩌면 이렇게 무덤덤할 수 있는지 나 스스로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이제 나는 냉혈한이 되었나?

“올 거지?”

목 대리가 말했고, 어디? 내가 물었다.

“빈소.”

“처남? 거길 내가 왜?”

“부장 보러. 오늘내일 중으로 들러. 이틀 다 와서 일 거들면 더 좋고. 마지막 날은 아침 일찍 발인할 거래.”

“그러니까 거길 내가 왜?”

목 대리가 푹, 한숨을 쉬었다.

“부장이 소문난 애처가잖아. 그래서 직원들하고 처남 연결해준 거고. 이번 기회에 점수 좀 따야지.”

내가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자 목 대리가 또 한숨을 쉬었다.

“많이 바빠? 그럼 잠깐이라도 들렀다 가.”

여전히 나는 대꾸하지 않았다.

“여기 직원들 벌써부터 밤샐 준비해. 그것도 이틀이나. 낮엔 회사에, 밤엔 빈소에.”

“자네도?”

그제야 내가 물었다. 당연하지, 목 대리가 대답했다. 당연하지, 하는 그 목소리가 너무나 당당해서 나는 또 아무런 말을 하지 못했다. 이런 말 해도 될지 모르겠는데……, 목 대리가 주저하며 말을 꺼냈다.

“지난번에 자네가 보험만 들었어도…… 그랬으면…… 어쩌면 안 잘릴 수도 있……. 그 처남이라는 사람이 자네한테 약 올라했다는 말도 있고…….”

“누가 그래?”

내가 묻자 또 목 대리가 주저주저하며 어렵게 말을 꺼냈다.

“강 대리…… 아니, 자네 자리 차지한 그 신입……. 자기도 누구 통해서 들었다는데…… 일리가 있는 것 같기도 하고……. 굳이 직급까지 사원으로 강등시킬 필요는 없었잖아. 애초에 불량이 자네한테 책임 물을 사항도 아니었고.”

“더러운 세상이네.”

“응, 더러운 세상이야. 그러니까 같이 더러워져야지.”

이제 와서 조문을 간들 무슨 소용이 있을까. 나는 회의적이었다. 나한테 약 올라했다는 당사자도 이미 죽고 없는 마당에. 징계를 번복할 것도 아니고.

“보험이지. 미래를 위해서 드는 보험. 그런 면에서 부장만큼 확실한 보험도 없어.”

“…….”

“자네 혹시 그거 알아? 부장 말이야, 자기 사람 아닌 사람, 상벌이 확실하다는 거. 지금 잘해놓으면 반드시 자네한테 득이 되어 돌아올 거야. 내가 장담해.”

“아, 그렇군……. 생각해볼게. 지금 근무 중이라.”

일단 그렇게 말했다. 갈지 말지는 좀 더 고민을 해봐야 할 것 같았다. 어느 쪽으로도 흔쾌히 마음이 정해지지 않았다.

“아, 그래. 생각해봐야지. 잘 생각해보고, 퇴근하는 대로 곧장 올라와. 그렇게 해도 여기 직원들보다는 늦을 테니까. 장례식장 주소는 카톡으로 보내줄게.”

“어쨌든 고마워. 자네가 있어서 든든하네.”

“입사 동기끼리 챙겨야지. 참, 거기는 지낼 만해?”

“응, 뭐, 그럭저럭.”

“내가 괜한 걸 물었네. 그럼 이따 봐.”

전화가 끊겼다. 나는 다시 자리에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았다. 잠시 멈췄던 에어컨이 다시 가동되는 소리가 들렸다. 코딱지만 한 원룸, 에어컨이라도 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만기를 향해 나아가던 적금 통장은 해약했다. 그 돈으로 월세를 내고 밥을 먹고 기름을 샀다. 다음 달에도 그 돈으로 월세를 내고 밥을 먹고 기름을 사야 했다.

결정의 시간까지는 열흘가량 남았다. 이직할 것인가, 아니면 남을 것인가. 오늘 이전의 나는 이직 쪽에 마음이 기울어 있었다. 똑같이 박봉의 용 사원으로 살아갈 바에야 이 회사가 아닌 다른 회사에서 새로 시작하자는 마음이었다. 그럴 경우 자존심도 챙기고 전공도 살릴 수 있다. 불안 요소는 재취업의 가능성이 불투명하다는 것.

남을 경우에는 그럭저럭 월급을 받으며 살 수 있다. 살 수는 있다. 하지만 평생 생산직 근로자로 살아가야 한다. 그동안 공부한 세월이 몇 년인가. 들인 돈과 노력이 얼마인가. 내가 흘린 땀, 쏟은 코피, 나도 모르게 툭 터져 나오곤 하던 눈물. 부모님께는, 또 친척들에게는 뭐라고 설명하나. 업계 1위 미래모빌스. 자동차 부품에 있어서만큼은 대기업과 경쟁해도 지지 않을 규모. 우리 아들은 외국으로만 출장 다니잖아. 내가 회사에서 어떤 대접을 받는지도 모르고 마냥 좋아하던 부모님. 부모님께 차마 징계 내용을 말할 수 없었다. 이직 쪽으로 마음이 기운 결정적인 이유였다.

그런데 오늘, 변수가 생겼다. 무릎을 꿇기만 하면, 다들 그렇게 살지 않나, 그동안 다들 부장의 대리운전 기사로, 심부름꾼으로, 부장 집안의 일꾼으로, 꼭두각시로 살아오지 않았나, 부장의 처남에게 몇 개씩 보험을 들지 않았나, 그들처럼 살기만 하면, 목 대리가 지침을 줄 것이다, 오늘처럼, 나는 시키는 대로만 하면 된다, 우선 오늘부터, 다음엔 경조사…… 참, 부장의 생일이 몇 월이더라?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열심히 생각했다. ‘상벌이 확실하다는 거.’ 목 대리의 목소리가 에어컨 바람을 타고 온 방 안을 휘저으며 왱왱댔다. 가장 유혹적인 말. 어쩌면 이 진창에서 벗어날 유일한 길.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복직만 확실하다면, 그렇다면……. 1년? 2년? 복직에 얼마나 걸릴까? 그것도 내가 어떻게 하느냐에 달린 것일까? 목 대리에게 전화해서 물어봐야 하나?

나는 쿠션을 여러 개 받치고 기대앉은 채 천장을 보며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고민하는 척했지만 이미 결정이 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는 곧 일어나 온몸을 깨끗하게 씻을 것이고, 검은 양복을 찾아 입을 것이고, 목 대리가 보내준 주소로 출발할 것이다. 주차 사정이 어려울지도 모르니 아마도 택시를 이용할 것이다. 물론 출발하기 전에 밥부터 든든히 먹을 것이고, 혹 부장이 내쫓더라도 버틸 것이다. 장례식장을 시끄럽게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심하게 쫓지는 못할 것이다. 시늉만 하겠지. 고개 숙이고 버티기만 하면 된다. 누구보다 열심히 밥과 육개장을 나르고, 안주와 술도 떨어지는 일 없이 대령할 것이다. 입구가 어수선할 테니 신발 정리는 기본. 그러면서 밤을 새면 된다. 잘 샐 자신도 있다. 오늘도 어제도 그제도 넘치도록 잤다. 열 시간씩 잤다. 이럴 줄 알고 그랬나? 그동안 충분히 잤으니 이틀 밤새는 건 일도 아니다…….

전화벨이 울렸다. 진작부터 전화벨이 울리고 있었다. 어찌나 생각에 집중했는지 전화벨이 울리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그 때문에 최 과장의 혈압이 터지기 직전까지 올랐다.

“전화 안 받고 뭐 해!”

나는 전화가 오는 줄 몰랐다고 둘러댔다. 잤어? 지금까지 잔 거야? 어디야? 최 과장의 연이은 물음에 주눅이 들어서 집…… 하고 중얼거렸다. 그러자 최 과장이 갑자기 목소리를 낮추더니 소곤거리듯 말했다.

“어떤 여자가 용 사원 찾아왔는데 뭐라고 말해야 하지? 휴가는 우리끼리 비밀인데…… 병가라고 해야 하나, 잠시 어디 갔다고 해야 하나……. 그런데 저 여자 정체가 뭘까? 혹시 본사 직원? 실제로 자네가 근무하는지 확인하려고 온 건가?”

벌떡 일어나 앉았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아, 빌어먹을, 제기랄, 제기랄, 제기랄.) 이제 겨우 바짝 엎드리기로 결심했는데, 이제 겨우 마음먹었는데, 한번 실천해보지도 못하고 잘리게 생긴 건가. 본사 직원이라면 틀림없이 부장이 보냈을 것이다. 의심 많은 부장이. 혹시 지난번에 집으로 찾아갔을 때 인터폰 모니터로 내 얼굴을 본 것인가. 최 과장 뒤에 멀찍이 떨어져 있어서 못 봤을 거라 생각했는데……. 혹시 자동차 낙서에 대한 보복?

“아이 참, 뭐라고 해야 하냐니까!”

최 과장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는 얼른 정신을 차렸다.

“지금 어디 있어요? 저 찾는 사람.”

“여기 사무실에. 직원이 자네 찾는다고 사무실로 데려왔기에 일단 기다리시라 말하고 난 밖으로 나왔지. 자네 어디 있는지 찾아본다고.”

부장이 보낸 여직원이라면 해외영업팀에 최와 윤, 국내영업팀에 유와 김 그리고 한, 이 중 한 명일 것이다. 혹 관리팀이라면 가장 고참인 박?

“이름이 뭐래요? 혹시 물어보셨어요?”

“물어봤지. 현…… 뭐라더라? 성은 말 안 하고 이름만 얘기했는데. 아, 이 돌대가리! 현 뭐라고 했는데 생각이 안 나네.”

현? 현이라고? 설마……. 설마!

“현……조?”

“아, 그래! 맞아! 현조! 현조라고 한 것 같아.”

진짜 현조라고? 현조가 나를 찾아 천안까지 갔다고? 연락도 없이 왜? 내가 천안에 있다는 건 어떻게 알고? 마음이 급해졌다.

“저 왜 찾는대요? 왜요? 그것도 물어보셨어요?”

“안 물어봤어. 급해서 물어볼 틈도 없었고. 본사 직원이면 뻔하지 뭐.”

“본사 직원 아니에요, 현조.”

“그럼 누구야?”

“나중에 말씀드릴게요. 최 과장님, 저 납품 갔다고 얘기해주세요. 두 시간이면 돌아온다고. 아아, 두 시간이나 기다려주진 않겠죠? 그래도 일단 물어봐주세요. 저 지금 출발 준비하고 있을게요.”

나는 전화를 끊고 욕실로 달려갔다. 머리에 물부터 뒤집어쓴 다음 샴푸를 짜 얼굴과 머리를 한꺼번에 문질렀다. 거품을 씻어 내리며 동시에 양치질을 했다. 수건으로 머리를 털며 욕실에서 나오는데 마침 카톡 하나가 도착했다.

‘기다릴게.’


*


장례식장에 가지 못했다. 결국 가지 못하고 말았다. 아니다. 가지 않았다. 첫날은 현조 때문에 많이 늦더라도 어쨌거나 갈 수는 있었고, 둘째 날에는 제시간에 맞춰 갈 수 있었다. 그럴 생각만 있다면 얼마든지 갈 수 있었다. 하지만 나는 가지 않았다. 현조의 서늘한 눈빛이 언제 어디서나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공장 정문에 등을 기대고 비스듬히 서 있던 현조. 그리고 화물차가 아닌 내 작은 자동차를 타고 도착한 나. 현조와 공장 정문에서 마주칠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하역 작업이 생각보다 길어지네. 너 기다릴 것 같아서 먼저 왔어.”

나는 변명했다. 현조는 말하지 않았다. 기댔던 등을 떼고 바로 섰다. 그리고 나를 쳐다보았다. 정확하게는 내 옷차림을. 나는 흰 와이셔츠에 검정색 양복을 입고 있었다. 그 바쁜 와중에도 검정색 양복을 찾아 입었다.

“아, 이 옷……. 저녁에 어디 들를 데가 있어서……. 차에 있던 거 갈아입었어. 보기가 좀 그렇지?”

나는 또 변명했다. 현조는 말하지 않았다. 그냥 내 검정색 양복만 바라보고 서 있었다.

“많이 불편해? 그냥 땀에 전 작업복 입고 있을 걸 그랬나? 너 만난다고 일부러 미리 갈아입었는데. 냄새나는 작업복보다는 나을 것 같아서.”

“검은 양복 잘 어울리네.”

그것이 현조의 첫마디였다. 검은 양복 잘 어울리네. 나는 헤벌쭉 웃었고, 고맙다고 말했고, 내가 원래 양복이 좀 잘 받는 편이지 않냐고 너스레를 떨었다. 현조가 미소 지었다. 그 순간 긴장했던 마음을 완전히 놓았다. 괜히 졸았다. 역시 도둑이 제 발 저린 격이었다.

나는 현조를 커피숍으로, 다음에는 밥집으로 데려갔다. 현조는 하자는 대로 했고, 가자는 대로 갔다. 주도적으로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묻는 말에는 잘 대답했다. 나 보러 천안까지 온 거야? 내가 묻자 그냥 일이 있어서 내려온 김에 잠시 들렀다고 했다. 일이 있어서 내려왔다면서 무슨 일? 물었을 땐 대답을 못 했다. 비밀이야? 하니까 그럴지도? 하고 받았다.

실제로 일이 있어서 내려온 것이든 아니든 그것은 중요하지 않았다. 현조는 잠시 들렀다고 했지만 잠시 들른 것치고는 꽤 오래 나를 위해 혹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내는 중이었다. 우선 나를 두 시간이나 기다렸고, 만난 뒤에도 얼른 돌아가지 않고 커피숍으로 밥집으로 내가 가자는 대로 잘 따라왔다. 서울도 아닌 천안에서. 돌아갈 길이 까마득한데도 불구하고. 드디어 현조의 마음이 움직이는 것일까. 그런 것일까. 지난번엔 먼저 전화도 해주고. 이쯤 되면 마음 놓고 설레도 되는 것일까. 그런데 잠깐.

불현듯 궁금해지는 것이 있었다.

“내가 천안에 출장 와 있는 건 어떻게 알았어?”

“그냥 누구한테 들었어.”

가슴이 철렁했다. 내 소문이 그냥 누구한테까지 퍼진 걸까.

“그냥 누구? 혹시 학교 사람?”

여유로워 보이기 위해 애쓰며 물었다. 현조와 나 둘 다를 안다면 학교와 관련된 사람일 가능성이 컸다. 딱히 떠오르는 인물은 없었지만. 현조가 그냥 뭐……, 하며 얼버무렸다. 더 이상의 설명은 없었다. 현조가 말을 아낄수록 나는 더 많은 말을 풀어놓았다.

“나 잠시 온 거야. 출장. 우리 주 거래처도 아닌데 쌍용에서 갑자기 트랜스퍼 발주를 했더라고. 아마 그쪽 거래처에 문제가 생겼나봐. 회사에서는 이걸 기회라고 생각해. 그래서 굳이 본사 직원까지 파견한 거지. 지난번에 나 여기 한 달 있었잖아. 이쪽 공장 사정에 밝을 거라 판단한 모양이야, 날 보낸 걸 보면.”

현조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안심했다. 남을 속이는 일이 생각보다 쉽다는 생각도 했다.

커피를 마시고 밥을 먹었을 뿐인데 여름 해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주위엔 온통 네온사인과 가로등 불빛뿐이었다. 나는 현조를 태우고 다시 공장으로 향했다. 그곳 주차장에 현조의 차가 있었다. 현조를 먼저 보내고 30분 뒤에 서울로 출발할 생각이었다.

공장으로 가는 차 안에서 현조가 나지막이 선배, 하고 불렀다. 나는 어? 대답하며 곁눈으로 현조를 보았다.

“나 신경 쓰지 말고 선배 하고 싶은 대로 해.”

“뭘?”

“그냥 다.”

“그냥 다 뭐?”

“친구한테도 전해줘. 지난번에 내가 죽을 때까지 억울할 것 같다고 한 말, 그거 신경 쓰지 말라고.”

나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차가 붉은 신호에 걸려 횡단보도 앞에 섰을 때 내가 물었다.

“갑자기 왜 그런 말을 하니?”

“그냥 갑자기 생각나서.”

공장에 도착했고, 현조가 차에서 내렸고, 내가 따라 내렸다. 간단한 인사말을 나눈 뒤 현조가 떠났다. 나는 사무실로 올라가지 않고 차에서 시간을 보냈다. 최 과장에게는 아직 이중장부 얘기를 하지 않았다. 원래 계획은 오늘 저녁쯤 최 과장을 만나 이중장부를 어떻게 빼내올지 의논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그런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어졌다. 괜히 사무실에 들렀다가 최 과장에게 잡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차 안에 앉아 시계를 힐끔거리며 다리를 달달 떨었다. 왜 이리 긴 거지 30분이? 혼자 중얼거리기도 했다. 음악을 틀어놓기는 했지만 뭐라고 하는지 하나도 들리지 않았다. 초조했다. 1분, 또 1분,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더 초조해졌다. 내가 제일 늦게 도착하는 건 아닌지, 그래서 내 노력이 빛바래는 건 아닌지. 첫날이라 조문객도 많을 텐데 눈도장이나 제대로 찍을 수 있을지.

25분! 이제 5분만 기다리면 된다. 나는 시계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그냥 출발할까? 25분이나 차이 나는데 설마 현조와 마주치려고. 아니지, 천안 지리도 낯선 데다 평소처럼 규정 속도를 지켜가며 운전한다면? 결정을 못 내리고 안절부절, 고민을 거듭하는 와중에 전화벨이 울렸다. 목 대리였다. 얼른 받았다. 출발했어? 목 대리가 물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자네는 어디야? 되물었고, 지금 차 안, 목 대리가 말했다.

“아직 도착 안 했어? 퇴근 시간 훨씬 지났잖아.”

물으면서 시계를 보았다. 3분 남았다.

“메일 보낼 게 좀 있어서. 다 와 가. 자네는?”

“아…… 나는…… 그게…….”

“올 거지?”

“응…… 곧 갈게……. 자네 정성을 생각해서라도…….”

“내 정성이 아니라 여자 친구 정성이겠지.”

“응? 무슨 말이야?”

그 순간 시침이 정각 아홉 시를 가리켰다. 기다려야 할 시간, 0.

“혹시 여자 친구랑 통화 안 했어?”

“조금 전에 헤어졌는데…… 여자 친구는 아니지만…….”

“여자 친구가 말 안 해? 내가 부탁했잖아.”

“뭘?”

“자네 설득해달라고. 아무래도 내 말은 안 들을 것 같아서 자네 여자 친구한테 먼저 부탁했지. 역시 효과가 있었군.”

“설득……이라고? 자네가 현조를 어떻게 알고?”

분침이 기준점에서 네 번째 칸에 가 있었다. 출발해야 할 시간, +4.

“여러 번 얘기했잖아. 술 마시고. 기억 안 나? 회사 검색하니까 전화번호 나오데. 그래서 전화했지.”

“어디까지 얘기했어? 징계 얘기도 했어?”

“이런 이런, 흥분하는 것 좀 보게. 말 안 했으니까 걱정 마. 그냥 부장 처남이 사망했다, 자네 좀 장례식장에 보내달라, 대쪽 같기가 조선시대 선비 저리 가라다, 다들 조문 가는데 자네 혼자 빠지면 불이익을 받을 수도 있다, 뭐 이 정도?”

“그러니까 뭐래?”

“당연히 알았다고 하지. 이런 상황에서 어느 여자가 거절하겠어. 남자 친구가 불이익을 받을지도 모른다는데.”

“뭐 다른 거 물어보는 건 없었고?”

“없었어. 조용히 듣고 있다가 알았어요, 한마디 하더라고.”

“혹시 말이야, 내가 천안에 있다는 얘기도 했어?”

“안 했을걸? 난 그저 통화하라고 말한 것밖에 기억에 없는데?”

“아…….”

“근무 중에 천안까지 찾아가다니 정말 대단해. 자네가 부러워.”

“아아…….”

“현조 씨랑은 오전에 통화했고, 자네한텐 오후에 전화한 거야. 일종의 양방 공격이지. 그러니까 내 정성도 조금은 알아달라고.”

“아아아…….”

“나 지금 도착했어. 이따 봐.”

커브를 돌며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들리고, 기어 조작하는 소리, 그러고는 조용해졌다. 나는 망연자실한 채 꺼진 핸드폰을 내려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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