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뭐 해?”
응? 현조 목소리? 현조? 나는 눈을 번쩍 떴다. 동시에 일어나 앉았다. 방 안이 밝았다.
“아…… 뭐 그냥…… 이것저것…….”
차마 이 시간까지 잤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오후 두 시, 일요일이었다. 처음이야! 별안간 내가 소리쳤다. 뭐가? 현조가 물었고, 흥분이 채 가시지 않은 목소리로 내가 대답했다.
“네가 먼저 나한테 전화한 거!”
현조가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연락이 없어서.”
아, 그렇구나. 나한테서 연락이 없으면 궁금해하기도 하는구나. 이렇게 직접 전화를 주기도 하는구나. 내가 다급하게 말했다.
“만날래? 치킨 먹을까?”
현조가 또 피식, 웃었다. 그리고 말했다.
“치킨 회사에서 상 안 줘?”
“달라고 해볼까?”
“어지간히도 치킨 좋아한다.”
내가 치킨을 좋아해서가 아니란다. 너를 오래 붙잡아둘 수 있으면서도 네가 딱히 의미부여를 하지 않아도 되는 음식, 가볍게 만나 가볍게 먹을 수 있는, 한국인이 가장 선호하는 대중적인 음식이기 때문이란다. 내가 고급 레스토랑에라도 가자고 했다간 이 선배가 왜 이럴까, 나한테 다른 마음이 있나, 눈치챌 거잖아. 그러다 결국 거절할 거잖아.
“응, 나 치킨 좋아해. 그동안 천안에 있느라 못 먹었어.”
“천안에는 치킨 없어?”
“있기야 있지. 시간이 없었지. (너도 없고.)”
“그래, 뭐.”
한 시간 반 뒤에 만나기로 하고 전화를 끊었다. 욕실로 튀어가 머리부터 감았다. 심장이 쿵쾅거리며 뛰었다. 이미 포기했는데, 포기했지만, 그렇다고 만나지 않을 것까지는 없지 않은가. 고작 치킨인데, 스테이크도 아니고. 그런 말로 뛰는 내 심장을 합리화했다.
더우니까 맥주가 잘 들어간다, 그러면서 현조는 맥주를 마셨다. 추울 때도 잘 마셨으면서, 하지만 나는 말하지 않았다. 낮술을 하는 것에 대한 변명처럼 들려서 오히려 귀여워 보였다. 현조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해 나는 이렇게 말했다.
“내일 아침 일찍 일어나서 출근해야 하니까 낮에 많이 마셔둬. 밤에는 못 마시잖아.”
치킨이 나왔다. 나는 맥주 두 잔을 더 주문했다. 먼저 연락했으면서 현조는 거의 말을 하지 않았다. 내가 묻는 말에만 짤막하게 답했다. 프로젝트는 시작했어? 응. 잘돼가? 그럭저럭. 팀워크는? 괜찮은 편이야. 그 팀장이라는 사람, 자기주장이 강하거나 권위적이진 않아? 별로.
그러니까 내가 내 얘기를 꺼낸 건 순전히 현조가 말을 하지 않아서였다. 둘 다 입 꾹 다물고 맥주만 마시는 건 이상하니까. 이제 다 먹었으니까 일어나자, 언제 현조가 이렇게 말할지 모르니까.
“내 친구 중에 말이야, 요즘 곤란한 상황에 처한 놈이 하나 있는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나한테 상담을 하더라고. 고민된다고. 한번 들어볼래? 네 의견도 말해주면 좋고.”
얘기를 시작했다. 트랜스미션 불량은 다른 제품의 불량으로, 일본은 미국으로, 정 부장은 김 부장으로 바꿔서. 물론 천안도 대구로. 평택은 화성. 스토리 변경도 살짝.
“이 친구 어떻게 해야 할까? 회사를 그만둬야 할까, 아니면 대구 공장으로 출근해야 할까? 불량은 화성 공장에서 났는데 조사도 없고, 영업사원인 자기가 왜 징계를 받아야 하냐고 엄청 억울해하더라고. 화성 공장장도 수상하고. 대구 공장에 있을 때 횡령했다 걸려서 그쪽으로 쫓겨 갔대.”
“난 정 부장이 제일 수상한데?”
현조가 말했다. 맥주잔을 들다 말고 현조를 바라보았다.
“응? 무슨 부장?”
“아, 김 부장. 조사팀 활동을 누구보다 독려해야 할 사람이잖아, 김 부장. 그런데 안 했어.”
“어…… 뭐 그렇긴 하지. 자기도 미국 담당이니까. 그런데 그건 이유가 있어. 내 친구를 내쫓고 친척 놈 앉히려고 그런 거지. 잘못을 내 친구한테 떠넘겨야 하니까.”
“회사에서 그 정도 실세라면 글쎄, 다른 꼬투리를 잡을 수도 있었을 것 같은데. 불량 문제는 다르지. 손해가 크니까. 선배 말대로 정말 화성 공장이 문제라면, 손해배상금을 청구할 수도 있고.”
그런가……, 내가 중얼거렸다. 그러자 한층 단호하게 현조가 말했다.
“돈이 걸린 문제에 관대한 회사는 없어.”
“그럼 내 친구는 어떻게 해야 돼? 그만둬? 계속 다녀?”
“정 부장을 조사해봐야 하지 않을까?”
“응? 정 부장?”
내가 묻자 현조는 잠시 생각한 뒤 아, 김 부장, 하고 정정했다. 그러고는 태연하게 맥주를 마셨다. 뭐지? 눈치챈 건가? 망설이다 내가 물었다.
“혹시 니네 회사에 정 부장이라는 사람 있어?”
“음…… 그런 것도 같고.”
대답이 너무 애매해서 있다는 건지 없다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맥주를 마시는 척하며 현조를 살폈다. 치킨을 먹는 척하며 현조를 뜯어보았다. 현조는 평소와 다름없었다. 무심한 얼굴. 조금쯤은 지루해하는 듯한 표정. 그 얼굴, 그 표정으로 앉아 맥주를 마시고, 치킨을 먹고, 서비스로 나온 과자도 먹었다. 내가 물었다.
“꼭 그렇게까지 해야 할까? 조사 말이야.”
“나 같으면,”
현조가 말을 하다 말고 나를 쳐다보았다.
“죽을 때까지 억울할 것 같아.”
꼭 현조의 말 때문만은 아니었다. 다니든 그만두든 이대로 끝낼 수는 없었다. 나 스스로에게 실망하고 싶지 않았다. 결과가 어떻게 되든 할 만큼 했다는 자존감 정도는 챙기고 싶었다. 33년을 언제나 소심한 겁쟁이로, 눈치 보며, 비굴하게 살아왔다. 부장은 툭하면 내게 소리쳤다.
“말 좀 똑바로 할 수 없어? 얼버무리지 말고 마무리를 지으라고! 마무리!”
나도 안다. 내가 똑바로 못 한 건 말뿐만이 아니었다. 33년 인생이 줄곧 그랬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러고 싶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만큼, 꼭 그만큼은 해보고 싶었다.
“옜다, 이놈아, 공장장님한테 한 달 휴가 받아냈다. 대신 무급이고, 이건 우리끼리 비밀이야. 어디 가서 떠들어대기만 해봐라, 아가리를 그냥 확! 한 달 동안 똥을 싸든 방귀를 뀌든 어디 네 맘대로 해봐라.”
최 과장은 이런 따뜻한 말로 나를 응원해주었다.
월요일 오후에 평택 공장으로 내려갔다. 현조는 부장을 지목했지만 나는 아무래도 평택이 의심스러웠다. 숙련된 직원들을 차례로 자르고 신입으로 채웠다고 했다. 기계도 어차피 사람이 만지는 일이었다. 검수 과정에서도 불량을 적발해내지 못했다. 양 공장장의 횡령 전과도 내 의심을 키우는 데 한몫했다. 숙련된 직원을 신입으로 교체하면 공장에는 두 가지 변화가 생긴다. 먼저, 인건비가 줄어든다. 다음으로 쓴소리할 사람이 없어진다. 이 두 변화로 양 공장장이 얻는 것은? 마음 놓고 횡령할 수 있는 환경.
‘덕일공업’이라는 현판을 확인한 뒤 슬그머니 공장으로 들어서는데 경비실에서 거기 서봐요, 소리쳤다. 내가 돌아보자 경비실로 오라는 손짓을 했다. 마지못해 그쪽으로 갔다. 어떻게 오셨냐고 경비가 물어서 나는 목 대리 이름을 댄 뒤 미래모빌스에서 왔다고 말했다.
“목 대리? 목 대리가 아닌데?”
경비가 내 얼굴을 유심히 들여다보며 말했다. 나는 얼른 목 대리의 명함을 꺼내 보여주었다. 맞죠? 말하며.
“목 대리 명함이라면 나도 있는데?”
경비실에는 두 명의 경비가 있었는데, 다른 경비도 목 대리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에게 목 대리는 올 때마다 음료수를 건네는 인사성 밝은 청년이었다. 아, 저 목 대리 부탁으로……, 뒤늦게 말을 바꿨지만 가차 없이 쫓겨났다. 처음부터 그렇게 말했으면 몰라도 이미 거짓말을 한 뒤라서 경비 누구도 내 말을 믿지 않았다. 설마 이 사람들이 목 대리 얼굴을 기억할까, 방심한 게 잘못이었다. 나는 물러났다. 퇴근 시간까지는 두 시간가량 남아 있었다.
터덜터덜 공장에서 걸어 내려오다 신호 대기 중인 트럭 한 대를 발견했다. 원료 납품 차량이었다. 그 트럭의 목적지가 어딘지도 알 것 같았다. 횡단보도를 건너 직진하면 나오는 단 하나의 공장. 이 거리의 마지막 공장. 나는 트럭 뒤쪽으로 다가가 발판을 딛고 선 뒤 밧줄을 잡았다. 충동적이었고, 생각하고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일단은 공장 안으로 들어가기. 경비실만 통과하면 들키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 직원들이 서로의 얼굴을 다 알지는 못하리라. 게다가 신입도 많다고 했으니까.
트럭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밧줄을 더 꽉 잡았다. 속도는 빠르지 않았다. 오르막이었고, 1분 거리에 공장이 있었다. 트럭이 멈췄다. 내가 짐작한 바로 그 공장이었다. 경비실에서 경비가 나와 기사에게 출입 장부를 내밀었다. 두 사람이 장부에 정신 팔린 사이 나는 트럭 옆쪽으로 돌아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무사히 마당을 통과해 건물로 들어가려는 순간 좀 전의 그 경비와 딱 마주쳤다. 목 대리 명함이라면 나도 있는데? 말했던 그 경비. 젖은 손을 털며 건물에서 나오던 경비가 나를 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아까 그 사람이잖아? 여긴 왜 자꾸 오지? 어떻게 들어왔어요?”
“저…… 화장실이 급해서…….”
나는 또 가차 없이 쫓겨났다.
다섯 시 사십 분에서 사십이 분 사이, 여러 대의 버스가 줄줄이 버스정류장에 도착하더니 그 버스들에서 똑같은 작업복을 입은 사내들이 우르르 내렸다. 야간 근무조였다. 사내들을 다 내려준 뒤 버스는 유턴해 왔던 길로 되돌아갔다. 이곳이 종점이었다.
나는 고개를 푹 숙인 채 야간 근무조 무리의 맨 끝에 붙어서 걸었다. 누구도 내게 말을 걸지 않았고,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그래도 경비실을 통과할 땐 목덜미로 땀이 흐르고 심장이 세차게 뛰었는데, 다행히 별다른 제재 없이 공장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또 한 번의 성공이었다. 만세! 이제 작업 과정을 지켜보기만 하면 된다. 원료를 나르는 척하며 라인 구석구석 작업을 어떻게 진행하는지 살펴보면 된다.
바짝 얼어붙었던 몸이 풀렸다. 마음도 느긋해졌다. 이제 저 건물 안으로 들어서기만 하면! 그러나 공장 마당을 채 가로지르기도 전에 요란한 소리를 내며 핸드폰이 울렸다. 황급히 꺼내서 확인하니 발신자가 집주인이었다. 받을까 말까 잠시 고민하다 결국 전화를 받았다. 그 누구도 아닌 집주인이었다. 부모님 선생님 사장님보다 더 두려운 존재.
“이달 월세는 아직이네?”
집주인이 말했다. 그러고는 잠시 뜸을 들였다가, 벌써 한참 지났는데, 덧붙였다. 더 이상은 기다릴 수 없다는 뜻이었다. 건물 출입문을 코앞에 두고서 나는 멈춰 섰다. 월세 입금이 안 됐다고? 매월 1일에 자동이체 되도록 해놨는데? 전산 오류인가? 내가 말이 없자 집주인이 총각, 하고 불렀다. 그 순간 생각났다. 5월 말, 나는 천안을 떠나기 전 통장에서 돈을 찾아 봉투에 고이 넣은 뒤 공장장 집 안방에 몰래 넣어두었다. 진짜 내 집의 월세는 깜빡 잊고서. 잔액이 부족해서 이체가 안 됐구나. 집주인이 또 총각, 하고 불렀다. 나는 얼른 죄송하다고 말한 뒤 내일 중으로 입금하겠다고 말했다. 못마땅한 듯 집주인이 짜증 섞인 목소리로 한 번만 더 날짜를 어기면 계약을 파기하겠다고 경고했다. 나는 보이지 않는 집주인을 향해 거듭 머리를 숙이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집주인이 나 들으라는 듯 크게 한숨을 내쉬더니 전화를 끊었다.
“어? 이 사람이 나한테 자꾸 절을 하네?”
고개를 들었다. 눈앞에 경비가 서 있었다. 40분 전에 바로 이곳에서 마주쳤던 그 경비. 경비는 젖은 손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내가 얼른 머리를 숙인 뒤 손만 뻗어 출입문을 잡는데, 경비가 허리를 비트는 요상한 자세로 내 얼굴 앞에 자기 얼굴을 바짝 들이밀었다.
“낯이 익어. 아까부터 자꾸 낯이 익었어. 목 대리 아는 걸 보니 혹시 진짜 서울 거래처에서 왔나…….”
“저 서울 아니에요. 평택이에요.”
내가 얼른 말했다.
“평택? 여기가 평택인데? 우리 거래처 중에 평택이 있었나?”
“아…… 저는 평택 시민인데…… 그저 화장실이 급해서…….”
“참 요상하네. 평택에 화장실이 여기만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긴 하네요. 전 그럼 다른 화장실을 찾아볼게요.”
나는 황급히 돌아섰다. 경비실에 남아 있던 경비가 나를 발견하고는 어, 저 사람? 했다. 못 들은 척 서둘러 공장을 벗어났다. 경비여서 그런가, 다들 눈썰미들이 보통이 아니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수염을 붙이거나 하다못해 모자라도 쓰고 올걸 그랬다.
*
고물에 대해 공장장은 이렇게 말했다. 내가 여러 번 묻자 마지못해 공장장이 얘기해주었던 것이다. 트랜스미션 15만 대 생산으로 한창 정신없던, 어느 일요일의 달밤이었다.
“한 20년쯤 됐나, 아니 더 됐으려나. 어느 날 친구가 찾아오더니 돈 좀 빌려달래. 원래 자기 꿈이 바람처럼 구름처럼 떠도는 건데 그동안은 가족들 먹여 살리느라 못 했고, 이제는 떠나도 되겠다 싶어서 봤더니 돈이 없더라고. 한 달 먹고살 생활비만 빌려주면 그다음부터는 일을 해가면서 떠돌겠다고. 빌려줬지. 그랬더니 다음 날 이 친구가 고물 몇 개를 들고 와서는 담보라고 내놓더군. 처음엔 좀 어리둥절해하다가 곧 과연! 무릎을 쳤지. 고물상 하는 친구에게 고물보다 더 소중한 게 뭐가 있겠냐 말이지. 그다음 달엔 이 친구 부인이 찾아와서 돈 좀 빌려달라네. 아들 대학 등록금이 부족하다고. 남편이 꿈을 찾아 떠나버려서 집안에 돈 벌어올 사람이 없었거든. 빌려줬지. 그러니까 이 부인도 담보라면서 고물 몇 개를 내려놓고 가더군. 역시 부창부수! 이러면서 또 놀라워했지. 그다음 달에 또 부인이 찾아왔는데 이번엔 딸 병원비가 필요하대. 반찬 살 돈이 없어서 밥만 먹였더니 급체했다고. 다음 달엔 지붕 수리비가 필요했고, 또 그다음 달엔 몇 달 치 체납된 세금을 납부할 돈이 필요했고, 또 그다음 달에는 세 가족이 먹을 라면 살 돈이 필요했지. 이젠 반찬, 쌀뿐만 아니라 라면 살 돈도 없다고. 돈을 빌려서라도 산목숨은 어떻게든 살아야 하니까. 그때마다 담보랍시고 고물을 가져왔고. 그러다 보니 어느새 저렇게 쌓였어.”
“정말 염치가 없는 사람들이군요.”
내가 말하자 공장장이 천천히 고개를 가로젓더니 대꾸했다.
“염치는 있었어. 돈이 없었을 뿐이지. 담보로 내밀 고물이 떨어지자 더 이상 안 왔거든.”
“그래서 언제까지 고물을 저렇게 두실 거예요? 회사에 소문 이상하게 났는데.”
“진짜 주인이 따로 있으니 내가 뭘 어쩔 수가 있나. 언젠가는 찾아가겠지.”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최 과장의 얘기는 달랐다. 평택 공장 하나 뚫지 못하고 몇 날 며칠 실패만 거듭하다 천안을 찾은 날 최 과장이 말해주었다. 내가 묻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공장장이 숨기고 싶어 한, 그래서 일부러 거짓말까지 해가며 감춰둔 진실을. 최 과장은 이렇게 서두를 꺼냈다.
“혹시 말이야 용 사원, 공장장님 댁 고물에 얽힌 사연 들었어?”
“뒤뜰에 있는 그거요? 친구분 가족들이 돈 빌려 가면서 담보로 내놓은 거라고…….”
“허허, 이 구라쟁이 양반, 또 구라쳤네. 세월이 이 정도 흘렀으면 이제 덤덤해질 때도 됐건만.”
“담보 아니에요?”
내가 심드렁하게 물었다. 담보 얘기가 구라든 아니든 이제 별 관심이 없었다. ‘횡령한 돈으로 고물을 샀다’는 소문을 믿을 때의 지대했던 관심이 그게 사실이 아니라는 걸 안 순간 연기처럼 사라졌다.
“응, 아니야. 쓰레기야. 고물 아니고 쓰레기.”
“고물이나 쓰레기나 그게 그거죠.”
“그게 왜 그게 그거야? 고물은 쓸 수 있는 거고, 쓰레기는 못 쓰는 건데. 고물이 들으면 기함할 소리를 하고 있네, 이 친구.”
“아, 네. 알았으니까 평택 공장으로 들어갈 방법이나 좀 알려달라니까요.”
“그런데 그 쓰레기, 누가 갖다 놓은 건 줄 아나?”
“누가 일부러 갖다 놓은 거예요? 공장장님이 버린 거 아니고?”
“자네가 말한 그 친구분 가족들.”
최 과장이 말했다. 자기가 한 말의 여운을 즐기려는 듯 최 과장은 입을 다물었고, 나는 입을 헤 벌린 채 최 과장을 쳐다보았다. 왜? 도대체 왜? 흥미가 생기기 시작했다.
“왜요? 그 가족들이 왜요?”
“그 집 남편이랑 공장장님 사모님이랑 바람나서 같이 도망갔거든.”
“헐…….”
너무 의외여서 뒷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바보처럼 입을 헤 벌린 채 최 과장만 쳐다보았다.
“남편 도망가고 그 집 부인이 화풀이할 데가 없으니까 공장장님 댁으로 쳐들어와서 행패를 부렸지. 살림살이 다 때려 부수고. 그걸로 끝인가 했는데 웬걸, 다음 날부터 온 동네 돌며 버리려고 집 앞에 내놓은 쓰레기란 쓰레기는 싹 다 모아서 옜다, 엿 먹어라 하며 공장장님 댁 마당에 던져놓더군. 자기는 앞에서 리어카 끌고 자식들은 뒤에서 밀고. 참 눈물겨웠지. 보통 끈기가 아니었어. 남의 동네까지 와서 리어카 빌려, 골목골목 돌아다니며 쓰레기 모아, 또 그걸 공장장님 댁까지 옮겨……, 이게 보통 정성이야 어디?”
“그런데 최 과장님, 듣다 보니 좀 이상한데요……. 마치 그 끈기와 정성을 칭찬하는 듯한…….”
“응, 내 사촌누나 얘기야. 나까지 욕할 순 없지.”
나는 또다시 할 말을 잊고 멍하니 최 과장만 쳐다보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 잘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니까 공장장과 최 과장의 매형이 친구 사이라는 것? 그런데 그 친구가 공장장의 부인과 바람나서 도망갔다는 것? 사촌누나가 쓰레기로 화풀이하고?
“우아, 언빌리버블…… 하네요.”
한참 뒤에야 나는 그렇게 중얼거렸다.
“두 사람이 그럴 줄은 꿈에도 몰랐지. 나뿐만 아니라 다들 마찬가지였어. 사모님이 편지를 남겼는데 그걸 보면서도 믿을 수가 없었어. 공장장님하고 매형은 여느 형제들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였으니까. 허, 참.”
“공장장님 충격도 만만찮았겠네요.”
“내색은 안 해도 꽤나 힘드셨을 거야. 친구와 부인한테 동시에 배신당한 셈이니까. 설상가상으로 쓰레기 폭탄까지 맞았고.”
“공장장님 잘못도 아닌데 쓰레기는 좀……. 최 과장님이 말리지 그러셨어요.”
“그때 말렸으면 아마 화병 걸려서 죽었을 거야, 사촌누나. 공장장님한테는 죄송한 일이지만.”
“그런 일이 있었는데도 잘 지내시네요, 공장장님하고 과장님.”
“서로 민망했지 뭐. 밤마다 몰래몰래 들러서 마당에 쌓인 쓰레기 내가 뒤뜰로 옮겼는데, 아마 공장장님도 알고 계셨을 거야. 내다본 적은 없지만. 이젠 20년도 더 지난 일이 돼버렸네.”
“그런데 이 이야기를 왜 저한테 하시는지……?”
술자리에서 안주 삼아 가볍게 꺼낼 이야기는 아니었다. 게다가 나는 최 과장의 친구도 동료도 아닌, 그저 잠깐 스쳐 가는 ‘개똥’보다 못한 존재가 아니던가.
“누구나 인생이 평탄하지만은 않다는 얘기지. 살다 보면 뜻하지 않은 곳에서 줘터지기도 하고 나자빠지기도 하고. 용 사원도 지금은 하늘이 무너지는 기분이겠지만 또 어딘가에는 솟아날 구멍도 있는 법이고. 살자 생각하면 또 그럭저럭 살아지더라고. 공장장님이나 내 사촌누나도 봐봐. 지금은 또 그럭저럭 잘 살잖아. 그러니까 용 사원, 힘내.”
“아, 저를 위로하시려고…….”
“당연하지. 인생 선배로서 용 사원의 어려움을 보고만 있을 순 없지.”
“그런데 이렇게 무거운 사연을……. 그냥 힘내, 정도로 가볍게 위로하셔도 될 것 같은데…….”
“용 사원을 생각하는 내 마음이 그만큼 크다는 뜻이지.”
“아, 네. 그럼 그 사원이라는 소리만이라도 좀…….”
“내 친구 얘기도 해줄까? 한 5년 전쯤에 회사 그만두고 나와서 가게 차린다고 설치다가 사기당하고 돈만 날린 친구가 있는데. 그때 그 친구 자살하니 마니 한창 시끄럽더니 지금은 또 그냥저냥 살아.”
“아 아니에요. 위로 다 됐어요.”
“벌써?”
“네, 그럼요.”
내가 황급히 대답했다.
뭐 그런 일이 있었다는 얘기다. 그날 나는 최 과장에게 공장장이 왜 쓰레기를 치우지 않는지를 물었고, 최 과장이 대답했다.
“마주할 용기가 없는 게지. 쓰레기를 보면 그때 기억이 떠오를 테니까.”
아마 그날이었을 것이다. 내 일이 정리되는 대로 공장장의 집 쓰레기를 치워주어야겠다고 생각한 것이. 내가 아플 때 죽을 끓여다 준 데 대한 보답은 꼭 하고 싶었다. 그게 언제가 되었든.
그날 밤의 성과는 또 있었다. 나에 대한 위로를 끝낸 최 과장은 즉석에서 고 주임이라는 사람에게 전화를 걸었고, 나와 만날 약속을 잡아주었다. 다음 날 나는 평택 공장에서 해고되었다는 그 사람, 고 주임에게서 여러 가지 사실을 들을 수 있었다. 그중 가장 주목해야 할 부분이 이중장부의 존재였다.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분명히 이중장부가 존재한다고 했다. 어떻게 확신하느냐고 물었다.
“그것 때문에 한 사람이 회사를 그만뒀으니까요. 양 공장장 부임하고부터 이중장부를 작성하기 시작했는데, 해가 갈수록 그 단위가 커지더랍니다. 지출 내역을 조작하는 거예요. 특히 올해는 광범위한 분야에서 대대적으로. 그래서 그만뒀답니다. 액수가 너무 커지니까 무서워서 못 다니겠더라고.”
만나게 해줄 수 있느냐고 물었다. 거기에 대해서는 고개를 저었다. 대신 이중장부가 보관된 장소를 알려주었다. 마지막으로 고 주임이 당부했다.
“어떠한 경우에도 내 이름은 밝히지 말아주세요. 꼭 성공하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