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튿날 오후 약속대로 사장이 내려왔고, 그 사장을 만나러 최 과장이 공장장을 모시고 시내로 나갔다. 배웅하는 내게 최 과장이 말했다.
“죽여버리고 올게.”
나는 힘없이 웃었다. 그러다 조금 후 대꾸했다.
“꼭 그러세요.”
자포자기한 건 덕일공업 사장만이 아니었다. 나도 마찬가지였다. 불량 원인을 밝혀냈으면서도 나에 대한 조치는 아무것도 없었다. 안 이사가 건재하는 한, 그래서 정 부장이 그 자리를 지키는 한 나는 복직할 수 없을 것이다. 마지막 한 가닥 희망마저 사라졌다. 공장장과 최 과장이 다시 사장을 만난들 뭐가 달라질까. 이미 사장은 좋은 사람이 아니라는 게 판명 났다. 일본 회사로부터 청구받은 손해배상금, 거기에 두 배를 더 더해 덕일공업에 청구했다. 횡령도 불량 문제도 자기 직원인 안 이사가 깊숙이 개입되었다는 걸 알면서도. 덕일공업에 그만한 돈이 없다는 걸, 아니 부지를 팔고 공장 건물을 팔고 설비들을 다 팔고 집까지 팔아도 갚지 못할 액수라는 걸 알면서도. 인간이라면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그날 나는 자주 원료 상자를 떨어뜨렸고, 이런저런 실수가 잦았다. 보다 못한 반장이 내게 말했다.
“오후 작업에는 빠지지.”
나는 괜찮다고 말했다. 아픈 데도 없다고, 다만 머리가 좀 멍할 뿐이라고.
“자네를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위해서야. 자네 때문에 동선 꼬이고 작업 속도 느려진 거 안 보여?”
그러자 나이 지긋한 라인장이 반장에게 말했다.
“뭘 그렇게 말할 것까지야. 용 군도 한다고 하는구먼. 여기는 우리한테 맡기고 용 군은 좀 쉬다 와.”
하는 수 없이 작업장 밖으로 나왔다. 땡볕이 내려쬐는 벤치에 앉았다. 벤치 옆에 나무가 있긴 했지만 그늘은 벤치에서 멀찍이 떨어져 있었다. 햇빛이 너무 강렬해서 눈을 뜨기가 힘들었다. 벤치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여유가 생겨서인가, 자꾸만 현조 생각이 났다. 현조를 생각하면 가슴이 답답해졌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었다.
나 안 갔어. 나 안 갔다고. 갈 뻔했지만 결국 안 갔다니까.
장례식장엔 갔어? 현조가 먼저 물어주면 말을 꺼내기가 쉬울 텐데, 그러나 현조는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그날 이후 연락조차 없었다. 내가 먼저 연락해야 하는 걸까. 그래도 되는 것일까. 내 전화를 무시하지는 않을까. 8월 하순의 오후, 그늘 한 점 없는 땡볕에 앉아 나는 망설이고 또 망설였다. 핸드폰을 꺼냈다가 넣고, 또다시 꺼냈다가 넣었다.
문득 예전에 현조와 나눴던 대화 한 토막이 생각났다. 합기도를 배우던 시절, 내가 현조에게 물었다.
“연애해봤어?”
이 질문은 그러니까 내 목적의 종착지(나랑 연애하자!)에 닿기 위한 출발 신호 같은 것이었다. 연애 얘기를 하다 자연스럽게 나랑 연애하자! 로 넘어가기. 현조의 대답은 예상대로였다.
“응.”
3학년이 될 때까지 연애 한 번 안 해봤을 리 없지. 그래, 기특하다. 내가 다시 물었다.
“지금도 해?”
“아니.”
“헤어졌어?”
“응.”
(힘들었겠구나. 나를 만나기 위한 통과의례쯤으로 생각하려무나.)
“왜?”
“알고 보니 내가 질색하는 사람의 유형이었어.”
“어떤 사람이었는데?”
“자기모멸로 시작했다가 자기연민으로 끝나는 사람.”
왜 갑자기 이 대화가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그때 나는 나랑 연애하자! 말하지 못했다. 자기모멸로 시작했다가 자기연민으로 끝나는 사람, 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뇌가 얼어붙었고, 입술 위로 그 어떤 단어도 올리지 못했다. 누구도 내게 그런 유형의 사람이라고 말한 적이 없는데, 나 혼자 아니야, 아니야, 속으로 부정했다. 그러나 과연 아닐까. 그때 순순히 인정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
당시의 나는 들키고 싶지 않았고, 숨기기에만 급급했다. 자기모멸로 시작했다가 자기연민으로 끝나는 사람, 이라는 말을 들은 뒤부터 나는 내 감정을 숨겼고, 내 처지를 숨겼고, 내 곤경을 숨겼다. 늘 괜찮은 척, 연연하지 않는 척, 마음 넓은 척 굴었다. 현조에게 내 민낯을 들킬까봐, 현조가 내 정체를 알아챌까봐 늘 두려웠다. 그래서 더 나를 싸맸고, 포장했고, 위장했다. 현조를 만나는 동안 솔직했던 시간보다 솔직하지 못했던 시간이 더 많았다.
8월 하순의 오후, 그늘 한 점 없는 땡볕에 앉아 그런 생각들을 했다. 생각의 끝엔 이제 그만 현조를 놔주어야 하지 않을까, 란 생각이 도사리고 있었다. 나를 위해서라도. 내가 곁에서 맴돌든 말든 현조는 상관없겠지만. 하지만 나를 위해서는. 내 정신의 안녕을 위해. 이제 나를 그만 괴롭히고 싶었다. 7년이면 충분히 괴롭혔다. 핸드폰을 꺼냈다.
잘 지내? 하고 말문을 열었다. 그러자 현조가 물었다.
“어디야?”
“천안.”
“계속 천안에 있었어?”
“응. 당분간은 여기 있어야 할 것 같아.”
현조는 왜, 라고 묻지 않았다. 내가 말했다.
“어쩌면, 회사를 그만둘지도 몰라.”
“일이 잘 안됐어?”
“나 장례식장에 안 갔어. 솔직히 말하면, 가려고 했지. 그런데 네가 목 대리랑 통화했다는 거 알고, 안 갔어. 쪽팔려서.”
“…….”
“그거 내 친구 얘기 아니고 내 얘기야. 이미 알고 있겠지만. 내가 밀려난 거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내 친구 얘기라고 둘러대고 너한테 물어봤어. 쪽팔려서.”
“…….”
“여기 사람들 정말 좋으신 분들이야. 내가 무단결근했는데 그것도 봐주고, 한 달 휴가까지 줬어. 그런데도 난 탈출할 생각만 해. 그건 지금도 마찬가지고. 난 참, 배은망덕한 것 같아.”
“…….”
“그래도 난 여길 떠날 거야. 평생 원료 상자나 나르면서 살고 싶지는 않아. 아, 참. 내가 말 안 했구나. 나 여기 생산부 소속 잡부로 일해. 어디서든, 누군가든 용 군, 하고 부르면 내가 달려가.”
“…….”
“내일부턴 채용 공고도 알아보고 이력서도 쓸 거야. 여기서 탈출하기 위해 최선을 다할 거야. 그래도 금방은 힘들겠지. 채용 공고가 수시로 있는 것도 아니고. 서울의 원룸은 정리할까 해. 여기서는 공장장님 집에 살아. 공장장님이 공짜로 와서 살래. 어차피 비어 있는 방이라고. 냉큼 좋다고 했어. 나 참 나쁜 놈이지? 호시탐탐 떠날 궁리만 하면서.”
“…….”
“면접 볼 때 아니면 이제 서울 올라갈 일 없겠다. 너 볼 시간도 없을 거야. 서울 간다 해도 금방금방 내려와야 할 테니까. 잘 지내. 일만 하지 말고 연애도 좀 하고.”
듣고만 있던 현조가 불쑥 선배, 하고 불렀다.
“왜?”
“원룸 정리하러 언제 와?”
“이번 주말.”
“그때 우리 치킨 먹을까?”
“작별 인사야?”
“뭐가 됐든.”
“나 사실, 치킨 별로 안 좋아해.”
“정말이야? 몰랐어.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늘 치킨만 먹자고 해서.”
“흔한 음식이니까. 너무 흔해서 네가 거절도 못 할 테니까. 지금 생각하니 내가 너무 한심했다.”
“그럼 다른 거 먹을까?”
“…….”
“뭐가 좋아?”
“…….”
“해물탕에 소주 마실까? 옛날처럼. 그때 우리 육수 리필 몇 번 한 줄 알아? 열 번 했어. 소주는 여섯 병 마셨고. 비싼 안주 시켰으니까 뽕을 뽑겠다고. 안 들어가는 술을 억지로 마셔가면서. 소줏값이 더 나가는 것도 모르고. 그때 서빙하던 아줌마, 우리 막 노골적으로 째려보고 그랬었는데.”
“그랬나.”
“응. 그랬어.”
“까마득하다.”
“난 생생한데.”
“넌 머리가 좋으니까.”
“인정. 그런데 선배도 머리 나쁜 편 아냐. 일본에서 학위 딴 거, 남들은 4년씩 걸리는데 선배는 3년 만에 해냈잖아.”
“아, 그런가.”
“나였으면 2년 만에 끝냈겠지만.”
“주말에 볼까?”
“치킨 싫으면 다른 거 말해봐.”
“아냐. 그냥 치킨 먹자.”
“안 좋아한다며?”
“지금 이 순간부터 좋아졌어. 가성비 최고잖아. 맛에서도 양에서도. 치킨집이 맥주도 싸고.”
“옛날 생각나네.”
“그땐 치킨에 소주를 마셨지. 난 네가 소주를 더 좋아하는 줄 알았어.”
“맥주에 비하면 소주 가성비가 월등하니까.”
“얘기했으면 네가 소주 마시자고 해도 맥주를 시켰을 텐데.”
“그해 초에 아빠가 실직했어. 우리 3남매 학비 대기도 빠듯해서 용돈은 꿈도 못 꿨어. 그때 얘기 안 한 건, 쪽팔려서.”
“너도 쪽팔린 게 있구나.”
“하나 더 있는데 얘기해줄까?”
“뭔데?”
“합기도 도장. 거기 나 수련생으로 있던 거 아니었어. 청소 도우미. 청소도 하고, 물건들 정리도 하고, 사범 없을 때 아이들도 봐주고. 그 대가로 관장실 이용했어. 도서관보다 공부하기가 좋았거든. 용돈 수준이지만 월급도 받았고.”
“아.”
“선배가 궁금해한다는 거 알면서도 말 못 했어. 쪽팔려서.”
“우리 참, 생쇼를 했구나.”
“지나고 보니 이런 것도 다 추억이네.”
“그러게. 재밌다 야. 또 쪽팔려서 얘기 못 한 거 없어?”
나는 벤치에 기댄 채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어느덧 햇빛은 강렬한 기운을 잃고 다소 누그러져 있었다. 하늘에는 비행기 모양, 꽃 모양 구름이 둥둥 떠 있었고, 이마의 열기를 식혀주는 바람도 간간이 불어왔다. 지금만 같으면 여름과도 제법 친하게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다.
*
공장장은 무른 듯 보이지만 물러섬이 없었고, 최 과장은 거칠지만 상대의 약점을 정확하게 찌를 줄 알았다. 두 사람은 2인 1조가 되어 공장장이 뒤를 받치고 최 과장이 앞에서 공격하는 환상의 호흡을 보여주었다. 최 과장이 소주잔을 탁! 내려놓더니 큰 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본 건 있어 가지고 떡하니 일식집 안방에 자리 잡고 앉았네? 어린 놈의 새끼가 어른이 들어가도 일어나지도 않고. 버르장머리 없는 놈.”
“안방은 아니지 않아요? 텔레비전 같은 데 보면…….”
“듣기 싫어? 얘기하지 말까?”
“아니 아니에요. 해주세요. 입 다물고 있을게요.”
나는 손까지 내저으며 다급하게 말했다. 최 과장이 아니라면 누구에게서 이런 재미난 얘기를 들을 것인가. 듣고 또 들어도 결코 질리지 않을 이런 귀한 이야기를. 결과는 대충 알았다. 공장으로 돌아온 최 과장의 얼굴이 밝았다. 잘 해결됐지 그럼! 무엇보다 목소리가 컸다. 어깨에 잔뜩 힘이 들어가서는 내 앞에서 거드름을 피웠다. 평택이야말로 죽다 살아났지! 미래모빌스가 일본 자동차 회사에 배상한 꼭 그만큼, 그러니까 손해배상금이 천문학적 액수에서 그냥 많은 액수로 조정되었다고 했다. 나머지 얘기는 저녁에 해줄게. 기다려. 점순이도 아닌데 또다시, 기다려.
“앉자마자 안 이사 문제부터 물었지. 아직 아무 소식이 없는데 어떻게 된 거냐고. 우리는 급해 죽겠는데 사장 이 새끼, 회 한 점을 집더니 오물오물 씹으며 좀 드시고 나서 얘기하자는 거야. 너나 많이 처먹어라! 소리쳐 주려다가 간신히 참았어. 참느라고 아주 혼났네.”
“먹고 싶은 거 참느라고 혼난 거 아니고?”
공장장이 개구쟁이 같은 미소를 띠고 최 과장에게 말했다. 최 과장이 펄쩍 뛴 건 당연지사.
“아니에요! 아니라니깐 자꾸 이러시네. 공장장님이야말로 하 참, 어이가 없어서. ‘회사가 입을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서 사장님께 먼저 알려드린 겁니다. 잘 해결하실 줄 알았는데. 이러면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야겠군요.’ 하, 우리 공장장님 정말 점잖으셔. 협박도 어쩌면 이렇게 나긋나긋하게 하시는지. 그러니 허구한 날 뒤통수 맞는 거라고요.”
최 과장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공장장은 직접 잔에 막걸리를 따라 마시고, 내 잔도 채워주었다.
“안 이사는 어떻게 된 거래요?”
내가 물었다. 궁금해서 참을 수가 없었다.
“잘못은 시인하더래. 아니, 처음엔 아니라고 잡아뗐다지. ‘확인부터 해야 했어요. 내 방으로 불러서 물어봤죠. 모르는 일이라고 하더군요. 양 공장장인가 그 사람도 모른다고 했어요.’ 사장이 말하는데 속에서 천불이 나는 거야. 하, 공장장님이 그때 말리지만 않았어도! 아니 공장장님, 우리가 무슨 연인 사이도 아니고 내 손은 왜 지그시 잡는 겁니까, 잡길. 아무튼 내가 인상을 팍 쓰니까 사장이 재빨리 덧붙이더군. ‘결국 인정했어요. 이중장부가 발견됐는데 거기 상납 내역이 다 적혀 있다, 정 부장하고 당신 이름도 있더라, 그랬더니 깔끔하게 인정하데요. 좀 더 오래 끌 줄 알았는데.’ ‘그런데 왜 안 이사에 대한 처분은 없는 겁니까?’ 공장장님이 물었지.”
최 과장은 무성영화의 변사가 되어 상황을 설명하고, 목소리를 변조해 인물들의 대화를 재현했다. 그게 제법 그럴듯해서 듣는 재미를 한층 배가시켜주었다.
“‘안 이사는 계속 회사에 남을 겁니다. 나도 어쩔 수 없어요. 나라고 뭐 범죄자를 회사에 두고 싶겠어요?’ ‘일단 이유나 들어봅시다.’ 어찌나 침착하신지, 공장장님 때문에 더 속이 터져 죽는 줄 알았잖아요. ‘해고하면 자기가 관리하는 거래처들 다 끌고 다른 회사로 가겠답니다. 그러니 난들 어쩔 수 있어요? 유럽, 일본, 미국 다 날아가게 생겼는데.’ ‘그걸 다 안 이사가 관리합니까?’ ‘엄밀하게 말하면 안 이사 수족들이 관리하는 건데, 뭐 마찬가지예요. 안 이사가 직접 거래 뚫은 데도 많고. 아시잖아요, 안 이사 유능한 거.’”
목이 타는지 거기서 말을 끊고 최 과장이 소주 한 잔을 마셨다. 직접 잔을 채우면서, 저 초롱초롱 눈망울 때문에 술 마실 시간도 없네, 투덜거렸다. 초롱초롱 눈망울이란 나를 가리키는 것이었다. 나는 얘기의 결말이 너무 궁금해서 잠시도 최 과장에게서 눈을 떼지 않았다. 말하자면 얼른 들려달라는 무언의 압박. 최 과장이 다시 이야기를 이어갔다.
“사장 말하는 꼬라지 보자니까 더 이상은 참을 수가 없어서 내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어. 그러고는 거래처 지키겠다고 범죄자 새끼는 품고 가고, 죄 없는 덕일공업엔 배상금 폭탄을 때렸냐고 소리쳤지. 그랬더니 겁먹었는지 이 새끼 낯빛이 노래지는 거야. 이거구나 싶었어. 더 크게 소리쳤지. ‘회사고 나발이고 이판사판이다 이거야! 장부 죄다 복사해서 언론사마다 뿌려줄 테니 어떻게 되나 두고 봐!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안 이사 새끼 무사한가 두고 보라고!’”
“반말이 아니고.”
불쑥 공장장이 말했다. 어리둥절한 얼굴로 최 과장이 네? 하고 물었다.
“자네 말이야. 존댓말이었지 아마?”
“공장장님 정말 이러깁니까?”
최 과장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나는 상상해보았다. 험악한 얼굴에 성난 목소리, 그리고 공손한 말투. 슬며시 웃음이 나왔다. 최 과장이 나를 흘끗 보더니 소리 높여 변론을 펼쳤다.
“아이, 공장장님! 지금 그런 거 따질 땝니까? 꼬투리 잡히기 싫어서 그런 거지 다른 뜻이 있었던 건 아니에요. 13년째 과장에 머물러 있긴 하지만 뼛속까지 과장은 아니라고요. 전 오로지 본연의 저, 저일 뿐이에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누가 뭐래?”
“그래서요? 그래서 어떻게 됐어요?”
내가 물었다. 그제야 겨우 고삐 풀린 ‘본연의’ 최인선에서 이야기꾼 최 과장으로 돌아왔다.
“‘정말 언론사에 뿌릴 거예요?’ 묻기에 대답해줬지. 언론사뿐이냐, 덕일공업에서 양 공장장을 형사고소할 계획이다, 그러면 양 공장장 입에서 안 이사 이름 나오는 건 시간문제다, 그렇게 지키고 싶었던 안 이사도 잃고, 회사 이미지도 잃는다. 그랬더니 사장이 뭐라는 줄 아냐? ‘안 이사가 고이 잡혀가 줄까요? 앙심 품고 거래처 다 끊어버리는 건 아닐까요?’ 이 새끼는 이 와중에도 거래처 잃을까 그 걱정뿐이더라고.”
“그래서 뭐라고 하셨어요?”
“한마디만 했지. 가까이서 안 이사 지켜보지 않았냐. 알아서 판단해라. ‘그렇죠. 제가 안 이사를 좀 알죠, 안 이사 무서운 사람인 거. 그러니까 못 건드리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두 분도 좀 봐달라니까요.’ 작전을 바꿨는지 사장이 이제 우리한테 떼를 쓰네? 그때 공장장님이 말씀하셨지. ‘덕일공업에 청구한 배상금, 없던 일로 합시다.’ 그랬더니 사장 왈 ‘배상금 일부를 두 분께 나눠드릴게요. 그리고 이 공장장님은 퇴직 후 여생 편히 보내실 수 있도록 제가 다 처리해드리고, 최 과장님은 이 공장장님 후임으로 공장장직 맡으세요. 이제 됐죠?’”
“우아!”
나는 감탄했다. 결국 그 꿈같은 제안을 거절했다는 것 아닌가. 나는 새삼 존경의 눈빛으로 공장장과 최 과장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최 과장이 입을 삐죽이며 투덜거렸다.
“과장에서 공장장으로 승진할 수 있었는데, 공장장님 때문에 다 망했어. 이제 내 평생 공장장 해먹기는 틀렸다고 봐야지. 과장에서 곧바로 공장장이라니, 이게 도대체 몇 단계를 건너뛴 거야.”
“공장장님이 뭐라고 하셨는데요?”
“뭐 별말은 안 했어. 처음엔 그냥 조용히 일어났지. 하도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일어나기에 난 또 화장실이라도 가는 줄 알았지. ‘어디 가세요?’ 아마 사장도 별 뜻 없이 물어봤을 거야.”
“그런데요?”
“협박은 협박답게 해야 하는 거 아냐, 용 사원? 사장이 안 물어봤으면 도대체 어쩌려고 말 한마디 없이 일어나냐고. 그래서 진짜로 언론에 터뜨리기라도 할 거야 뭐야? 덕일공업 살리겠다고 그 자리에 나갔으면 본분에 충실해야지. 안 그래, 용 사원? 어디 가느냐고 사장이 물으니까 그제야 공장장님이 말씀하셨지. ‘내가 좀 바빠요. 장부 복사해서 언론사 돌고, 고소 절차도 알아보려면 지금부터 부지런히 움직여야 해요.’ 사장은 물론이고 나도 헐, 했지. 공장장님 머릿속엔 뭐가 들었는지 알다가도 모르겠다니까. 그렇게 일어날 거면 나한테 미리 언질을 줬어야 하는 거 아냐? 어떻게 나만 남겨놓고 가버릴 생각을 할 수가 있지? 안 그래, 용 사원? 공장장님 그때 왜 그러셨어요?”
잠시 생각하던 공장장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 성질에 자네가 먼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날 줄 알았지. 그렇게 맹한 얼굴로 앉아 있을 거라곤 생각도 못 했어.”
나는 입을 틀어막고 킥킥거렸다. 최 과장은 어이가 없다는 듯 공장장을 쳐다보았다. 그러곤 머리를 절레절레 흔들며 진심 감탄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와, 강적이시다, 우리 공장장님.”
“잠깐, 잠깐만요. 더 원하는 거 있으세요? 말씀해보세요. 제가 힘닿는 데까지 들어드릴게요.”
다급해진 사장이 소리쳤다. 문 앞까지 진출했던 공장장은 다시 자리로 돌아와 앉았다.
“덕일공업에 청구한 배상금, 없던 일로 합시다.”
“그건 안 된다니까요. 우리가 입은 손해가 얼만데 그러세요. 이 공장장님은 어느 회사 직원입니까? 도대체 이해가 안 되네.”
“어이, 사장님. 40년 근속한 모범 사원한테 거 말이 너무 지나친 거 아닙니까. 솔직히 덕일에 청구한 배상금, 해도 해도 너무한 액수 맞잖아요. 이게 죽으라는 소리하고 뭐가 다릅니까.”
최 과장이 눈을 부라리며 말하자 사장이 움찔했다. 그러곤 최 과장 들으라는 듯 투덜거렸다.
“내가 지금 내 직원하고 있는 건지 깡패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네. 이럴 줄 알았으면 보디가드 데리고 오는 건데.”
쉽사리 결론이 나지 않았다. 공장장은 덕일공업을 살리고 싶었고, 사장은 돈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던 공장장이 어쩔 수 없이 절충안을 내놓았다.
“그럼 이렇게 해요. 미래모빌스가 일본에 물어준 금액, 그 절반만 덕일에 청구하는 걸로. 따지고 보면 불량 난 게 꼭 덕일 잘못만도 아니고.”
“그건 안 되죠. 아무리 양보해도 두 배 이하로는 힘들어요.”
또다시 절반과 두 배의 신경전이 계속됐다. 시간이 흘렀고, 공장장도 사장도 지쳐갔다. 생생한 사람은 최 과장뿐이었다. 된다, 안 된다 지켜보기만 하던 최 과장이 흰 천이 깔린 테이블을 탁! 치고는 말했다.
“원금으로 합의 봅시다. 이 정도도 덕일은 허리가 휘청일 정도로 큰 액수라는 거 사장님도 아시잖아요. 안 이사 지켰으니까 사장님 입장에서도 뭐 손해는 아니고. 대신 팁 하나 드릴게요. 안 이사 견제하기 위한.”
사장은 대답하지 않았다. 어떻게 할까 고민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안 이사 견제 안 하실 겁니까? 자기 세상인 양 날뛰는 꼴 계속 지켜만 보실 거예요?”
“일단 들어나 보죠.”
마침내 사장이 말했다. 사장의 가장 큰 고민거리가 안 이사였다. 내칠 수도 그렇다고 품을 수도 없는 악귀 같은 존재. 사장인 자신보다 어쩌면 회사 내에서 더 큰 영향력을 가진, 능력만큼이나 욕심도 야망도 큰 인물. 그래서 더욱 두려운 인물.
“먼저 영업부 정은신 부장을 내치세요. 다음엔 인사관리팀 이난주 과장, 총무팀 김종호 과장 순으로 자르시고요.”
“그건 왜죠?”
“안 이사의 수족들이니까요. 한마디로 충견. 충견 아시죠? 주인을 위해 제 목숨도 바치는 것들.”
그때 슬그머니 공장장이 끼어들었다.
“정은신 부장은 이번에 직접적으로 뇌물 받은 당사자이기도 하고.”
“안 이사가 가만있을까요?”
사장이 물었다. 그러자 최 과장이 가뜩이나 험악한 얼굴을 더욱 험악하게 구기며 결의에 차서 말했다.
“이럴 때 사장님의 위엄을 보여주세요. 언제까지 안 이사한테 끌려다니실 겁니까. 안 이사가 자기 죄를 인정했다면서요. 당신 대신 정은신 부장을 내친다, 그러면 천하의 안 이사라도 아무 소리 못할걸요. 정 안 된다고 하면 덕일에서 고소 들어갈 거라고 하세요. 거래처 끊으려면 끊어라, 대신 당신도 감옥 간다, 같이 죽어보자, 배짱 좋게 먼저 들이받으세요. 고작 정은신 살리겠다고 자기 목숨 내놓을 위인은 절대 아니니까.”
“그럼 다른 과장들은요?”
“6개월에 한 번씩 하는 거 있잖아요. 인사고과. 그걸 이용하세요.”
“안 이사가…… 가만있을까요?”
“제가 도와드립니다. 여기 공장장님도 그렇고요. 천안에 처박혀 있어도 본사에 친한 부장들 많습니다. 그 사람들 움직이면 아무리 안 이사라도 어쩔 수 없을 겁니다. 단, 한 명씩, 천천히.”
그때 또 슬그머니 공장장이 끼어들었다.
“아, 맞아, 참, 그렇지. 정은신한테 밉보여서 쫓겨 온 직원. 평소 정은신한테 꼿꼿하게 굴다 찍혔다지 아마? 이번에 불량 책임 뒤집어쓴 것도 그래서고.”
최 과장이 얼른 맞장구쳤다.
“두말하면 잔소리죠. 15만 대 추가 생산에 그 직원이 얼마나 애를 많이 썼습니까. 하루 스무 시간씩 일했는데, 제 입맛에 안 맞는다고 그런 직원을 쫓아내다니. 이건 양심이 없어도 너무 없는 짓이죠.”
사장이 별 반응을 보이지 않자 공장장이 다시 말했다.
“윗동네를 고립시키려면 아랫동네부터 깨끗하게 청소를 해야 하는데……. 아마 그 친구가 상징적인 의미가 되지 않을까 싶은데……. 정은신 졸개들한테 경고도 할 겸.”
드디어 사장이 반응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 친구 이름이…….”
“용준영이죠.”
“아무튼 그 친구가 상징적인 의미가 될 수 있을까요?”
“되고도 남죠. 영업부에서 정은신하고 맞짱 뜬 건 그 친구밖에 없을걸요. 아, 얼마 전에 정은신 처남 장례식이 있었다던데…….”
“보고 받았어요.”
“사장님이 직접 알아보시면 되겠네요. 조문객 명단. 그걸 보면 많은 생각이 드실 겁니다. 왜 정은신이 제2의 안 이사라고 불리는지.”
“게임 끝. 용 사원 칭찬할 땐 시큰둥하니 꿈쩍도 않던 사장이 제2의 안 이사라는 말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전화를 하더라고. 비서한테. 곧 회사로 들어갈 테니 조문객 명단 알아보라고. 안 이사가 두렵긴 정말 두려운가봐.”
말을 마친 최 과장이 빙그레 웃으며 나를 쳐다보았다. 나 잘했지? 하는 표정으로. 내가 물었다.
“그래서요? 사장님이 더 하신 말씀 없으세요? 저 이제 복직되는 건가요?”
“하나씩 물어봐. 그러다 숨넘어가겠네.”
“저에 대해서 더 하신 말씀 없으시냐고요.”
“없었어.”
“이게 끝이에요?”
“응.”
“뭐가 이렇게 심심해요?”
“심심하면 소금 쳐.”
최 과장의 싱거운 농담에 이어 공장장이 무심하게 툭, 말을 던졌다.
“끝이 아니고, 시작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