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마루 Aug 25. 2023

그럼 조심해서 가


거리에 가로등이 하나씩 켜지는 시간은 발걸음을 재촉하게 한다.


횡단보도에서 신호등이 초록색으로 바뀌어 걷기 시작하는데, 옆에 열 살쯤 되어 보이는 남자아이와 그보다 작은 여자아이가 손을 잡고 길을 건넌다. 거의 건넜을 무렵 그 남자아이가 여자아이의 손을 놓더니 "그럼 조심해서 가."라고 말하고 왔던 횡단보도를 다시 뛰어간다. 남자아이는 오빠겠고 여자아이는 작은 가방을 들고 있는 걸 보니 미술 학원에라도 가는 모양이다. 아마도 아이들의 엄마가 횡단보도까지 바래다주라고 한 듯 보인다. 꼬맹이 오빠의 말이 걷는 내내 머릿속에 둥둥 떠다닌다.


그럼 조심해서 가. 그럼.. 조심해서 가. 그럼.. 조심해서.. 가.


갑자기 마음이 몽글해진다. 딱딱한 나의 모세혈관 구석구석까지 온기가 도는 것 같다. 이 말은 입 밖으로 나온 즉시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여자 아이가 도착할 때까지 계속 안녕을 바라며 함께 걸어가는 말이리라.


오래전 엄마의 삼우제를 지내고 유품을 정리하다가 손바닥 크기의 수첩을 발견했었다. 그곳엔 날짜와 이름과 금액이 적혀있었는데 대부분 삼만 원 간혹 오만 원도 쓰여있었다. 아마 당신이 부조한 결혼식 축의금을 적어 놓은 듯했다. 딸 둘을 두었으니 몇 년 있으면 자신도 그동안 뿌린 것을 거둬들일 수 있을 거라 꿈꾸면서 한  한 줄 채워나갔을 엄마를 생각한다.


여름휴가로 부산 집에 왔다가 서울로 올라가는 나를 엄마는 그날따라 유독 버스정류장까지 데려다준다. 평소의 엄마라면 집에서 인사하고 말았을 텐데 왜 그랬을까? 사람에게는 오감에 더해 육감이라는 것이 있다고 믿는다. 그렇지 않다면 무뚝뚝한 엄마의 평소답지 않은 행동을 설명하기 어렵다.


버스가 오자 나는 버스에 올랐고, 엄마는 "그럼 조심해서 가."라며 손까지 흔들었다. 나도 어색하게 손을 흔들었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그날로부터 6개월 뒤 엄마가 수첩에 한 줄 한 줄 적어 놓았던 그 삼만 원과 오만 원은 당신의 장례식에 되돌아왔다.


낡은 가로등이 꺼졌다. 휘황한 네온에 눈을 빼앗겨 구석을 밝히 먼지 쌓인 그 가로등은 안중에 없었다. 그렇지만 한결같이 그 자리를 지키고 서 있을  알았다. 가로등이 켜지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그땐 몰랐다.


아직도 가로등 꺼진 길에서 서성이는 이가 있다면, 조심해서 가요.

매거진의 이전글 내 귀에 매미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