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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Mar 01. 2024

슬픔을 샀다

일이 생겼을 때 사면 이미 늦는 물건들이 있다


외삼촌 댁에 다녀왔다. 그동안 돌아가신 엄마가 생각날 때마다 내게 전화를 셨는데, 나는 왠지 가기 싫어서 바쁘다는 핑계를 계속 댔다. 유난히 엄마와 닮은 삼촌이다. 형제 많은 집의 막내였던 엄마가 먼저 돌아가시고, 그 후 몇 분이 시간 차를 두고 돌아가셨다. 엄마의 남은 형제들 중, 엄마 바로 위 삼촌과 그 바로 위의 이모가 암 진단을 받았다. 언제 어떻게 될지 모르니 요즘 들어 전화를 자주 하신다. 많이 야윈 삼촌의 모습을 뵙고 돌아왔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얼마 전, 병원 침대에 누워계신 아버지 곁에 앉아 있다가 갑자기 번뜩, 무슨 생각이 떠올랐다. 그러자 안절부절못하며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퇴근하고 온 동생과 교대를 하고 병원 근처를 돌아다녔다. 대학병원 근처에는 환자와 보호자에게 소용될 웬만한 것들이 다 있기 마련이다. 사진관으로 갔다.


평소에 지갑에 넣고 다니던 아버지의 사진을 사진관에 맡겼다. 실물보다는 못하지만 잘생긴 아빠의 모습이 보기 좋은, 내가 좋아하는 사진이다. 영정사진을 만들어 달라고 했다. 가슴이 뛰었다. 아직 아버지가 돌아가시지 않았고, 돌아가시지 않기를 그렇게 기도하면서 사진관에서 영정사진을 부탁하고 있는 나의 이성이 미워서 죽을 뻔했다. 차라리 오래 걸리면 좋겠는데 사진관 주인은 두어 시간 후에 찾으러 오라고 한다. 나는 내일 찾으러 오겠다고 하고 사진관을 나섰다. 찬물을 끼얹은 듯 사방은 조용하고 아득한 밤이었다.


내가 가지고 있던 사진보다 크게 확대된 아버지의 얼굴이 낯설었다. 위독한 아버지 때문에 나도 병원에서 숙식을 하고 있었기에 영정사진을 차 트렁크에다 숨겼다. 처음으로 남의 집 담을 넘은 초보 도둑처럼 심장이 뛰다 못해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았다. 아버지가 자신의 발로 일어서서 병원 주차장에 있는 차 트렁크를 열어 본다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혹여 들키면 어떡하나 싶어 종이에 싸고 또 싸고 꼭꼭 여미고 또 여며서, 숨겼다. 


차에 폭탄이 실려있는 것을 혼자만 알고 있는 느낌이었다. 내 신경줄은 차 트렁크 속 아버지의 사진에 뻗쳐있었고, 마냥 불안했다.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얼마나 섭섭해하실까 싶어 선잠도 잘 수 없었다.


열흘쯤 후, 그 사진은 차 트렁크에서 해방되어 존재의 이유를 슬프게 증명했다. 


일이 생겼을 때 사면 이미 늦는 물건들이 있다. 삼촌 댁에서 나온 후, 검은색 정장을 새로 샀다. 


슬픔을 사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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