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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마루 Nov 06. 2023

굿바이, 한 세계가 저물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우리에게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있어.
그래서 때로는 실수를 저지르기도 해. 하지만 우리에게는 자신이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결정할 수 있는 힘이 있어.
그래서 우리는 실수했을 때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거야.
- 요시노 겐자부로 <그대들, 어떻게 살 것인가> 中




노회한 기성세대가 되지 말자 다짐하면서 나이를 먹어왔지만, 나도 모르게 꼰대적 발상을 하고 있을 때가 있다. 어쩔 수 없는 인간의 노화 현상인지도 모르겠지만, 그럴 때마다 나는 동화책을 읽는다. 내 서재엔 아이가 있는 느 집보다 동화책이 많다. 동화들엔 짧지만 완결된 하나의 세계가 들어있다. 애니메이션도 마찬가지다. 아직도 내 베프는 e가 붙은 앤 셜리다.


미야자키 하야오를 좋아했던 것도 시리즈가 아닌 한 작품에 완결된 세계가 들어있기 때문이다. 물론 한 사람의 머릿속에서 나온 작품들이기에 어느 정도 연결성은 가지고 있지만 일일이 열거하지 않더라도 작품 개개가 하나의 세상을 담기에 충분했다.


거장이라 일컫는 미야자키 하야오의 마지막 영화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시종일관 미야자키 하야오의 머릿속, 아니 꿈속을 유영하는 듯하기도 하고 큰 서사가 없어 아름다운 수채화 영상들의 나열인 것 같기도 하다. 그렇지만 거장의 마지막 영화인만큼 상징을 찾아내느라 나는 꽤 머리를 쓰며 감상할 수밖에 없었다.


사진 출처: 네이버


1940년대 일본이 배경인 점으로 인해 초반에 썩 달가운 마음으로 영화에 빠져들기 어렵다.  어쨌거나 일본은 변명의 여지도 없는 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이고 아직도 피해를 입은 한국과 중국을 비롯한 동남아시아 국가들에게 제대로 된 사과조차 하지 않고 있기에, 어쩌면 태생적으로 배경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가지고 영화를 대할 수밖에 없다.


마히토가 왜가리를 만나 '이세계'로 들어간 후부터는 더욱 머리가 복잡하다. 하야오의 많은 작품이나 성향이 좌익에 가까운 인물이라고 알려져 있었기에, 일본의 군국주의를 보여주는 많은 상징들을 그냥 지나치기 어려웠다. 욱일기를 닮은 키리코의 배의 돛이며, 고래를 잡아 검은 얼굴을 한 사람들에게 (동아시아인들이 연상된다) 고래의 살점들을 나눠주는 장면들에서는 식민사관을 미화하는 듯하고, 고래의 내장으로 자국의 아이들로 태어날 와라와라들을 먹이는 장면은 침략국의 변명으로 들린다. 어쩌면 이것이 미야자키 하야오의 진짜 속마음일까 싶어 실망스럽기까지 하다.


파시스트 지도자를 연상시키는 앵무새 대장과 그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많은 앵무새들은 군국주의를, 굶주림에 시달리던 펠리컨들은 서양 제국주의자들의 모습이다. 이들 앵무와 펠리컨들은 '이세계'가 붕괴되자 현실세계로 돌아와 평범한 새들이 된다. 이것은 마치 잔혹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자들이 종전 후 각자의 집으로 돌아와 평범한 가장으로 살아가는 '생각하지 않는 죄'를 저지른 또 다른 아이히만을 보는 듯했다.


하야오 영화의 테제는 평화와 자연이었다. 이 작품에서도 아름다운 자연은 돋보인다. 모성애도 자연의 일부라고 보면 마히토를 낳기 위해 자신의 세상으로 돌아가는 히미(히사코)의 선택은 하야오의 주제에 닿아있다. 그러나 진보적 성향의 반전주의와 그의 작품 속 아나키스트적인 면모, 또 그 스스로 전쟁을 혐오하는 발언들을 해왔기에 이 영화에서 자기모순에 빠진 것처럼 보인다.  그것을 하야오는 '자신도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라고 얼버무리는 것 같다. 대신에 마히토가 자신에게 자리를 물려주려는 큰할아버지에게 가타부타 대답하지 않는 것으로 그 세계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을 간접적으로 보여준다.


너만의 탑을 쌓아라. 이 세계가 아름다운 세계가 될지 추악한 세계가 될지 전부 네 손에 달려 있다.


이 세상은 붕괴된 큰할아버지 세계와, 이후 마히토가 새롭게 쌓은 세계(아마도 하야오 자신의 필모), 그리고 우리가 쌓아 올릴 다음 세계로 구분할 수 있을 듯하다. 할아버지 세대는 이렇게 잘못 쌓아 올려졌고, 그래서 나는 내 세계를 이렇게 쌓아 올렸으니, 이제 그대들은 어떻게 세계를 쌓아  것인가 묻는 것이다.


퇴작의 모호함은 이제 대중들을 떠나는 미야자키 하야오가 큰할아버지 세대가 잘못 쌓은 업보를 반복하지 말자는 다짐과 패전국이란 멍에를 짊어지고 살아가는 자국에 대한 연민과 위로였을지도 모르겠다고 이해해 본다.


그러니까 무슨 일을 하더라도 너 자신에게 실망해서는 안 돼.
네가 실수를 이겨 내고 다시 일어선다면 누군가는 그 노력과 마음을 알아줄 거야.
- 미야자키 하야오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이렇게 미야자키 하야오의 한 세대가 저물었다. 누가 뭐라고 해도 그는 한 세계의 '거장'이었음에는 이의가 없다.



#미야자키 하야오 # 그대들은 어떻게 살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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