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삼삼한 여름추억여행

먼 북소리 / 무라카미 하루키

by 마루


멀리서 들려오는 북소리에 이끌려
나는 긴 여행을 떠났다.
낡은 외투를 입고
모든 것을 뒤로한 채...

모두들 떠나는 휴가철이 되면 나는 이 『먼 북소리』를 꺼내 읽는 것이 루틴이 된 것 같다. 20여 년 전에 처음 읽은 책을 1년에 한 번은 꺼내 읽는 것이다. 휴가지에서 처음 이 책을 읽었기 때문인 것 같기도 하고, 또 한창 빠져있던 하루키의 유럽 여행기라서 그런 것 같기도 하다. 나이가 들면 돌아누워서 추억에게 물을 준다고 하는데, 난 늘 이맘때 이 책을 읽으며 그때를 더듬는다.

하루키는 서른일곱 해의 어느 날 북소리에 이끌려 먼 유럽으로 여행을 떠난다. 떠나기 전, 그의 머릿속에는 조르지오와 카를로(물론 로마에 도착해서 지은 이름이지만)라는 벌 두 마리가 붕붕붕 날아다니고 그 벌들은 뇌수까지 침범해 하루키는 아주 피폐해 있었다.


그때 멀리서 북소리가 들린 것이다. 물론 북소리란 그저 미약한 충동이었는지 모른다. 일탈이란 이름으로 까닭도 없이 어딘가로 여행 혹은 도망을 치고 싶은 건 하루키처럼 유명한 소설가가 아니더라도 누구에게나 일어나는 일이다. 하지만 웬만한 자신감이 없이는, 반대로 웬만한 자포자기 상태가 아니면 잘 저질러지지 않는 것 또한 일탈이다. 나도 어렸거나 혹은 젊었던 시절 아삼삼한 추억이 떠오르면, 오랫동안 간직해 온 꿈처럼 '일탈'이란 단어가 머릿속을 날아다니곤 한다.


그렇다. 나는 어느 날 문득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 졌던 것이다.
그것은 여행을 떠날 이유로는 이상적인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간단하면서도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그리고 어떤 일도 일반화하지는 않았다. 어느 날 아침 눈을 뜨고 귀를 기울여 들어보니 어디선가 멀리서 북소리가 들려왔다. 아득히 먼 곳에서, 아득히 먼 시간 속에서 그 북소리는 울려왔다. 아주 가냘프게, 그리고 그 소리를 듣고 있는 동안, 나는 왠지 긴 여행을 떠나야만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이것으로 충분하지 않은가. 먼 곳에서 북소리가 들려온 것이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그것이 나로 하여금 서둘러 여행을 떠나게 만든 유일한 진짜 이유처럼 생각된다. - 머리말 中


하루키의 『먼 북소리』는 1986년 가을부터 1989년 가을까지 3년 동안 아내와 함께 이탈리아를 본거지로 해서 그리스의 여러 섬들에서 머물고, 가끔 오스트리아의 잘츠부르크를 비롯해 유럽의 작은 마을들을 여행하며 쓴 스케치를 모은 여행기다. 외국에서의 짧지 않은 이런 생활을 일컬어 하루키는 '상주적 여행자'라고 불렀다. 이때 유럽에 상주하며 하루키는 장편소설 『상실의 시대』 『댄스 댄스 댄스』, 단편집 『TV피플』을 완성시킨다. 특히나 『상실의 시대』 를 집필할 때의 심경이 잘 나타나 있어 더욱 반가운 에세이다.


하루키가 3년 동안 쓴 여행기를 나는 짧은 휴가철에 아무 페이지나 펼쳐서 몇 페이지씩 읽다 보면 내가 하루키와 유럽여행을 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든다. 그의 유머와 말투, 그리고 투덜댐 조차 정겹게 느껴지고 그런 그가 사랑스러워진다.


아테네
나는 자동차가 거의 다니지 않는다는 발렌티나의 말에 상당히 매력을 느꼈다. 아주 이상적인 그리스 생활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아름다운 해변, 자동차가 없는 섬, 조용한 나날... P40~


스펫체스 섬
돌담은 블록 담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다. 큰 비만 오지 않는다면 그것은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정말 멋진 담이다."몇 년 뒤에 다시 큰 비가 오면 또 무너지겠지.""무너지면. 또다시 쌓겠지."하고 아내가 말한다. 그렇다, 그들은 벌써 몇 천 년이나 그 일을 반복하고 있는 것이다. 나는 역시 그리스인은 될 수 없을 것 같다. P.56~


미코노스
이 한 달 반이라는 기간은 나에게 도대체 어떤 의미가 있었을까 하고, 이 철 지난 에게 해의 섬에서 나는 대체 무엇을 했던 것일까. 잠시동안 거기에 대해 아무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진짜로 생각이 나지 않는 것이다. 내 머리에는 군데군데 구슬 같은 공백이 생겨 있다. P.138~


그리스의 이 섬 저 섬을 다니며 때로는 며칠, 길게는 몇 달 동안 그곳에 머무른다. 어느 작은 섬에서는 폭우가 내려 며칠 동안 집안에서 역류해 들어오는 물을 닦아내며 지내야 했고, 엄청난 주차난을 겪고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의 신 내린 주차솜씨에 감탄한다. 시실리에서는 달리기를 하면서 겪게 되는 황당한 일들을 이야기하고, 외딴 마을을 지날 때 갑자기 자동차가 고장 나서 겪은 일, 술 취한 운전기사가 운전하는 마을버스를 타고 급기야는 운전사와 승객 모두 맛있는 치즈를 먹고 포도주를 마시며 술판을 벌인 일을 읽으면서는 시골마을의 전원적인 풍경이 오롯이 그려지기도 한다.


그리고 자신의 낡아빠진 나이키 조깅화를 버리려고만 하면 친절한 그리스 사람들이 찾아 되돌려 준다. 결국은 어느 한적한 마을의 카페 테이블 밑에 종이로 둘둘 말아 버려두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버스를 타고 호텔로 돌아왔는데, 그 후 며칠 동안 하루키는 누군가 문을 두드리고는 '손님 이 운동화를 놓고 가셨습니다'하며 찾아올까 조마조마했다는 이야기에서는 폭소를 터트리고 만다.


로마
메타의 바르에는 마을의 남자들이 모두 모여 있다. 일요일 오후에 남자들은 집 안에 있으면 안 되는 것이다. 일요일 오후에는 여자들에게 바느질 같은 것을 시켜놓고 남자들은 바르에 모여 맥주를 마시거나 카드놀이를 하거나 이런저런 남자들만의 얘기를 나눈다. 오랜 옛날부터 내려오는 습관이라고 한다. 세상에는 참 여러 가지 습관이 있다. 나처럼 일요일 오후에 집에서 느긋하게 업다이크의 새로 나온 소설을 읽는 것을 좋아하는 사람은, 남성다움을 과시하는 이탈리아에서는 살아갈 수 없다. P. 210~


오스트리아
그림엽서를 샀더니 비 오는 날의 잘츠부르크 그림이 있고, 뒤에는"비가 많기로 유명한 잘츠부르크"라고 써져 있었다. 그림엽서에도 사용될 정도면 어지간히 비가 많이 내리긴 하나 보다. 아침마다 눈을 뜨면 비가 내리고 있다. 잘츠부르크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는 어디를 가도 정말 비가 많이 왔다. P.466~


이탈리아에서는 여권이며 카드등을 모두 도둑맞고 전전긍긍하는 하루키, 이탈리아 자동차는 절대로 사지 말라는 사람들의 말을 무시하고 이탈리아제 자동차를 샀다가 오스트리아 시골마을에서 곤욕을 치른 이야기, 그리고 맛있는 음식이야기, 포도주 이야기 등등 이렇게 하루키의 여행을 따라가다 보면 어느새 나도 그 여행에 동행자가 된다. 그것이 이 여행기가 주는 진정한 미덕이 아닐까 싶다.

무라카미 하루키처럼 여행을 제대로 즐기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잘 쓴 여행기란 이런 거다. 소위말해 '어디로 잘 다녀왔습니다'라는 기행문이 아닌, 여행지의 풍경과 자신과의 관계성을 항상 고찰하는 하루키 특유의 여행 방법론은 가볍게 읽히지만 묘한 여운을 남긴다.

올 여름은 내가 좋아하는 장소인 경주 보문호수의 뷰를 보며 『먼 북소리』읽었다


그 어떤 여행기도 주지 못하는 '먼 북소리'에 이끌려 매년 나는 하루키의 지난 시간들 속을 기웃거린다. 내 청춘이었던 그도 늙어가고, 그의 추종자였던 나도 늙어가니 세상은 참으로 공평하다. 늘 휴가지에 이 책을 가져가고 또 읽다 보니 20여 년 쌓인 내 추억도 만만치 않다. 올 휴가에는 경주 보문호수의 뷰를 보면서 하루키의 『먼 북소리』를 읽었다. 이 또한 아삼삼할 한 페이지의 여름추억이 될 게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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