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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지의 꽃과 태양의 꽃

by 마루
아직도 노트북 화면이 아닌 책으로 인쇄된 내 글은 낯설다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노트북을 열었다. 번득이는 글감이 떠올라서가 아니라 끝내 밖으로 나오지 못한 파일 속 글들을 지우기 위해서였다. 제목만 있는 글, 저 혼자 한 편의 글이 될 수 없어 조각난 글감들, 이제 문장 다듬기만 하면 바깥세상으로 나갈 수 있겠다 꿈꾸었던 글들에 인정사정없이 삭제 버튼을 눌렀다. 유산의 아픔이 어떤 것인지 어렴풋이 알 것 같다. 세상에 나왔으면 남들을 깜짝 놀라게 할 글감이 아니었을까? 한기 어린 심장들을 잠시 녹여줄 따뜻한 글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자꾸만 그 아이들을 놓친 것이 어미의 못남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하니, 어쩔 줄을 모르겠다.

그럴 때가 있다. 하얀색의 바탕화면에 깜빡이는 커서가 낯설게 보일 때. 가슴속에 담아두면 될 것을 굳이 조악한 단어로 문장을 만들고 문단을 쌓아, 글로 내어놓을 필요가 뭐가 있나 회의감이 밀려올 때가 있다. 그럴 때면 멋을 부리듯 고뇌하며 피워내는 문장이 허영이다 싶어 백스페이스를 사정없이 누르고 노트북을 덮게 된다. 음지의 꽃으로 잠시 잠깐 내게 머물다가 이제는 가상의 공간 어디쯤에서 떠돌 내 문장들에 삼가 안녕을 고한다. 비록 음지에서 자란 꽃이지만 물 주고 더 길러 볼 것을, 벌써 후회가 밀려온다. 분연히 떨치고 일어나 길을 나섰다.

길에는 계절이 한창이다. 미온한 바람이 불어 가로수들의 가지를 흔든다. 잎눈엔 잎을, 꽃눈엔 꽃을 내어놓으라고 바람이 나무에 몸을 비벼댄다. 그 등쌀에 목련은 함박웃음 같은 허연 꽃송이를 벌렸다. 해낙낙한 그 웃음이 가지를 누른다. 나도 무언가를 주섬주섬 내놓아야 할 것 같은, 봄 길을 걷는다.

'살아 있다'라는 온전한 기쁨을 매분 매초 느끼는 사람이 있을까. 사람은 그저 살아가거나 살아진다. '살아 숨 쉬고 있다'라는 당연한 증명이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생의 감각을 느끼지 못했다. 평범한 일상과 안전한 것만 추구하는, 일이 없을 때면 늘 집안에만 틀어박혀 있는 내가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염려스러울 지경이라 걷기를 시작한 지 2년이 넘어간다. 아파트 주변을 걷기도 하고, 차를 타고 멀리 나가 걷기도 한다. 강가를 걸을 때도 있고, 숲길을 걸을 때도 있다. 도시를 걷기도 하고 한적한 시골길을 걷기도 한다. 그곳에서 만나지는 것들을 보고 듣고 느끼면서, 살아있다는 것을 올곧게 감각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조금씩 걸었지만, 이제는 하루에 10킬로미터쯤은 거뜬히 걷는다. 걷기 시작할 때는 백만 가지 생각이 머릿속에서 수군거리다가도 숨이 찰 때쯤이면 오로지 걷기에만 집중된다. 한순간도 생각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는 사람이 오직 발걸음에만 집중하는 것이 생경하다. 말랑거리던 종아리엔 근육이 붙었고, 흐늘거리던 마음도 딴딴해지는 것 같다.

걸을 때는 당연한 것들이 변한다. 시간관념도 공간의 개념도 달라진다. 나에게 올 것은 기다리지 않아도 올 것이고 떠나가는 것은 붙잡아도 가는 것인데, 비빌 언덕도 없이 혼자 동동대던 마음이 어느새 많이 누그러지고, 오로지 땅을 딛고 있는 든든한 두 다리와 길에서 듣는 소리, 눈앞에 보이는 풍경들만 느낀다. 몸은 지치지만, 마음은 점점 더 가벼워지고, 체온은 올라가지만, 잡념들은 내려간다. 몸을 움직여 걷는 것이 무기력했던 감각을 조금씩 깨어나게 하는 것이다. 인간은 움직이게 설계되었다는 말이 맞는 말인 것 같다.


작년 이맘때 자주 가는 산책로 허름한 콘크리트 계단 구석에 피어있는 민들레 한 송이를 본 적 있다. 너무 기특해 사진을 찍어 두기도 했다. 오늘도 그곳을 지나면서 눈길을 주는데, 아니나 다를까 민들레가 작년보다 더 환하게 피었다. 바람이 살랑이는 계단 가장자리에 걸터앉았다. 봄날의 태양을 닮은 민들레와 눈을 맞춘다.

처음엔 바다가 보이는 푸른 언덕을 꿈꿨을지 모른다. 아니면 하얀 울타리가 쳐져 있는 예쁜 집의 정원에 내려앉고 싶었을지도 모르고, 아주 먼 이국에서 누구보다 멋진 꽃을 피우리라 꿈꾸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민들레의 홀씨는 도시 변두리의 허름한 계단 가장자리에 앉았다. 꿈꾸던 곳과 다른 현실인데도 이렇게 의연히 필 수 있을까. 계단 틈새를 비집고 바람 불면 뿌리째 흔들릴 이곳에 앉아 있으니 어떤가, 묻고 싶어졌다.

태양의 꽃이 내게 말을 건넨다. ‘나를 봐, 여기도 괜찮아’라고. 가다가 주저앉더라도 가지 않은 것보다 못한 것은 아니라고. 걷다 보면 조금 헤맬 수도, 뒤따르던 사람에게 길을 내줄 때도 있는 것이라고 다독인다. 길을 잃으면 새로운 풍경이 보인다고도 한다. 이 노란 소우주는 위태롭지만 평안하고, 흔들리지만 굳건해 보인다.

노트북 속에서 사라진 꽃들을 생각한다. 시멘트 계단 틈 사이에서 핀 민들레 한 송이가 쓰는 生의 감각을 다시금 흔든다. 메마른 세상에서 힘을 내자고 들고 있던 생수를 나눠 마셨다. 물 한 모금에 나도 민들레도 생기가 돈다. 걸어온 거리만큼 다시 걸어가야겠다. 돌아가서 다시 꽃들을 키워야겠다.

내 음지의 꽃도 태양의 꽃처럼 의연하기를, 비록 현실은 콘크리트 계단 끝자락일지라도 장하게 피어나길 바라본다.

- <계간 현대수필> 2025 가을 호 -


글감을 준 네게 고맙다 내년에도 장하게 피어나길


#그래도 일 년에 서너 차례 청탁이 온다. 내년엔 생애 첫 에세이집이 출간될 수 있도록 열심히 쓰고 있다. 나보다 기다리는 사람이 많다. 그들은 내게 부담 주지 않으려고 천천히 쓰라고 하지만, 얼마나 게으르면 등단 십 년이 훨씬 지나 첫 책을 엮을까. 반성하고 있는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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