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요새에 관한 명상 / 김원일
“우리는 여름을 한대 추운 지방에서 번식해 가을이면 지구 반을 가로지르는 여행길에 오른다. 우리는 떠나야 할 때를 안다. 얇은 햇살 아래 파르스름하게 살아 있던 이끼류와 작은 떨기나무가 잿빛으로 시들고, 긴 밤이 북빙의 찬바람을 몰아올 때쯤이면 여정의 채비를 차린다. 여름 동안 자란 새끼도 날개를 손질하며 출발의 한때를 기다린다. 우리의 여행은 생존에 필요불가결한 자유를 찾기 위한 고통의 길고 긴 도정이다. 처음 떠날 때, 우리는 무리를 이루지만, 창공을 가로질러 쉬지 않고 날 때는 혼자 날 뿐이다. 마라톤 선수가 42.195킬로미터를 완주할 때 오직 자신과 싸우듯, 작은 심장으로 숨 가빠하며 혼자 열심히 난다. 그렇다고 방향이나 길을 잃는 법은 없다. 혼자 날지만 결코 혼자가 아니기 때문이고, 내 유전자 속에는 조상새로부터 물려받은 선험적인 길눈이 따로 있다. 우리는 각각 떨어진 개체지만 나는 속도가 일정하고, 행로가 분명하기에 낙오되거나 헤어지지 않는다.” - 『도요새에 관한 명상』 p71(문학과 지성사)
이 소설의 주인공 병국이 도요새의 목소리를 빌어 이야기하는 이 대목을 좋아한다. 이 의젓한 도요새의 독백을 읽을 때마다 어떤 희망이 샘솟는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비록 소설 속에서 도요새는 슬픈 존재지만 나는 왠지 그런 기분이 들며 어떤 용기가 생긴다. 하물며 난, 인간이다.
이 작품은 동진강 하구를 배경으로 삼아 다양한 방식으로 살아가는 한 가족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소설 속 도요새는 실향민인 아버지에겐 고향을 떠올리게 하고, 운동권인 병국에게는 환경운동의 투사가 되는 계기이며, 동생 병욱이는 도요새를 죽여 박제상에게 넘겨 돈을 버는 수단으로 전락하는 존재다. 소설 속 동진강은 우리나라에 실제 존재하는 강이지만 개발과 간척으로 신음하는 우리네 강 모두가 된다.
나는 우리나라 최대의 철새도래지 부산의 낙동강 하구 을숙도 근처에 살고 있으므로, 나그네새인 도요새가 지나가는 계절인 봄가을만 되면 강가에 나간다. 오래전 『도요새에 관한 명상』을 읽은 후 위에 발췌한 저 대목 때문에, 도요새에 매료되었다. 지난주에도 을숙도와 강 건너 명지갯벌을 헤매다가 내가 제일 좋아하는 마도요를 비롯해 청다리도요, 중부리도요 등을 만났다. 일주일 정도 매일 나가서 그들을 보다가 돌아왔다.
이미 오랫동안 소설로 도요새에게 반한 상태에서 실물 도요새들을 보면 더 좋아할 수밖에 없다. 도요새들은 종류가 많은데, 며칠 전에는 ‘마도요’ 중에서 멸종 위기 2급인 ‘알락꼬리마도요’를 마주했다. 빠른 걸음으로 갯벌 위를 걷는 녀석을 따라 나도 부지런히 걸었다. 마도요와의 산책이라니. 모든 걱정이 사라진 순간이었다. 저 멋진 부리를 보라. 부리가 머리 길이의 3배쯤 된다.
도요는 종류에 따라 조금 다르기는 하지만 주로 시베리아 동북부에서 번식하여 필리핀이나 호주 등지에서 월동한다. 매년 2만 7천 km 거리를 왕복한다니, 인간의 두 팔과 다리는 뭔가 싶기도 하다. 아! 그래서 도구를 만들었잖아 그러면 할 말은 없지만.
도요새가 장거리 비행에서 살아남으려면 중간 기착지에 들러 몸을 쉬고 영양 섭취도 해야 한다. 그게 우리나라 서남해안 갯벌이다. 일주일 정도 지친 날개도 쉬고, 먹이도 충분히 먹고 다시 비행에 나선다. 그런데 태평양을 건너는 중에 쉴 곳이 없는 1만 km 구간이 있다고 한다. 이 구간을 지날 때는 물 한 모금 먹지 못하고 잠도 잘 수 없다. 해서 녀석들의 30% 정도는 비행하다 죽기도 하고, 월동지에 도착하더라도 몸무게가 거의 40%가 줄어든다. 왜 이리 힘든 삶을 선택했는지, 한낱 인간으로선 짐작할 수가 없네.
소설 속에서 도요새 무리가 자유롭게 날아가는 모습은 자유인이 되고자 하는 병국의 이상을 상징한다. 그러나 새들은 등대에 부딪히고 매의 공격을 받고, 사냥꾼에게 포획되고, 오염된 환경에 중독되는 꿈속 상황은 병국이 느끼고 있는 좌절감과 무력감, 환경 문제에 대한 작가의 위기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그리고 분단의 아픔, 물질 만능주의, 부동산 투기와 난개발 등 소설 속 1970년대의 사회의 문제들 중 어느 것 하나 속 시원하게 해결된 것이 없다. 그렇다면 소설 속의 이 문제들은 지금 우리와 별개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5백만 년 전 신생대부터 조상새는 고통의 긴 여행을 터득해 왔기 때문이다. 인간이 감히 상상할 수 없는 바다와 하늘이 맞물려 있는 무공천지에 길을 열어 봄가을로 두 차례 대이동을 한다. 오직 생활환경에 적응하기 위해서라고 치부한다면 인간도 거기에서 예외일 수 없다. 오히려 인간은 환경에 적응한다는 핑계로 사악해지고, 탐욕스럽고, 음란하고, 권력욕에 차 있다. 자연의 환경을 파괴하고 끝내 너희들을 파멸의 길로 이끌 물질문명의 노예가 되지 않았는가…… p.72
이들의 비행을 보면 인간의 오만함을 다시 생각하게 한다. 또 물질적 욕망, 환경에 대한 무감각, 좌절된 현실이 안고 있는 문제들에 대해 고민한다. 비록 오래전 소설이지만 이 소설은 환경오염과 민족 분단이라는 당대(지금도 해결되지 않은) 우리 사회가 직면한 과제를 제시하여 문학이 우리 사회에서 할 수 있는 역할을 보여 준다.
병국처럼, 병국의 아버지처럼 우리는 저마다의 도요새 한 마리쯤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 내년 봄 또다시 나를 스쳐 지나갈 나그네를 벌써부터 기다리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