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역은 작가의 날개

상실의 시대 1장

by 마루


삼십 년 가까이 하루키를 읽으면서 우리나라에 번역 출간된 그의 작품들을 대부분 가지고 있다. 하루키의 작품은 몇 년 간격으로 독점 출판사가 바뀐다. 그러면 산뜻하게 새 옷을 갈아입은 책들을 다시 선보인다.

그의 출판은 그동안 한양 출판사, 열림원, 백암, 창해, 문학사상사, 문학 동네, 민음사 등등 많은 출판사들이 앞다퉈 출판을 해왔다. 그래서 꽤 많은 역자들이 번역을 했는데, 번역은 제2의 창작이란 말처럼 역자의 역량에 따라 작품의 질이 달라지기도 하는 것이 늘 아쉽다. (최고의 역자는 말할 수 있어도, 최악의 역자는 말할 수 없다.)


<노르웨이의 숲>을 번역한 역자들은 유유정, 김난주, 양억관이 대표적인데 각각 제1장의 번역본을 실어 본다.

평가는 하지 않기로 하지만 나름대로 토를 달자면 유유정 번역은 좀 더 묘사적이고 섬세하다. 그리고 각 장마다 소제목이 붙어 있다. 대부분 우리 세대들은 <상실의 시대>라는 명 제목의 문학사상사의 책으로 <노르웨이의 숲>을 알게 되었으리라.

양억관은 문장이 간결하고 군더더기 없이 매끄러운 것이 특징이다. 김난주는 최근 일본 문학의 역자 중에 가장 돋보이는 번역가로 원문에 충실한 느낌을 준다.(그녀의 에쿠니 가오리 번역을 나는 매우 좋아한다.)

김난주와 양억관은 부부 사이로 두 사람 모두 <노르웨이의 숲>을 번역했다는 것이 이색적이다.


훌륭한 번역은 작가에게 날개를 달아주기도 하고, 그 날개를 꺾기도 한다. 아래 상실의 시대 1장의 번역을 보면 같지만 미묘하게 다르다. 어느 역자가 하루키의 감성을 고스란히 그려냈는지 일본어를 알지 못하는 나로선 완벽한 판단은 불가능하지만, 하루키의 문체라면 이렇지 않을까 싶은 번역본은 있다. 비밀이다.

# 양억관 역 / 민음사 2013 <노르웨이 숲>

[1장]

서른일곱 살, 그때 나는 보잉 747기 좌석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기체가 두꺼운 비구름을 뚫고 함부르크 공항에 내리려던 참이었다. 11월의 차가운 비가 대지를 어둡게 적시고, 비옷을 입은 정비사들, 밋밋한 공항 건물 위에 걸린 깃발, BMW 광고판, 그 모든 것이 플랑드르파의 음울한 그림 배경처럼 보였다. 이런, 또 독일이군.

비행기가 멈춰 서자 금연 사인이 꺼지고 천장 스피커에서 나지막이 음악이 흐르기 시작했다. 어느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게 연주하는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이었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늘 그랬듯 나를 혼란에 빠트렸다. 아니, 그 어느 때보다 격렬하게 마구 뒤흔들어 놓았다.


# 김난주 역 / 한양 출판 1993 <노르웨이 숲>

제1장

나는 그때 서른일곱 살이었고, 보잉 747기의 좌석에 앉아 있었다. 그 거대한 비행기는 두터운 비구름층을 뚫고 강하하여, 함부르크 공항에 착륙하려는 참이었다. 11월의 싸늘한 비가 대지를 검게 적시며, 우장을 한 정비공들과, 밋밋한 공항 빌딩 위에 세워진 깃발과, BMW의 광고판과 그런 모든 것들을 음울한 플랑드르파(Flandre파: I5~I7세기, 플랑드르를 중심으로 활약한 화가들. 충실한 자연 관찰과 격정적 표현이 특색. 반 아이크 형제, 브리겔, 루벤스 등이 대표적=역주) 그림의 배경처럼 보이게 하고 있었다. 쳇, 또 독일이야, 하고 나는 생각했다.

비행기가 착지를 끝내자 금연 사인이 꺼지고, 천장에 달린 스피커에서 자그마한 소리로 BGM(Back Ground Music: 배경음악) 이 흐르기 시작했다. 그것은 어느 오케스트라인가가 감미롭게 연주하는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Norweigian Wood)>이었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늘 그랬던 것처럼 나를 혼란에 빠뜨렸다. 아니, 여느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격렬하게 나를 뒤흔들며 혼란스럽게 했다.


# 유유정 역 / 문학사상사 1989 <상실의 시대>

[제1장, 18년 전 아련한 추억 속의 나오코]

그때 서른일곱 살이던 나는 보잉 747기의 한 좌석에 앉아 있었다. 거대한 비행기는 두터운 비구름을 뚫고 내려와, 함부르크 공항에 막 착륙하려 하고 있었다.
11월의 차가운 비가 대지를 어두운 장막으로 감싸고 있었고, 비옷을 걸친 정비공과, 민둥민둥한 공항 빌딩 위에 나부끼는 깃발들 하며, BMW의 광고판 같은 이런저런 잡다한 것들이 플랑드르파 화가들의 음울한 그림의 배경처럼 보였다. 드디어 또 독일에 왔구나, 하고 나는 생각했다.

비행기가 착륙하자 금연 등이 꺼지고 기내의 스피커에서 조용한 배경 음악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건 어떤 오케스트라가 감미롭게 연주하는 비틀스의 <노르웨이의 숲(Norwegian Wood)>이었다. 그리고 그 멜로디는 늘 그랬던 것처럼 나를 혼란 속에 빠뜨렸다. 아니, 다른 때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로 격렬하게 내 머릿속을 뒤흔들어 놓았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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