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키 '쥐의 3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 양을 쫓는 모험

by 마루

첫 소설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다음에 발표된 『1973년의 핀볼』 , 세 번째 소설 『양을 쫓는 모험』은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 3부작', 또는 '쥐 3부작'이라고 불린다. 등장인물이 같다는 이유 때문이기도 하고 스토리가 연결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독립적인 하나의 작품으로 봐도 손색이 없다. 물론 지금의 하루키와 비교해 보면 일종의 '습작'정도로 느껴지기도 하지만 말이다. 나는 어찌 된 일인지 이 초기 3부작을 좋아해서 몇 번씩 읽었다. 물론 제일 좋아하는 작품은 '세계의 끝과 하드보일드 원더랜드'이지만, 이 3부작은 왠지 나의 어린 시절을 보는 듯 순진하고 어설프지만 뭐든지 할 수 있을 것 같은, 하루키가 대 작가로 성장하기 전 한 사람의 내면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그의 비밀을 알아버린 기분이 들게 하는 작품들이다. 이 초기의 3부작을 면밀히 들여다보면 그 후 하루키의 작품들의 키워드가 모두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1.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완벽한 문장 같은 건 존재하지 않는다. 완벽한 절망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으로 시작되는 제일 첫 문장을 소리 내어 따라 읽어 본다. 무라카미 하루키를 군조 신인상을 받으며 데뷔하게 해 준 소설이다.

왜 하필 바람이었을까? 바람이란 무엇인가? 모든 것을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 우리는 젊은 날에 사랑을 하고, 방황을 하며 격정적인 시간을 보내지만 그건 한 줄기 바람일 뿐이고, 시간이 흘러간 후에는 슬픔과 허무만이 남는 것이라고 하루키는 말하는 걸까.


남풍이 실어 온 바다 내음과 불타는 듯한 아스팔트 냄새가 나로 하여금 오래전에 여름을 연상하게 해 주었다. 여자의 피부 온기, 오래된 로큰롤, 갓 세탁한 버튼 다운 셔츠, 풀의 탈의실에서 피운 담배 냄새, 희미한 예감...... 모두가 언제 끝날지 모르는 달콤한 여름날의 꿈이었다. 그리고 어느새 여름(언제였던가?). 꿈은 두 번 다시 돌아오지 않았다.


1978년 어느 봄날, 진구 구장에서 야구르트 스왈로즈의 경기를 보던 하루키는 느닷없이 무언가 쓰고 싶었다고 했다. 와세다 대학 영화연극과에 다니면서 시나리오를 쓰려고 시도하다가 '나는 그런 능력을 갖추지 못했다'라고 생각하고 절필을 선언한 후 몇 년이 지났을 때였다. 하루키가 응원했던 야쿠르트 선수들은 열심히 그라운드를 뛰었고, 그는 열심히 소설을 썼다. 봄에 쓰기 시작한 소설은 그 해 가을에 완성되었다. 야쿠르트 스왈로즈는 29년 만에 첫 우승을 일궈냈고, 29살의 하루키는 첫 소설을 완성했다.

어느 누구도 쓰지 않았을 정도로 심플하게, 심플한 언어를 쌓아, 심플한 문장을 만들고, 심플한 문장을 쌓아, 결과적으로 심플하지 않은 현실을 그리는 것. 그것이 그가 원하는 것이었다. 그것으로 되었다고 생각했고 군조에 자신의 첫 소설을 응모한 후 그는 잊었다. 최종 심사에 올랐다는 전화를 받고 하루키는 '어이가 없고, 기뻤다'라고 말한다. 서른 살 봄날의 아침이었다. 소설로서 문제점이 많다는 여론도 있었지만 결국 그는 군조 신인상을 받았고 그로부터 그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다음 소설 <1973년 핀볼>과 <양을 쫓는 모험><댄스 댄스 댄스> 등에서 풀어놓는다.


여름방학 때문에 도쿄에서 고향인 고베로 잠깐 돌아온 '나'와 고향에 있었던 친구 '쥐'의 건조하고 허무하기만 한 10여 일간의 일들. 바에서 맥주를 마시고 감자튀김을 먹으며 주크박스에서 오래된 로큰롤을 듣고, '쥐'가 쓰는 소설 이야기를 하며 새끼손가락이 없는 여자와의 짧은 만남이 이 책의 내용이다.

일반적인 기승전결을 기대하면서 읽으면 아주 재미가 없다. 다만, 문장 하나하나 그 자체를 즐기며 공감한다면 이 소설은 반드시 베스트 목록에 오를 것이다. 퇴근 후 식탁의자에 앉아 맥주를 마시며 그저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고 싶은 분량만큼 쓰면서 완성한 소설이니, 우리도 맥주 한잔 하면서 마음 편하게 읽기에 딱 좋은 그런 소설이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이다.

하나의 계절이 문을 열고 사라지고 또 다른 계절이 또 하나의 문으로 들어온다. 사람들은 황급히 문을 열고 이봐, 잠깐 기다려, 할 얘기가 있는데 깜빡 잊었어, 하고 소리친다. 그러나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없다. 문을 닫는다. 방안에는 벌써 또 하나의 다른 계절이 와 의자에 앉아서 성냥을 켜고 담배에 불을 붙이고 있다. 잊어버린 말이 있다면 내가 들어줄게, 잘하면 전해 줄 수 있을지도 몰라, 하고 그는 말한다. 아니, 괜찮아, 별로 대수로운 건 아니야, 하고 사람들은 말한다. 바람소리만이 주위를 뒤덮는다. 대수로운 일이 아니다. 하나의 계절이 죽었을 뿐이다.

'세상에 완벽한 문장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렇다면 이 세상에 완벽한 인생도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닐까.



2. 1973년의 핀볼


나 자신이 이 소설에 대해서는 깊은 애착을 느끼고 있다. 이 작품을 쓸 때는 쓰고 싶어 견딜 수가 없었고, 술술 써나갔다. 작품이 자립하여 홀로 서기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 무라카미 하루키 -

내가 초등학교 다닐 때 아버지께서 외국에서 사다 주신 조그만 게임기(엄밀히 말하자면 여자아이인 내게 그것을 선물하려고 사 오신 것은 아닌듯하고 아마도 아버지께서 무료함을 달래시느라 샀던 것일 게다) 쇠로 만들어진 조그만 볼을 튕겨서 미로를 요리조리 빠져나가 점수가 쓰인 어느 곳으로 들어가는, 그것이 일종의 미니 핀볼 게임이었다. 나는 핀볼을 그렇게 조그만 미니 게임기로 처음 알았고 이 소설에 등장하는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십'처럼 실제로 핀볼 게임을 해 본 경험은 없다. 그러나 시종일관 소설을 읽으면서 핀볼 게임을 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떠나질 않았고, 어쩌면 삶이란 핀볼 게임과 닮았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삶은 핀볼 게임과 같구나. 우리가 얻는 것은 아무것도 없구나.'

'나'는 친구와 번역 사무소를 공동으로 운영하면서 안정된 생활을 하고 있지만 늘 학창 시절 연인이었던 나오코를 생각한다. 소설은 그녀에 대한 회상으로 시작한다. 스무 살이었던 1969년 어느 봄, 나오코는 언제나 개들이 산책을 하고 있다는 자신의 고향 기차역에 대해서 이야기를 해 준다. 그리고 우물의 이야기도.(상실의 시대에 등장한다.)
그녀가 죽은 후 '나'는 1973년 어느 봄날 그 기차역을 찾아가고 그 주위를 산책하는 개를 만난다. 집으로 돌아오면서 '이제는 잊어버리자'하고 자신에게 말한다. 하지만 죽음이 끝이 아니기 때문이었을까? 무엇하나 끝내지 못한 '나'는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나오코의 죽음이라는 상실 위에 다른 이야기가 전개된다.

1973년 현재 '나'의 아파트엔 어디서 왔는지 모를 쌍둥이 자매들이 살고 있다. 편의상 '208''209'라고 티셔츠에 쓰여있는 번호대로 부른다. 세 사람은 이상한 동거를 하기 시작하는데 그녀들이 끓여주는 커피와 팬케이크를 먹고 함께 골프장을 산책하면서 하루하루를 보낸다.


한편 '나'와 700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사는 '쥐'는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고향에서 아버지가 마련해 준 맨션에 살면서 제이스 바에서 역시나 맥주를 마시면서 빈둥거린다. 여자 친구를 만나도 어디서 기인한 것인지 모를(하루키는 명확한 사실 도출을 하지 않는다) 무력감과 고뇌에 빠져 있다. 그러다가 여자 친구와도 헤어지고 마침내 그 도시를 떠날 결심을 한다.

1970년 겨울, '나'는 친구인 '쥐'와 함께 핀볼 게임에 열중해 있었다. 그런데 제이스 바에 있던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십'이란 이름의 핀볼 머신이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는 그 핀볼 머신으로 최고의 기록을 세우고, 그것은 또 스리 플리퍼 스페이스십(그녀)의 최고 기록이기도 했다. '나'는 그 핀볼 머신을 여자라고 생각했고 그녀와의 밀월을 잊을 수가 없었다.

1973년 '나'는 그 핀볼 머신을 수소문하던 중 알게 된 스페인 강사의 주선으로 어느 수집가의 거대한 창고에서 그녀(스페이스십)와 재회를 한다. 그리고 핀볼 머신과 마지막 대화를 나누는데 그것은 바로 나오코와 나누는 대화이다. 이제는 그녀를 놓아줄 그런 순간이기도 한 것이었다. 그리고 그녀들, 쌍둥이들도 그의 곁을 떠나간다.


테네시 윌리엄스는 이렇게 썼다. 과거와 현재에 관해서는 있는 그대로. 미래에 관해서는 '아마'이다라고. 그러나 우리들이 걸어온 어둠을 돌아볼 때, 거기에 있는 것 또한 불확실한 '아마'에 불과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우리들이 확실하게 자각할 수 있는 것은 현재라는 순간에 지나지 않는 셈인데, 그것조차 우리들의 몸을 그저 스쳐 지나갈 뿐이다.
"무얼 생각하고 있지?" 쌍둥이 중 하나가 물었다.
"아무것도."라고 내가 말했다. 그녀들은 내가 준 스웨터를 입고, 종이봉투에 넣은 트레이너 셔츠와 약간의 갈아입을 옷을 겨드랑이에 끌어안고 있었다.
"어디로 가?"라고 나는 물었다.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가는 것뿐이야."
우리는 벙커의 모래밭을 넘어 팔 번 홀의 곧바른 페어웨이를 건너, 노천 에스컬레이터를 걸어서 내려갔다. 굉장히 많은 수의 참새들이 잔디 위라든가 철망 위에서 우리들을 바라보고 있었다.
"잘 표현할 수는 없지만, "하고 내가 말했다. "너희들이 없어지면 굉장히 쓸쓸해질 거야."
"우리들도 마찬가지야."
"쓸쓸해."
"하지만 가잖아?"
둘은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돌아갈 곳은 있는 거야?"
"물론이야."라고 하나가 말했다.
"그렇지 않으면 가지 않아."하고 또 하나가 말했다.
우리들은 골프장 철망을 넘고 숲을 빠져나와, 버스 정거장 벤치에 앉아서 버스를 기다렸다. 일요일 아침의 정거장은 굉장히 조용했고, 온화한 햇살이 차 있었다. 우리들은 그 햇살 속에서 말 잇기를 계속했다. 오 분 정도 돼서 버스가 오자 나는 둘에게 버스 요금을 주었다.
"또 어딘가에서 만나자." 하고 내가 말했다.
"또 어딘가에서."라고 하나가 말했다.
"또 어딘가에서."라고 또 하나가 말했다.
그것은 마치 산울림처럼 내 마음속에서 얼마 동안 울리고 있었다.
버스 문이 딱 하고 닫히고 쌍둥이가 유리창으로 손을 흔들었다. 모든 것이 되풀이된다...... 나는 혼자서 같은 길을 되돌아와, 가을 햇살이 넘치는 방에서 쌍둥이가 놓고 간 '러버 솔'을 듣고 커피를 끓였다. 그리고 하루 종일 유리창 밖을 지나가는 11월의 일요일을 바라보았다. 모든 것이 비쳐 보일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고요한 11월의 일요일이었다.


가슴속에 꽉 들어차 있는 과거의 물이 출렁이는 '나'와, 과거가 통과해 버려 텅 빈 가슴만 남은 '쥐'의 이야기는 이렇게 끝을 맺고 또 다른 이야기는 3편인 『양을 쫓는 모험』에서 시작된다. 다음 작품에서는 '쥐'의 고뇌가 무엇이었는지 더욱 확연이 도출된다.

『양을 쫓는 모험』은 말할 것도 없고 『상실의 시대』의 나오코를 만날 수 있고 『댄스 댄스 댄스』 (물론 이 작품은 3편인 <양을 쫓는 모험>의 미흡한 부분을 완성했다고 하루키는 말한다) 『스푸트니크의 연인』등.. 그 후 익숙한 작품들의 키워드를 발견하는 재미도 쏠쏠한 작품이다. 정확한 표현인지 몰라도 이 소설을 읽는 것이 마치 핀볼 게임을 하고 있는 것과도 같은 그런 느낌이 든다. 그리고 하루키가 풀어놓은 퍼즐을 맞추는 느낌도 갖게 된다.(이후 작품들을 먼저 읽었다면 그 퍼즐들은 쉽게 풀린다)

하루키는 이 작품 <1973년의 핀볼>을 부엌에서 태어난 두 번째 소설이라고 했다. 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부엌의 식탁에 앉아서 쓴 작품이라 그리 부르는 것이다. 이 작품을 끝으로 하루키는 전업 작가가 되었고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양을 쫓는 모험』의 사이에 끼어서 존재감이 희박해진 분위기지만 스스로 애착을 갖고 있는 작품이라고 했다. 그렇듯 하루키의 작품들 중에서 그다지 부각된 작품은 아니지만 꼭 읽어봐야만 하는 작품이 바로 『1973년의 핀볼』인 것이다. 읽고 난 후, 앞으로 펼쳐질 하루키의 테제를 알 수 있는 그런 소중한 작품이다.



3. 양을 쫓는 모험


나는 강을 따라서 하구까지 걸어가 마지막으로 남은 50미터 정도 되는 모래사장에 앉아 두 시간 동안 울었다. 난생처음 그렇게 울어 보았다. 두 시간 동안 울고 나서 겨우 일어설 수가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할지는 몰랐지만, 어쨌든 나는 일어서서 바지에 묻은 고운 모래를 털었다. 날은 완전히 저물었고, 걷기 시작하자 등 뒤에서 파도 소리가 조그맣게 들렸다.


하루키의 소설을 읽을 때는 첫 장을 넘기고 별다른 내용이 시작하지 않아도 이미 그의 글에 푹 빠져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하는데, 이 작품은 초기 두 작품에 비해서 스토리텔링까지 한결 강화가 되어 그 흡인력은 실로 대단하다. '쥐 3부작'이라 불리는 시리즈의 완결 편이다.


이 작품은 여러 가지로 하루키에겐 기념비적인 작품인데, 첫 장편소설이고, '피터 캣'이라는 재즈바를 그만두고 전업작가로 나선 후 처음으로 쓴 작품이다. 또 영어로 번역된 첫 소설도 바로 『양을 쫓는 모험』이다. 무엇보다 이 작품을 쓰고 나서 하루키는 앞으로 소설가로서 잘해나갈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가질 수 있었다고 한다. 막연하게 머리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양손으로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을 것이다.

하루키 씨는 왜 하필 '양'이냐는 질문을 많이 받았다고 하는데 우연한 기회에 그냥 "양에 관한 소설을 쓰자"라고 생각하고 제목과 소재만 정해놓은 상태로 무작정 홋카이도로 취재여행을 떠났었다고 한다. 모든 소설가들의 작품이 그러하듯이 시작은 자신이 했겠지만 나중에는 스토리가 저 홀로 걷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하루키 자신도 이 소설의 끝을 알 수 없지 않았을까 싶다. 후에 이 작품만으로는 무언가 설명이 부족함을 느낀 하루키는 속편으로 『댄스 댄스 댄스』를 쓰게 된다.

친구와 동업을 하던 번역 사무소는 번창한다. 광고일도 함께하면서 '나'의 생활은 안정된 듯했지만 아내와는 이혼을 하고 늙은 고양이 한 마리와 살고 있다.
많은 사람이 볼 수 있도록 해달라며 친구인 '쥐'가 편지와 함께 보내온 양의 사진으로 무심히 어느 기업의 PR 지를 만든다. 그 PR 지 때문에 어느 우익단체 거물의 비서라는 사람이 찾아온다. 그는 사진 속의 등에 별 모양이 있는 양을 한 달 안에 찾으라고 으름장을 놓는다. 그 양을 찾지 못하면 모든 것을 잃게 될 것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귀 모델을 하는 여자 친구와 홋카이도로 떠난다. 신비한 능력이 있는 여자 친구의 제안으로 돌고래(이루카) 호텔에 머물게 되고 그 호텔에서 양박사를 만나 양에 얽힌 사연을 듣게 된다.

양이 있는 사진 속의 배경은 바로 '쥐' 아버지 소유의 목장이었고, '나'는 별장에 묵으면서 양의 가죽을 뒤집어쓰고 다니는 양 사나이를 만난다. 그 후 '나'는 유령이 된 '쥐'를 만나 맥주를 마시면서 자초지종을 듣는다. 우익 거물의 몸에서 나온 양은 쥐의 몸속으로 들어갔고 쥐는 양이 자신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양을 삼킨 채로 목을 매고 자살한 것이다. 양이 원했던 것은 쥐를 이용해서 우익 거물의 권력기구를 이어받게 하고 무정부 상태의 관념의 왕국을 세우려고 했었다는 것이다. 쥐가 양의 그 요구를 거부했던 것은 자신의 나약함이 좋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들은 영원한 작별을 한다.


나는 나의 나약함이 좋아. 괴로움과 아픔도 좋고, 여름의 햇살과 바람의 내음과
매미의 울음소리, 그런 것들이 좋아. 참을 수 없을 만큼 좋아.
너와 마시는 맥주와 ……


'나'는 상실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속해 있는 세상, 허무하지만 그래도 살아야 하는 세상으로 돌아온다.

상행 열차는 열두 시 정각에 출발한다. 플랫폼에는 아무도 없었고, 열차의 승객도 나를 포함해서 네 사람뿐이었다. 그래도 오래간만에 보는 사람들의 모습은 나를 안심시켰다. 어쨌든 나는 삶이 있는 세계로 돌아온 것이다. 설사 그것이 따분함으로 가득 찬 평범한 세상일지라도 그것은 나의 세계인 것이다.


'양'은 아무 의미가 없다고 하루키는 이야기했지만, 미국에서 출간되었을 때 이 소설을 '정치적 소설'로 보았을 정도라면 양은 과연 어떤 의미가 있을까? 양은 우리에게 유익한 역할을 하고 있지만 그 생태환경은 굉장히 지저분하고 더럽다고 한다. 작품 속에서 양이 몸속으로 들어왔다가 빠져나간 사람은 지나간 시간에 대한 아무런 보상도 없고 살 수 있는 이유마저 없어지게 된다. 이것은 바로 낡은 관념이나 아집, 개인의 치부를 의미하는 것인데, 현실에서 너무나 온순하고 나약함의 대명사가 되었던 양은 권력을 향한 강한 집념으로 파멸을 향해 가는 그런 존재로 그려지고 있다.

'쥐'도 죽었고, 이 작품의 첫 장면도 아무 하고나 자던 옛 여자 친구의 죽음으로 시작하듯이 하루키의 소설은 死소설이라 할 정도로 죽은 사람이 자주 등장한다. 그렇다면 하루키는 죽은 사람에게 친근감을 느끼는 것일 게다. 이미 죽은 '쥐'와 얘기를 나누는 '나'는 그 어느 때보다 '쥐'에게 친밀감을 느끼고 안타까움을 느낀다. 전작들('바람의 노래를 들어라', '1973년의 핀볼')에서부터 빈 껍데기만 남아있는 듯했던 쥐는 『양을 쫓는 모험』에서는 세상의 혼돈을 쓸쓸히 혼자 희생하며 막아내는 외로운 인물로 그려진다.


에필로그에서 '나'는 잃어버린 해변에서 눈물을 흘린다. 누구에게나 잃어버린 원풍경이 존재하기 마련이지만 하루키의 이 풍경은 우리에게도 그 쓸쓸함이 고스란히 전해져 온다.


서글픈 풍경이었다. 그러나 도대체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이곳에서는 이미 새로운 규칙이 세워져 새로운 게임이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
아무도 그것을 멈출 수는 없다.

하루키가 나고 자란 효고현 아시야의 매립된 바다는 『1973년의 핀볼』에서 '쥐'가 보고 느꼈던 생선 내음도 바다내음도 사라진 풍경으로 그려지고 있고, 그의 단편 「5월의 해안선」에서도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 이 풍경은 바로 고도 자본주의 사회로 가면서 잃어버린 우리의 고향 모습이다. 더 풍요로워지는 대신 바다는 점점 더 매립되어 가고 마음에 들진 않지만 이 사회가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더 슬픈 현실은 그 사회 속에서 (하루키를 포함한) 우리는 살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주인공이 우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생각해 보면 그것은 아마도 새롭게 태어나기 위한 의식이자 절차였을 것이다.



흔히 무라카미 하루키의 초기작은 벚꽃이 지는 허무함을 그렸다고 한다. 한창 하루키에 빠져 있을 때 인생의 허무함, 무상함에 매몰된다고 걱정의 소리도 많이 들었다.(내 글에서 그런 허무의 끼가 있다고 문예지 평론가는 말한다) 지금은 하루키에서 어느 정도 빠져나와 그를 본다. 젊은 하루키를 좋아해서인지 그의 최근 소설들은 읽기는 하지만 빠지지는 않는다. 그것은 하루키가 늙은 것인지 아니면 내가 늙은 것이다. 아니 작가와 독자 모두 늙은 것일 게다.

하루키가 젊음과 결별을 선언한 작품이 나는 『해변의 카프카』라고 생각한다. 소년이 사건을 겪으면서 어른이 되는 그 이야기가 하루키의 변화를 예고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젊은 하루키를 구별할 때 나는 『해변의 카프카』를 기점으로 나눈다. 어쨌든 나는 지금도 젊은 시절의 하루키를 곁에 두고 읽는다. 그 시작이 '쥐의 3부작'이다.


금요일 연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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