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선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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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ODD

나는 위선자가 되었다.

언제부터인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으나.

아마 따지고 보면 사람을 만나기 시작했던 25살.

그 전까지의 내 신념은 완벽했고, 그 전까지의 나는 그 신념에 몰입할 수 있었다.


지난 내 신념에 대해서 이야기 하기 전에 당신에게 묻고 싶다.

당신이 생각하는 이상적이고 완벽한 인간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가.

내가 이해한 그 모습은 위엄이다.

인간으로서의 위엄.

크고 작은 욕망에 휘둘리지 않으며 생물과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잃지 않고 사고를 멈추지 않는 차가운 머리로 더 나은 다음으로 나아가는 인간이 내가 그렸던 완벽한 인간의 모습이다.


나는 쉽게 화가 나지 않는 사람이다.

화를 내는 날 본 사람은 가족 이외에 한 명도 없다.

난 사람들이 보통 화를 낼 만한 만한 부분에서는 화나지 않았지만, 추한 인간을 보며 인간의 위엄을 잃어가는 것을 볼 때면 화가 났다

예를 들어 엄마 아빠가 나 때문에 싸울 때도 내가 화났던 이유는 그들이 부모로서의 위엄을 잃어가는 모습을 내게 보였기 때문이었다.


욕구에 휘둘리는 인간만큼 보기 추한 것도 드물다.

그래서 어려서부터 욕구에 대한 반감이 컸던 것 같다.

다만, 이제 와서 잘못된 점을 따져보자면 모든 욕구를 하나로 묶어서 부정했다는 것이다.

지금은 어느 정도의 욕구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 어느 정도의 욕구를 인정한 지금의 나는 꽤 인간답게 살고 있다.


이제야 차가운 시체에 따뜻한 피가 흐르는 것 같다.


그런데 문제는 여기에서 생겼다.

머리에 각인된 욕구를 부정하는 신념과 이제 막 받아들이기 시작한 욕구가 마찰을 일으킨다.


사실 나도 원하면서, 사실 나도 좋아하면서.


나도 이제 인간이 되었다.

내가 이제껏 부정하고 밀어냈던 욕망을 따르는 어른이 됐다.

다만, 더러워질 준비가 되었나 확신은 없다.

아직은 이게 더럽게 느껴지지만, 내가 이곳에 뛰어들어 나 또한 더러워진다면 더 이상 이걸 더럽다고 느끼지 못하겠지.

그럼, 모든 게 깨끗해 보일 거야.

아니, 아마 비겁한 나는 적당히 더러워지고 여전히 더 더러운 것들을 가리키며 난 아직 깨끗하다고 합리화를 하겠지.


그렇게라도.


나는 늘 같은 생각과 같은 말을 뱉으며 살아왔지만, 달라진 나로 인해서 이제 이 말들은 위선자의 합리화에 지나치지 않게 됐다.

그렇게 나는 위선자가 되었다.

그래서 2주 전에 올렸던 글을 하루가 채 지나기 전에 내렸던 것이다.

그때 내린 글을 이번 글 마지막에 이어 붙여서 다시 올릴 예정이다.

그리고 이런 이야기도 이제 못하겠지.


이제 나도 그쪽으로 넘어갈 테니.




[3/31에 발행했다가 내린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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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상용 인간



내게 보였던 인간은, 그 모습에 가장 걸맞은 단어는 게걸스러움이었다.

좋고 나쁘고를 판단하기 이전에 그저 존재 자체가 그냥 게걸스럽게 느껴졌다.

애초에 생물이란 존재는 피할 수 없는 시간에 녹여져 계속해서 잃어간다.

그렇게 잃어버린 것들을 다시 채우기 위해서 주변을 일그러뜨리며 게걸스럽게 빨아먹는다.

존재 자체로도 더러움이 묻어나고 아무리 닦고 씻어도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다시 더러움이 온몸을 감싸다 못해 뚝뚝 흘러 주변을 지저분하게 만들었다.

마치 달팽이가 지나간 자리에 기분 나쁜 진액이 남는 것처럼.


난 내가 어떤 사람인가 규정되는 게 싫었다.

아니, 애초에 사람으로 규정되는 게 싫었다.

그래서 행동에 제약을 뒀다.

내가 하는 행동이 내 의식과 무의식에 영향을 끼치고 난 그 행동에 걸맞는 존재가 되어가니까.


‘쟤는 원래 그랬던 얘야. 너는 원래 그랬었잖아.’


난 내가 어떤 존재였는지 기억될 것을 크게 염두애 두고 젊음을 사용하지 않는 사람으로 살아왔고 살고 있다.

난 누구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걸까.


일종의 반항이다.

내게 활기 넘치는 신체를 주고 어리숙한 정신을 주더라도 난 그걸 빌미로 여기저기에 굴러다닐 사람이 아니라는 인간의 본능에 대한 반항이다.


사람이 약하면 착한 건지 아닌지 알기가 어렵다.

사람이 가난하면 검소한 건지 아닌지 알기가 어렵다.

사람이 멍청하면 순수한 건지 아닌지 알기가 어렵다.

사람이 늙으면 여유가 생긴 건지 시간에 굴복한 건지 알기가 어렵다.


그래, 사람이 늙으면 여유가 생긴 건지 시간에 굴복한 건지 알기가 어렵다.

그래서 나는 내 증명을 시작할 무대로 젊음을 선택했던 것이다.


난 그 말이 그렇게 싫었다.


젊어서 아직 철이 없을 때 저질렀던 실수.


이 말을 들을 때면 젊음을 면죄부로 사용하며 실수한 사람들끼리 서로를 위로하려는 것 같았다.

난 그 위로가 불쾌하고 필요 없다.

난 저지른 실수가 없으니까.


그들은 꼭 자신이 여러 명인 것처럼 행동한다.

그들은 온전한 자신 하나를 담아내지 못하여 몇 년에서 몇십년 단위로 스스로를 잘라 사용하는 것 같다.

그들은 마치 지나버린 시간에 책임도 같이 묻어두고 오는 것처럼 행동한다.

여기서의 책임은 딱히 법이나 도덕관념에 관한 게 아니다.

본인 스스로에 대한 떳떳함이다.


돌려서 말하니까 시원찮다.

난 인간이, 젊음이 난잡하다고 생각한다.

욕망 자체에 대해서 거부감을 느꼈지만, 그중에서도 성욕에 대해서 특히 그랬다.

고심하고 신중하게 선택된 판단이 아니라, 외로움과 성욕이라는 자력에 이끌려 몸과 정신을 주체하지 못하는 그 모습이 싫었다.

왜 싫었냐면 부러웠다.

왜 부러웠냐면 난 그렇게 가볍게 행동할 수가 없었으니까.

왜 그렇게 행동할 수 없었냐면 내가 그렇게 행동해버리면 더 이상 그들을 혐오할 때 그들과 나를 분리할 수 없었으니까.

왜 그들을 혐오했냐면 그들이 나보다 더 인간답고 짐승답고 본능에 충실한 정답 같았으니까.

신념의 유무를 떠나서 그들은 젊음을 알차게 사용하고 있었으니까.

그들이 젊음을 사용할수록 사용되지 않는 내 젊음이 버려지는 것 같았으니까.

그들의 웃음이 내 고뇌를 부정하는 것 같았으니까.

그들이 인간다움에 한 걸음 다가갈 때, 나는 멈춰 섰고 심지어는 뒷걸음질을 쳤다.

그렇게 내 고집은 더 얽매여 갔다.


나 아직 젊은가, 늙지는 않았는가.

96년에 태어났다.

아마 대부분의 사람에게 젊은이로 불릴 수는 있을 것 같다. 아직은.

그럼에도 내 고집은 13년이 되어간다.

그리고 27년 동안 내 젊음은 사용된 적이 없다.


이대로 늙어버리면 신념을 지킨 내가 기뻐할까.

기뻐하는 나는 누굴까.

지금이라도 자기합리화와 고집을 풀고 젊음을 사용하면 나아질까.

나아진 나는 내가 맞는 걸까.


내가 당신을 미워한다면 그건 부러워서 그래요.

내가 약해서 자기합리화 없이는 견딜 수 없어서 그래요.

내가 미안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