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일 한국 영화가 열풍이다. 오징어 게임에 이어 영화 지옥이 다시 각 국 넷플릭스 상위 랭크를 차지하여 한류 열풍을 이어 나갔다. 지옥 같은 경우는 오징어 게임과 달리 조금 심오하고 철학적으로 우리에게 생각해 보게끔 하는 영화였다. 영화 지옥의 핵심은 두려움이다. 신의 심판이란 상황에서 사람들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갖게 되고 이 두려움을 극복하기 위해 합리적인 방법, 또는 비합리적인 방법을 찾게 된다. 이 과정에서 시연에 대한 합리적인 설명을 매개로 권력을 잡은 이가 있었으니 그것이 새진리회였다.
영화 지옥에서 새진리회의 초대 교주 정진수는 '이는 인간이 더 정의로워져라란 신의 메시지'라 설명하며 그 '정의 실현'이란 명분을 매개로 자신들이 권력을 잡는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행동 대장격의 단체로 화살촉이란 단체를 이용하는데, 이 화살촉의 행보는 단지 화살촉의 리더 이동욱의 명령하에 이뤄지고 이 이동욱은 충실한 새진리회의 명에 움직이는 구조로서 운영이 됨으로써 신정정치의 단계가 이룩된다.
여기에 대해 합리적인 의문을 제기한 단체 소도의 공형준 교수는 '이 시연이란 것이 선악행과 상관없이 그냥 초자연적인 현상일 뿐이다'라 말하며 새진리회의 인과론에 대해 의문을 제기하자 화살촉들에 의해 무참하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런 신정정치의 구조. 사실 역사적으로 정말 많은 새진리회와 화살촉들이 존재했다. 이에 대해 조금 알아보도록 하겠다
1) 중세 마녀사냥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간 흑사병
14c 유럽에 알 수 없는 전염병이 창궐하기 시작했다. 사람이 피부가 검게 되어 죽어간다고 해서 흑사병이라 칭해지기도 했던 이 병은 유럽 인구의 3분의 1을 앗아갔다. 뿐만 아니라 이 시기는 중세 유럽이 점차 농업 국가에서 상업 국가로 점차 전환되고 있는 시점이었다. 상업이 발전하게 됨에 따라 영주들은 동방의 진귀한 물건을 구매하기 위해 농민들에 대해 더 많은 부역을 부과하였고 이에 대해 저항하기 시작한 농민들의 노력의 결과, 농노가 점차 해방되기 시작한다. 영주들은 과거의 자신들의 힘의 상징이었던 장원을 잃어갔고, 그 영주들의 힘을 바탕으로 권력을 유지했던 중세 로마 교황 역시 야심 차게 준비한 십자군 전쟁의 실패 이후 급속도로 성장한 세속 군주에게 밀리기 시작했다.
교황이 주도했던 십자군 전쟁은 철저하게 실패로 끝나게 되었다
그리고 일어난 종교개혁으로 이제 모든 지위를 박탈당할 수도 있다는 종교계의 마지막 해결책은 사람들의 두려움을 이용하는 것이었다. 당시 기근, 30년 전쟁 등 굵직한 전쟁을 경험했기에 지칠 대로 지친 농민들에게 다가온 흑사병은 그야말로 공포와 같았다. 이러한 공포 분위기 속에서 이에 대한 합리적 이유를 마녀에게서 찾는다.
마녀로 인해서 기근 등의 여러 사회질서 혼란 등의 문제와 공동체 질서가 무너진다는 주장을 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북부 프랑스를 중심으로 마녀사냥이 대대적으로 이뤄지게 되었는데 그 수가 30-50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 그 마녀사냥에서 당했던 대부분의 피해자들은 여자였고, 그중에는 9세, 11세의 어린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고 한다. 마녀사냥에서 마녀는 대부분 신고로 인해서 이뤄졌다. 수상한 행동을 하거나 동방의 신비주의 등의 종교관을 갖는 등의 사람들을 마녀로 지목하면 이에 대한 마녀 재판이 이뤄졌다.
이 마녀 재판 과정에서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끔찍한 고문이 자행되었으며 이 과정에서 마녀인 것을 자인하게 되면 화형 시켜 죽였다고 한다. 이 과정에서 마녀 사냥을 통해 교황청은 종교개혁으로 인해 불안정해진 교황권을 안정시켰고 사회에서 사람들은 페스트, 기근 등으로 인해서 형성된 사회 불안을 이러한 끔찍한 방법을 통해 해소할 수 있게 되었다
2003년 들어 교황 바오르 2세는 이 마녀 사냥에 대해 최초로 사과를 하였다. 이로써 거의 4-5세기에 걸쳐 이뤄진 홀러 코스트는 종말 하게 되었다
2) 해방 이후 4.3 사건
43사건 피해자의 시신을 바라보는 유족.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었다. 해방 이후 좌우대립이 절정에 치닫게 된다. 서로가 서로의 이념이 옳다고 주장하는 과정에서 개혁이란 명분 하에 서로의 목숨을 앗아가는 대혼란의 연속이었으며, 미군정의 어설픈 정치 속에서 남한 경제는 그야말로 폭망 하며 혼란의 연속이었다. 이때 서양의 마녀 역할을 한 것은 가장 힘없는 국민들이었다. 그리고 마녀사냥을 이행할 행동 대장격으로 이 서북청년단이 적극 활용되었다. 이 들은 서북지역에서 북한의 토지개혁 과정으로 숙청당해 남으로 내려온 기독교인들이었다. 주로 과거 지주 가문의 후손들로서 북한의 토지개혁과정에서 많은 재산을 뺏겼기에 분노를 표출할 탈출구가 필요했다. 이 들을 이승만, 김구, 장택상은 자금적으로 지원하며 세력화했으며 간단한 훈련을 거친 후 반공 인적 자원으로 적극 활용한다. 하지만 그 방법은 너무 끔찍했다. 그 대표적인 것이 4.3사건이다. 이의 시작은 3.1절 기념식부터 시작된다. 47년 3월 1일 3.1절 기념 제주도 대회 과정에서 기마경찰이 가두시위 중 어린아이를 다치게 하는데 이에 대해 시위하는 민중들을 향해서 발포하여 6명이 사망하고 8명이 부상당하는 사건이 발생한다.
강요백 화백 발포
강요배 화백 31대 시위
이에 대해 부당함을 제기하는 제주도민들이 총파업을 하기 시작했고 이에 대해 당시 조병옥 미군정 경무부장은 경찰의 발포가 정당했음을 알린다. 그리고 조병옥은 점차 서청(서북청년단 출신) 경찰 1000여 명을 투입하여 이 총파업 및 여러 시위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탄압하게 되는데 이 과정에서 2500명의 제주도민이 검거된다. 그리고 이 들에 대해 고문을 자행하는 과정에서 조천 중학생 김용철 군이 고문치사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게 되는데 이를 계기로 4.3 사건이 발생하게 되었다.
4.3 사건은 남로당 소속의 김달삼이 주도하였다 규모는 약 500명 정도로 주로 서청 경찰 등 우익인사들 및 그 가족들을 공격하였다. 미군정은 이 들을 진압하기 위해 기존에 협상을 통해 해결하고자 했던 김익렬 연대장을 해임시키고 박진경 중령을 연대장에 임명하게 된다. 이 작전에 투입하게 된다. 박진경의 주도하에 초토화 작전이 이뤄졌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이후 본격적으로 진압하기 위해 군을 증설하게 되었다. 이때 제9 연대장 송요찬 소령은 해안선으로부터 5km 이상 들어간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폭도로 간주해 총살하겠다는 포고문을 발표했고, 이후부터 집단 살상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진상조사단이 밝혀낸 피해자만 1만 5천 명에 이른다. 이 학살된 민간인 중 15퍼센트가 남로당 무장대에 의해, 85퍼센트가 국가 공권력에 의해 학살을 당한 것이다. 증언에 따르면 토벌대는 자신들의 손에 피를 묻히지 않기 위해 피해자의 가족으로 하여 죽창으로 찌르게 하기도 하고 심지어 9살 아이를 잡고 내려쳐 죽이기도 했으며, 임산부의 배를 가르고, 사람을 과녁으로 사격을 하는 등의 비인간적인 살육의 장의 연속이었다. 경제, 사회적 혼란 속에 권력을 잡기 위한 정치가들의 철저한 계산 속에 공산주의자로 몰린 채 민간인 1만 5천 명이 그렇게 부당하게 학살당한 것이다.
너무 처참한 학살의 현장에 대해 수많은 증언들이 '제주 4.3 사건 진장조사 보고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중에 하나를 발췌해본다
토벌대가 '살려줄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라고 유혹하는 바람에 모두들 나왔습니다....(중략).. 토벌대는 그 아이들의 다리를 잡아 바위에 메쳐 죽였습니다. 인간으로서는 차마 그럴 수는 없는 일입니다.
빌레못굴 생존자 양태병
이때 내던져진 아이의 연령은 5살이다. 이 사건의 실체를 정확하게 보여주는 민간인 학살의 대표적인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제주 4.3 진상 조사 보고서 -피해자 연령별 현황-
한 마디로 철저하게 권력을 유지하기위한 정치적인 행동이었던 것이다. 이승만 정권은 당시 혼란스러웠던 상황 속에서 자신의 권력 유지를 위해서는 강력한 반공체제가 필요했다. 그리고 사람들에게 공산주의란 거대한 두려움을 인식하게끔 하기위해 새로운 공산주의자들을 만들었어야 했고 그 연속선 상에 4.3항쟁의 민간인들이 있는 것이다.
이 들은 군사독재 시절 어떠한 진상조사도 요구하지 못하고 억압받다가, 2000년대 들어 진상조사가 시작되었고 2003년 10 월 15일 처음으로 대통령이 부당한 공권력에 의한 부당한 민간인 학살임을 인정하고 사과를 하였다.
2003년 노무현 대통령은 4.3사건에 대해 사과하였다
3) 나치스트 전체주의
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은 그야말로 폐허였다. 대전 중 인구는 급감하고 산업 시설은 모조리 파괴되었다. 그런 상태에서 독일을 포함한(당시 바이마르 공화국) 대부분의 국가들은 재기에 성공한다. 미국의 자본 차관을 바탕으로 성장한 독일의 경우 외무 재상 스트레제만의 성공적인 대외정책을 바탕으로 미국으로부터 도즈 안, 영안 등의 협상을 통해 차관을 이끌어 냈고 독일의 민주정치를 완성하였다. 하지만 이후 1929년 미국에서 터진 경제공황은 이 모든 상황을 반전시킨다. 미국에 거의 절대적으로 의존적이었던 당시 독일의 경제상황에서 미국의 경제공황은 독일에 엄청나게 큰 혼란을 주었다. 독일 경제는 극악으로 치닫고 있었으며 이런 상황에서 공산주의자들의 폭동이 연일 일어나는 가운데 소자본을 가진 독일 국민들은 자신들의 자산과 인신적인 위해를 가할 수 도 있다는 두려움을 갖게 되었다. 그러한 두려움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단체가 바로 나치즘이다.
독일 나치스트의 수장 히틀러
히틀러는 '반공산주의 반재벌'이란 기치를 내걸며 나치스트 돌격대(SA), 나치스트 진위대(SS)라 불리는 친위대를 차례로 조직하고 공산주의자들을 공격하였다. 히틀러는 곧 엄청난 인기를 끌게 되었고 마침내 1932년 나치스는 총선거에서 제1당이 되었으며 33년에는 히틀러가 수상에 임명되기에 이른다. 그는 반대파를 철저하게 탄압하고 1당 독재체제를 확립했으며 그리고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한 1934년 그는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여 총통의 자리에 오르게 된다.
아유슈비츠 수용소에 수용된 유대인들.
그리고 히틀러 또한 자신의 독재 체제를 안정화시키기 위한 마녀를 만든다. 그것은 바로 유대인이었다. 히틀러는 집권 초기부터 아리아인 중심주의를 내세웠으며 유대인을 희생양으로 삼았다. 그 들의 행동 대장격인 SS는 이 유태인들을 조직적으로 학살하였으며 그 들은 '우리 독일인을 파멸시키려는 이 유대인 민족을 파멸하라'라 주장하며 자신들의 대량학살을 정당화하였다. 그 과정에서 당시 유럽 내에 있던 1100만 명의 유대인들 중에 600만 명이 학살되는 비극이 벌어지게 되었다.
유대인들을 학살한 후 시체를 불로 소각하는 장면.
글을 마무리하며
이번 글에서 역사적으로 어떻게 권력자들이 '두려움'이란 것을 매개로 권력을 잡아왔는지 알아봤다. 어떤 의미에서 이번에 개봉한 영화 지옥은 그러한 권력화 과정을 잘 보여준 영화라고 볼 수 있다. 민주주의는 이러한 권력자들의 권력화 과정을 막을 수 있는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이다. 그러므로 만약 우리가 정치에 대해 무관심해질 때, 즉 권력자들의 부당한 권력화 과정에 대해서 묵인할 때 권력자들은 제2, 제3의 마녀를 만들고자 할 것이며 그 마녀로 인해 사회에 미칠 부정적 영향에 대해 홍보함으로써 우리가 그 들을 두려워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그 두려움을 바탕으로 권력을 유지할 것이다. 우리가 이를 방지할 수 있는 방법은 두 눈을 똑바로 뜨고 견제를 하는 것이라 생각이 든다. 마지막으로 정말 유명한 말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