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참혹했던 인종 학살의 종결일(1월27일)

by 감성소년


#히틀러 #아유 슈비츠 #인종학살 #나치즘 #일본 군국주의



1월 27일 오늘도 나는 어김없이 등산을 간다.



산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존재한다.



나무도 있고 숲도 있고 많은 산 새들도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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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것들을 내가 자유로이 볼 수 있는 이유.


이러한 것을 볼 수 있는 여유가 있는 자유.


그것은 바로 내가 독립된 자주 국가 안에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역사 속에는 그렇지 않은 때가 있었다.


바로 오늘은 그렇지 않았던, 자유가 당연시 않았던


억압 속에서 해방되었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루고자 한다





1. 위대한 게르만이여!



절망의 시대 1919년 독일. 1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한 독일인에게는 절망밖에 없었다.


베르사유 조약은 패전국들은 참여조차 하지 못했고, 독일이 가졌던 식민지는 모두 회수되고


엄청난 액수의 배상금(330억 달러)에 이르렀고 전쟁 후의 전역한 군인들은 실업자의 신분으로


불만이 많은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승전국이었지만 비슷한 상황의 옆 나라 프랑스에서 극우 정치인인


프앙카레 내각이 성립하고 대 독일 강경책을 내세우는 가운데 독일의 루르 지방을 강경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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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당시 현명했던 슈트레제만 외무 재상은 이에 대해서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프랑스의 강경책의 명분을


없앴으며 '로카르노 협정', '도즈 안', '영안'등을 통해서 베르사유 조약을 성실하게 이행한다는 조건하에 배상


금 문제를 원활하게 해결하고 있는 와중이었다. 이 와중에 프랑스의 이러한 과격 행위에 대해서 적대적으로


대했던 세력이 있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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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바로 히틀러였다. 히틀러는 루르 지방을 프랑스가 점령했을 때 뮌헨의 어느 선술집에서 폭동을 일으켜서


감옥에 수감되었다. 그리고 여기서 '나의 투쟁'이란 책을 집필하게 되었고 이것은 이후 나치스트의 필수 서적


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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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레제만의 온건적 정책이 계속되었으면 좋았겠지만 미국 발 경제공황으로 인해서 미국에 거의 전적으로


경제 의존을 하고 있던 독일 또한 경제 문제가 발생한다. 이때 사회주의 폭동이 일어나고 경제는 경제대로 어


려운 상황에서 히틀러는 너무나 명쾌한 해답을 내놓는다


'이 모든 것은 유태인과 공산주의자 때문이다!' 그 후 그는 나치스트 돌격대(SA), 나치스트 진위대(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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를 창설한 후 본격적으로 반공, 반재벌 활동을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의 전략은 먹혀들어가며 1930년 선거


에서 나치는 107석을 확보했고 이후 제1당이 되기에 이른다.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한 후 대통령의 지위


까지 겸인 한 총통의 지위를 가진 히틀러는 드디어 오랫동안 자신이 생각한 '라벤스리움'(독일인이 인간답게


살 공간)을 실현하기 위한 정책들을 하나씩 실현한다



그중에 핵심은 순수 독일인이 아닌 게르만 혈통을 더럽히는(히틀러의 입장에서) 유태인들을 철저하게 탄압 하


는 것이었다. 이는 '뉘른베르크 법'으로 이어진다. 이에 대해서는 밑에 글을 참조해 주시길 바란다.



뉘른베르크 법

독일 내 유태인의 독일 국적을 박탈하고 유태인과 독일인의 성관계와 결혼을 금지하는 한편, 유태인

의 공무 담임권을 박탈한 나치의 법.

1935년 아돌프 히틀러가 직접 서명한 이 문서는 "유태인과 독일인은 결혼할 수 없다"라고 규정하고

"이 법률과 배치되는 결혼은 무효이며 법을 어긴 자는 강제 노동형에 처한다"라는 조항을 담고 있다.

이 법에 따라 나치는 유태인의 공무담임권을 박탈했으며 훗날 홀로코스트라 불리는 유태인 학살의 최

초의 법적 근거가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 뉘른베르크 법 (시사상식사전, pmg 지식 엔진 연구소)


[

한 마디로 유태인은 시민 취급을 하지 않겠다는 말이었다. 그리고 이는 곧 홀로코스트, 즉 대량 인종학살을 위한 전초 단계였던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2차 대전이 발발했을 때, 히틀러는 유태인들을 대량 학살을 하기 시작했다.



그 대표적인 곳이 아우슈비츠 수용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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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아우슈비츠 수용소의 참혹상에 대해서는 너무나 많이 알려져 있다. 그래서 간단히 아래 말을 참조해 주


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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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우슈비츠 피르케 나우(Auschwitz Birkenau)는 독일 제3제국 최대 규모의 강제 수용소였던 곳이다. 수용소의 요새화 된 벽, 철조망, 발사대, 막사, 교수대, 가스실, 소각장 등은 이곳에서 벌어졌던 대량 학살의 현장을 고스란히 보여 준다. 역사적인 연구에 따르면, 대다수가 유대인이었던 1,500,000명의 수용자가 이곳에서 체계적으로 굶주림과 고문을 당한 뒤 살해되었다. 이는 20세기에 인간이 인간에게 저지른 잔인한 역사를 상징하고 있다.


[네이버 지식백과] 아우슈비츠 피르케 나우 - 독일 나치 강제 수용소 및 집단 학살 수용소(1940~1945) [Auschwitz Birkenau German Nazi Concentration and Extermination Camp(1940~1945)] (유네스코 세계유산, 세계유산센터(영/불어 원문))


샤워실에 가둬놓고 독가스를 뿌리고, 교수형에 집단으로 처하게 하고, 집단으로 총살을 하는 등의 잔혹한 방


법으로 약 110만 명의 유태인들을 학살했다(당시 유태인 450만 명)


이러한 방법으로 그 들의 정권을 안정시키고, 자신들의 민족의 우위성을 증명하고자 했던 히틀러는


철저하게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미군과 러시아군의 반격에 의해 수많은 사람들이 폭격에 의해


학살당하고 말았다.


결국 학살은 학살을 낳는다는, 인과응보의 말은 정언인 것이란 것을 이번 경우에도 밝혀졌다...





2. 글을 마치며



2차 세계대전은 인류 세계의 끔찍하고 참혹한 면을 제대로 보여준 것이라고 생각한다.



문제는 독일은 2차 세계대전을 일으킨 주범으로 철저하게 응징당한 후, 새로운 정권이



탄생하여 이러한 참혹한 전쟁 범죄에 대해서 매해 사과하고 있지만,



일본은 당시 동아시아 국제정세로 인해서 A급 전범들이 제대로 재판받지 못하고




hb13%EF%BC%BF2%EF%BC%BF81%EF%BC%BFi1.jpg?type=w1 도조 히데키는 일본 전범 중 유일하게 사형당했다



샌프란시스코 회의에서 주권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hb13%EF%BC%BF2%EF%BC%BF81%EF%BC%BFi5.jpg?type=w1 극동 국제군사재판

그래서 독일은 자신들의 전범 행위를 사과하지만 일본은 자신의 정통성인 일본 제국주의



시절을 부정하지 않는다. 그 시기의 자신들을 부정하는 것은 지금의 자신을 부정하는 것



이기 때문이다. 아마 이 때문에 일본의 독도 영토에 대한 침탈 행위에 대해서 이토록



많은 사람들이 분노하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3.. 마무리하며



금일은 이러한 끔찍한 인종학살이 종결된 일이다. 정말 두 번 다시 있어서는 안 될



인종학 살의 현장이 다시는 되풀이돼서는 안 된다. 그를 위해서라도



국가 간의 협력과 대화가 필요한 시점이다. 현재 미국, 중국 간의 세력 갈등과 러시아가



구소련 시절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를 침공할 야심을 키우고 있는 시점에서



2차 대전 중에 있었던 수많은 인종학살은 전쟁은 곧 더 많은 인류에게 비극을 안겨준다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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