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역사?(1월 31일) 홍경래의 난이 발발하다

by 감성소년


지금으로부터 111년 전.

평안도 지역에서 홍경래의 난이 발발했습니다

서북지역은 일찍이 중국과 국경을 마주하고 있어 전쟁 시에는 전투 지역으로 피해를 많이 입기도 했지만 평시에는 중국과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사람들이 많았는데요!

조선의 마지막 희망인 정조 사후 세도정치기가 되면서 이 들 새로이 부를 축적한 신향들(돈 많은 백성)은 착취의 대상이 됩니다


1800년대 신유박해로 견제세력을 제거한 집권 노론 벽파 세력은 이곳 서북지역의 민들을 수탈 대상으로 삼았으며, 관리 임명에 있어서도 지역 차별을 두었다고 하네요

그리고 당시 조선 내에서 생산된 은이 활발히 수출되었는데 정부에서는 서북민들이 채굴한 은을 잠채, 즉 몰래 불법적으로 채굴했다는, 명분으로 강제로 탈취하기도 합니다. 기존 이곳 접경지역은 조세를 중앙으로 운송하지 않고 사신 접대비로 현지에서 쓰도록 했지만, 약탈에 눈이 먼 탐관오리들에 의해서 많은 조세까지 부과하자 이에 참지 못한 민들이 홍경래를 중심으로 일어난 사건이 홍경래의

난입니다!!


2. 전개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홍경래는 이희저, 김창시, 김사용, 홍총각 등의 지휘부를 비롯하여 군사를 구성하여 평양북도에서 12월 18일에 봉기를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삶이 힘들었던 땅 없는 농민이나 임금노동자들이 많이 참여하게 되어

고 가산, 박천, 태천을 점령하고 곽산, 정주를 점령한 후 의주, 용천까지 감으로써 평안도 일대를 거의 장악하게 되었죠 문제는 이후 한양으로 갈 것에 대해 지휘부 내에서 갈등이 계속되었고 홍경래를 암살하려는 세력이 발생하기까지 합니다 이 과정에서 내부

숙청이 단행되고 세력이 많이 약화되었죠!

결국 12월 29일 박천 송림에서 관군에게 패하고, 정주성으로 퇴각을 했지만 의주 민병

대와 관군의 계속된 공격으로 1812년 4월 19일 에 진압되었습니다.

이때 여자와 소년을 제외한 1,917명이 일시에 처형되었고 지도자들은 전사하거나 참수 되었다고 하네요


정주성 전투 그림(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3. 내 생각


홍경래의 난은 거의 전형적인 지역 차별로 인해서 일어난 농민 봉기입니다.비록 지식인들이 주도를 했으나 상당수 농민들이 호응할 정도로 세도 정치 시기, 권력은 부패할 만큼 부패해있었고, 이를 해결할 의지도 대안도 없었습니다

정부는 이후 이에 대한 근원적인 해결책을 마련하기보다 관련자들을 색출하고 처벌하는 것에만 몰두합니다. 그렇게 세도 정치 시기의 부패는 계속 이어졌고 결국 1860년대 임술 농민봉기란 전국적 단위의 농민 봉기로 이어집니다

이는 부패한 권력이 얼마나 자생능력이 없는지 보여주는 전형적인 사례인 것이죠!


한 가지 더 의의를 찾는다면 이는 오늘날에 많은 교훈을 주는 사례라고 볼 수 있는 것

이 지역 차별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이 들어요!

그 사람에 대해서 제대로 본 적도 없으면서 'oo출신이라서'란 꼬리표가 만들어진 것이


1~2년 전이 아니죠. 우리나라는 1970년대 이래로 지역주의가 팽배했었고, 아직도 여전

히 많은 사람들이 지역에 따라서 사람을 판단하는 고정관념을 갖기도 합니다

단지 서북지역에 산다는 이유만으로 능력이 있어도 관리가 되지 못했던 지식인들이 일

으킨 홍경래의 난은 정치가 통합을 추구하지 않고, 지역 별로, 성별로, 그리고 계층별로

나누는 차별의 정치가 될 시 어떤 결과를 초래하는지 잘 보여주는 사례라고 생각이 듭

니다! 좀 있으면 대선입니다 부디 정치가 차별의 정치가 아닌 통합의 정치를 지향함을

로써 성별로, 계층별로, 연령별로, 지역 별로 갈라져있는 현재의 우리나라에 희망의 노

내가 되길 기원하면서!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54710&cid=40942&categoryId=31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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