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여러분 갬성입니다!
오늘은 2월10일입니다!
조금만 더 버티면 불금이지요!
오늘 2월10일의 역사는 정말 불금처럼
독립운동의 희망의 불을 지피신 김구선생님입니다!
김구선생님은 이 날 '3천만 동포에 읍고함'을 발표하셨습니다. 이에 대해서 알아볼까요?
해방 이후 우리나라는 여운형, 안재홍 주도의 조선인민공화국을 만들고 독자적인 국가를 만들려고 노력했습니다. 하지만 소련과 미국간의 세력 갈등으로 인해서 우리의 의지와 상관없이 3.8도선이 세워지고 3.8도선 이남 지역에서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었던 미군정에 의해 조선인민공화국은 부정되고, 맥아더 포고문을 통해 미군정이 직접 통치하게 됩니다. 이후 모스크바 3상회의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조건으로 이를 수립하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를 개최하기로 했지만 이후 미국측에서 제시한 '신탁통치안(최대 5년간)'이 문제가 되어 좌우대립이 극화되었습니다. 그 가운데 통일 임시정부를 만들기 위한 미소공동위원회가 2차례 모두 결렬되었고 이승만은 남한만의 단독정부를 만들자는 '정읍발언'을 하게 됩니다.
신탁통치
국제연합 감독하에 시정국(施政國:신탁통치를 행하는 국가)이 일정지역(신탁통치지역)에 대하여 실시하는 특수통치제도.
네이버 백과사전 (신탁통치)
무기휴회된 공위가 재개될 기세도 보이지 않으며 통일정부를 고대하나 여의케 되지 않으니, 남한만이라도 임시정부 혹은 위원회 같은 것을 조직하여 38이북에서 소련이 철퇴하도록 세계공론에 호소해야 할 것입니다
이승만 정읍발언 (출처: 네이버 백과사전)
김구는 이전까지 신탁통치에 반대하는 반탁운동을 전개하였습니다. 그런 와중에 통일정부가 만들어질 확률이 점차 낮아지자 그는 3천만 동포에 읍고함을 2월 10일 발표합니다. 일부 내용만 발췌하면 아래와 같습니다
지금에 있어서도 전쟁이 폭발되기만 기다리고 있는 자는 '파시스트'강도 일본뿐일 것이다. 그것은 그놈들이 전쟁만 나면 다시 살아날 수 있다고 믿는 까닭이다. 내가 불초하나 일생을 독립운동에 희생하였다...(중략).. 나의 유일한 염원은 삼천만 동포와 손목 잡고 통일된 조국, 독립된 조국의 건설을 위하여 공동분투하는 것뿐이다.... 나는 통일된 조국을 건설하려다가 삼팔선을 베고 쓰러질지언정 일신에 구차한 안일을 취하여 단독정부를 세우는 데는 협력하지 아니하겠다. 나는 내 생전에 38선 이북에 가고 싶다. 그쪽 동포들도 제 집을 찾아가는 것을 보고서 죽고 싶다.
출처: 백범 김구 평전(시대의 창, 김삼웅 저)
그렇게 이야기한 후, 김구는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에 반대하며 북으로 올라가 4자 요인 회담을 하게 됩니다(김구, 김규식, 김두봉, 김일성). 결과적으로 김일성의 정치적인 계략이었지만, 하지만 그는 정말 마지막까지 통일 한국을 만들기 위해 노력했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노력은 결국 실패로 끝나고 1948년 8.15일 남한에서는 대한민국정부가 9.9일 북한에서는 북조선인민공화국이 세워집니다.
그러던 1949년 6월 26일 12시 36분. 김구가 경교장에서 이른바 육군 포병 하급 장교 안두희에게 암살됩니다.
그의 장례식은 7월 5일 서울운동장(현 동대문운동장)에서 국민장으로 거행되었습니다. 최초의 국민장이라고 하네요. 100만 조객이 운집한 가운데 진행된 장례식은 분노와 애통과 오열로 뒤범벅이 됩니다. 당시 장례 기간동안 경교장을 찾은 조문객이 총 124만여 명에 이른다고 하니 얼마나 당시 국민들이 김구를 존경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글에 밝히지 않았지만 사실 김구의 생애는 정말 조국의 독립을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광복 이후 그의 몇번의 정치적 실수로 입지를 잃게 되었고 결국은 통일 정부를 지향하다가 암살을 당하셨습니다. 독립운동 중에는 이운환이라는 자에게 피습을 당하셔 가슴 옆에 총을 맞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임시정부를 굳건히 지키셨고, 해방 이후에도 마지막까지 통일 조국을 그리다 결국 피살다하셨죠. 현재 남북한의 대립이 극화되고 있는 가운데, 통일 정부를 지향하고 문화 강대국을 지향하고자 했던 김구 선생님의 정신. 왠지 생각이 드는 하루입니다.
이상으로 포스팅 마치겠습니다!
좋은 하루 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