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발렌타인데이죠!
혹시 발렌타인데이의 유래를 아시나요?
로마군 내에서 황제가 결혼 금지령을 내렸는데
성발렌티노스란 주교가 몰래 결혼 주례를 했다고 하네요.
이 과정에서 적발이 되어 처형된 날이 발렌타인 데이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는 이에게 초콜릿을 주는 거죠
근데 이 밖에 오늘 2월 14일은 특별한 날입니다
바로 안중근 의사가 사형선고를 받은 날이지요~
이에 대해 알아보겠습니다!
본관은 순흥(順興)이며,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었습니다. 가슴과 배에 7개의 점이 있어 북두칠성의 기운에 응하여 태어났다는 뜻으로 아명을 응칠이라 지었습니다. 근데 안중근의사가 어릴 때 너무 성격이 다혈질적인 면모가 있는 것을 보고 할아버지가 좀 더 신중하게 행동하라는 의미에서 안중근으로 이름을 개명합니다
안중근은 을사늑약 체결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을 합니다. 1906년 삼흥학교를 세우고 인재양성에 힘썼었으며, 1907년에는 연해주에 가서 의병운동에 참여했습니다. 하지만 100명의 부하를 이끌고 두만강을 건너 국내로 침투, 일군과 격돌하였으나 중과부적으로 패배하게 되었죠. 그 이후 노에프스키에서 '대방공보'란 신문에 글을 씀으로써 계몽운동에 힘쓰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안중근은 국운이 거의 다 할 무렵이었던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처단하기로 결심하고 동의단지회를 결성했습니다. 동지 우덕순과 조도선, 유동하의 도움으로 이토 히로부미가 온다는 하얼빈 역으로 갔었죠. 동지들과 계획을 짜고 이토가 온다는 하얼빈 역에 잠입하여 역 플랫폼으로 갔습니다. 이후 올리는 세 발의 총성
'탕! 탕 ! 탕!'
안중근은 놀랍게도 단 3발의 총알로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하고 하얼빈 총영사 가와카미 도시히코, 궁내대신 비서관 모리 타이지로등을 중상입힙니다. 그의 사격술이 엄청났다고 후에 백범 일지에 김구는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거사 이후에 자리를 뜨지않고 태극기를 들며 다음과 같이 이야기합니다
코레아 우레 코레아 우레 코레아 우레(대한 독립만세)
그는 이후 뤄순 감옥으로 가게 됩니다. 여기서 많은 취조와 공판을 받게 되었죠. 이 때, 그가 했던 말들이 아직 기록에 남아있습니다. 그 내용을 일부 아래에 발취하겠습니다.
내가 이토를 죽인 이유는 이토가 열다섯 가지 죄를 지었기 때문이오. 첫째는 대한 제국의 명성 황후를 죽인 죄요, 둘째는 고종 황제를 강제로 물러나게 한 죄요. ······넷째는 죄 없는 한국인4)을 무수히 죽인 죄이며, 다섯째는 대한 제국의 정권을 강제로 빼앗아 통감 정치 체제5)로 바꾼 죄이고, ······열네 번째, 대륙을 침략하여 동양의 평화를 깨뜨린 죄이며, 열다섯 번째 죄는 일본 천황의 아버지를 죽인 죄요. 그러니 어찌 그자를 죽이지 않을 수 있겠소?
그리고 재판에서도 그는 당당하게 자신을 포로로 대우하라고 합니다. 아래와 같은 이야기를 안중근은 재판 중에 이야기했다고 합니다.
내가 이토를 죽인 것은 나 한 사람의 원한 때문이 아니오. 대한 제국의 독립과 나아가서 동양의 평화를 위한 사명이기 때문이었소. 내가 이토 히로부미를 죽인 것은 한국 독립 전쟁의 한 부분이요, 또 내가 일본 법정에 서게 된 것도 전쟁에 패배하여 포로가 되었기 때문이오. 그러니 나를 만국 공법6)을 근거로 처리해 주시오. 나는 전쟁 포로일 뿐이지 범죄자가 아님을 명심하시오.
[네이버 지식백과] 안중근 의거와 한일 병합 (처음 세계사 8 - 제국주의와 제1차 세계대전, 2016. 7. 19., 초등 역사 교사 모임, 한동훈, 이희은)
그러다 결국 2월 14일 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되었으며 3월 26일 그는 숨을 거두게 되었습니다.
안중근 의사는 처음 러일전쟁 당시 일본을 응원했다고 합니다. 그 것은 일본이 동양의 평화를 지켜줄거라 믿었기 때문이라고 하는데요.
그 발언을 했던 이토 히로부미가 러일전쟁 이후 변심을 하고 대한제국을 병탄하려는 움직임을 보이자 그는 '내가 속았구나! 내가 한 행동에 내가 책임을 지겠다'라 하며 그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이행하게 됩니다.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의 초대 총리로써 조선의 1대 통감이기도 하지요. 그런 상징성있는 인물을 안중근이 죽였다는 것은 일본의 침략에 대한 한국인의 저항을 보여준 사건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이후 35년간의 독립운동이 지속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그와 같은 애국심을 가진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기반이 되었던 거의 최초의 의거활동인 하얼빈 의거.
하지만 여전히 일본은 자신들의 전범의 역사를 반성하지 않고 여전히 독도에 대한 영유권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제는 초등학교 때부터 체계적으로 교육을 해서, 한국이 일본의 땅 다케시마를 강제 점령하였다고 적어놓고 있습니다.
여전히 그 들은 전범들이 모여있는 야스쿠니 신사에 주요 정치인사들이 해마다 가고 있으며, 극우적 발언을 통해 지난 날 침략의 역사를 자랑스러워하고 있는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안타깝지만 국제관계란 역관계에서 일본은 정통성때문이라도 위와같은 행동을 계속할 것이라고 생각이 듭니다. 여기에 대항하기위해서라도 우리가 우리 역사를 사랑해야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 조국을 정말로 사랑하고 자신까지 희생하였던 안중근 의사!
이러한 행동이 여전한 가운데 국가의 원수를 죽이고 마지막까지 동양평화를 주장했던 안중근의 모습은 현재 우리에게 여전히 많은 교훈을 준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안중근의 나라를 사랑하는 마음. 우리가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그의 어머니가 그에게 전한 편지 일부를 발췌하며 글을 줄이도록 하겠습니다!
옳은 일을 하고 받는 형(刑)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걸하지 말고 대의에 죽는 것이 어미에 대한 효도다.
출처: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1122561&cid=40942&categoryId=33384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596622&cid=59011&categoryId=59011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3613781&cid=47307&categoryId=47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