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의 성격을 알기 위해서라면 이승만, 박정희를 알아야하듯이, 지금의 중국을 알기위해서라면
덩샤우핑을 알아야한다는 말이 있는데요!
그의 삶에 대해서 알아보겠습니다
1. 일제시대 독립운동가, 국공 내전에서 승리의 주역, 그리고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역경까지
청년시절 등소평(중국명 덩샤오핑)
덩샤오핑은 항일 무장투쟁부터 마오쩌뚱과 대장정을 함께한 중국 공산당의 핵심 인물입니다. 열여섯 살이 되던 해인 1918년, 프랑스로 유학을 떠난 그는 그곳에서 평생의 신념으로 삼은 칼마르크스를 알게 됐습니다. 1921~1924년에는 파리에서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고, 이후 모스크바의 중산대학에서 공부하다 귀국해 1927년부터 공산당 지하운동에 참여했습니다. 1933년부터는 마오쩌둥을 지지하면서 대장정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항일전 내내 공산당의 팔로군에서 정치위원을 지냈고, 1949년 장강 도하 작전과 난징 점령을 지휘하여 중화인민공화국(중국) 수립에 공을 세웠습니다.
이후 그는 마오쩌뚱에게 신임을 받으며 점점 성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공산주의 체제 내에서 자본주의적 시장경제를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한 실권파의 일원이었고, 이에 급진적 공산주의화를 추구하는 모택동과의 약간의 갈등이 있었습니다. 모택동은 전설의 대약진운동을 통해서 중국 내 아사자(배고파 죽은 사람) 2000만명을 야기하고 이에 대한 책임으로 물러납니다. 이에 권력을 잡은 유소기와 등소평은 조정정책이라 하여 급진적 공산주의정책에서 일부 시장경제적 요소를 도입한 경제 체제를 만듭니다. (사람들에게 일부 소유권을 인정하고, 공동 생산 체제를 완화했음) 하지만 문제는 이 것에 대해 위기를 느낀 모택동이 문화대혁명을 통해서 다시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유소기는 제거되고 등소평 역시 실각하게 됩니다. 이후 4.5운동이 있었고 다시 권력을 잡은 등소평. 그는 본격적으로 시장경제를 도입하는 정책을 실시합니다.
2. 개혁개방정책으로 자본주의를 도입하다
권력을 장악한 등소평(덩샤오핑)
그는 문화대혁명 이후 정변을 통해 권력을 장악하였습니다. 그리고 당대회에서 문화대혁명을 내란으로 규정하였고, 이후 시급했던 경제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습니다. 과거부터 그는 실권파로써 자본주의적 시장경제요소를 도입해야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가 권력을 집권한 후 서양 5개국에 시찰단을 파견하여 자본주의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에 이릅니다.
이후 실시한 개혁개방정책으로 인민공사를 통한 집체 생산과 공동 분배를 폐지하고, 호구 단위로 생산 도급제를 실시하여 생산하고 분배함으로써 농민들이 생산에 적극적이었습니다. 그리고 향진 기업(민간 기업)을 장려하고 발전시켜 농촌의 소득을 향상시켰습니다. 또, 이를 바탕으로 기업에서도 도급제를 도입하여 기업의 자주권을 확대시켜 시장 경제를 도입하였습니다. 이와 같은 개혁으로 노동자와 농민들이 생산에 적극성을 보이게 되고, 공업과 농업 분야에서 빠른 성장률을 보이게 되었습니다.
외국인의 투자를 유치하기 위하여 1980년에 중앙은 광동의 심천, 주해, 산두와 복건의 하문에 경제 특구를 시험적으로 설치하였습니다. 그리고 1984년에 대련, 천진, 상해, 광주등 연해의 14개 도시를 개방하고, 다음 해에는 장강 삼각주, 주강 삼각주 등 강변의 경제 개발구를 개방하였습니다.
그 결과, 1978~1990년의 국민 총생산은 3,588억 원에서 17,400억 원으로 증가되었고, 국민 소득도 3,010억 원에서 14,300억 원으로 증가되었습니다. 공업 생산은 4,237억 원에서 23,851억 원으로, 농업 생산은 1,397억 원에서 7,662억 원으로 늘어났으며, 그 발전 추세는 중단되지 않고 고속 성장을 지속하였습니다.
3. 2차 천안문 사태(천안문 64항쟁)
2차 천안문 사태인 64항쟁이 일어난 지금의 천안문
하지만 이에 대한 문제도 적지 않았습니다 문화대혁명 이후 중국 내 젊은 이들이 위주가 되어 민주화에 대한 요구가 강해지기 시작했습니다. 거기다가 당시 소련에서는 고르바초프가 등장하여 민주적 제도의 일환으로 다당제를 보장하고, 표현의 자유를 제공하는 정책을 실시했습니다. 이에 중국 내에서도 1당 독재체제가 아닌 민주화 정책이 필요하다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거기다가 개혁개방 정책 이후 시장경제가 도입되면서 빈부격차가 심해지기 시작했고, 관료들의 부정부패가 많아지자 이에대한 불만이 많아지기 시작했습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읽은 몇몇 관려들이 민주화 요구를 수용해야 한다고 주장을 했지만 등소평은 이를 거부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민주화 요구에 대해 어느정도 긍정적으로 생각했던 '호요방' 당총서기가 원로들의 압력에 의해 1987년 사임을 하게 되었고, 이후 1989년 호요방(중국명 후야오방)이 심장 마비로 죽게되자(4월 15일) 이를 추모하는 행사가 열리게 되었다. 이 때 천안문 광장에는 100만명의 민중들이 모였고 평화적으로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했습니다.
천안문 광장에 100만명이 모였었다.
하지만 등소평(덩샤우핑)은 이에 대해 아래와 같이 이야기하며 강경진압을 지시합니다.
피해는 최소화해야 하지만, 어느 정도의 피는 반드시 봐라!
결과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사건에서 무장경찰 및 탱크를 동원하여 엄청난 희생자들을 양산하게 됩니다. 기록에 따르면 중국 공산당에서는 시위대를 진압한 인민해방군 측에 공로를 치하하며 인민해방군 1,000명이 희생되었으나 시위대는 27명이 죽었다고 당초 보도했었지만, 이후에 중화인민공화국 공안부가 1990년 7월 10일 제5차 국무원 보고에서 정식 발표한 것에 의하면, 민간인 사망자는 875명, 민간인 부상자는 약 14,550명이었으며, 인민해방군과 무장경찰은 56명이 사망, 7,525명이 부상당했다고 합니다. 다만 뉴욕 타임스 지에서는 400명에서 800명, NSA에서는 약 1,000명, 중국적십자에서는 2,600명, 시위대의 주축을 이룬 학생들은 7,000명이 넘게 죽었다고 하며, 부상자 수는 진압에 나선 중국 인민해방군을 포함해 약 7,000명에서 10,000명으로 추산됩니다.
탱크에 맞서는 용감한 민주 투사
이후 중국은 미국, 프랑스등 선진국에 대해 엄청난 비방과 함께 무역재제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10%이상의 경제성장을 이룸으로써 이러한 재제를 극복하고 말아버리죠. 결국 이러한 독재체제는 유지하면서 경제성장을 이룬 것입니다.
4. 내 생각
등소평이 곧 중국입니다. 등소평은 이후 학교에서 공산주의 교육을 철저하게 하면서 2차 천안문 사태를 내란으로 규정하였습니다. 그러면서도 '경제 성장을 위해서는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반드시 필요하다'고 말하면서 자신의 독재 정권을 정당화하였습니다. 그리고 이후 그가 은퇴하고 지금의 시진핑에 이르기까지 모든 중국의 체제는 이 등소평의 체제를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제 중국은 G2에 이르는 경제 대국이 되었습니다. 그에 걸맞는 군사력도 갖추었고 겉모습으로는 경제, 군사, 문화적 역량을 갖춘 대국이 된듯 합니다. 하지만 이에 맞지 않는 문화적 미숙성. 중국은 여전히 독재 정부의 형태를 갖고 있으며, 철저한 당 통제식 교육을 통해 창의적인 교육이 이뤄지고 있지 않습니다. 여전히 중국 공안의 강력한 재제하에 지나친 정부 비판하는 자에 대해서 감시와 통제와 검열이 이뤄지고 있습니다. 그 끝에 지금 중국 동계베이징 올림픽이 있는 것입니다. 사실 저는 개막식 때부터 충격을 받았습니다. 한복을 입은 여성이 나타났다는 것 자체에. 중국은 과거부터 동북공정이라하여 한국의 고구려, 발해사를 자국사로 편입시키고자 하였습니다. 뿐만아니라 최근에는 문화공정까지 일어나 김치, 한복등 한국의 독자적인 문화까지 자신의 영역으로 만들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파렴치한 행동에도 불구하고 중국 내 사회 어디에서도 비판의 목소리는 나오지 않고 오히려 민족주의적 감정을 더 부추기는 발언들이 중국 sns 넘쳐납니다. 그럴 수 있었던 배경이 바로 이 등소평 이후 1당 독재체제가 완성되었기 때문입니다. 민주화는 실패했지만 경제 성장은 성공했던 이러한 정통 하에 당의 권위는 오직 경제 성장으로서 모든 것이 증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때 당시에도 문제였던 부정부패와 빈부격차는 여전히 중국 사회 내에서 핵심문제로 자리잡고 있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후진성을 갖고도 중국은 G2란 명함에 어울리는 나라일까 싶습니다. 부디 중국이 이웃과 공존할 수 있고 자국민들의 자유를 존중할 수 있는 민주적인 나라가 되기를 바라면서 글을 마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