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대표 33인이 체계적인 민중지도에까지 이르지 못하고 바로 경찰에 자수하며 분산적인민족운동으로 끝나버리게 됩니다.
그리고 이 민족운동이 비폭력운동으로 그쳤다는 점도 크나큰한계였죠. 이 중에서 첫번째 부분(비조직적)에 주목했던 여러 만주 및 재외 독립운동가들이
체계적인 독립운동을 위해서 설립한 것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입니다.
사실 기존에도 임시정부는 3곳이 있었습니다.(초기에는 7곳)
일단 기본적으로 한성에 있는 한성정부, 그리고 연해주에 있는 대한독립의회와 상해 임시정부가
그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이 임시정부의 좀 더 체계적인 독립운동 주도륵 위해선 반드시 하나로 통합할 필요성이 있었고, 이에 하나로 통합하는 운동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 결과 3권분립의 민주공화정의 형태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탄생하게 됩니다(4월11일)
2.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구성
기본적으로 대한민정부는 3권분립에 입각한 공화정체제였습니다.
3권분립이니 당연히, 입법, 행정, 사법부가 존재했겠지요. 당연히 있었습니다.
입법부의 역할을 맡은 임시의정원, 그리고 행정부의 역할을 맡은 국무원, 그리고 사법부의 역할을 맡은 법원까지 해서 권력분립의 원칙을 지켰습니다.
그리고 초대 대통령으로 이승만, 국무총리로 이동휘가 선출되었습니다.
임시정부의 최종위치는 상하이였습니다. 그 이유는 임시정부의 주 전략이 외교독립론이었기 때문입니다.
외교독립론: 서양 열강과의 외교활동을 통해서, 열강의 도움하에 독립을 쟁취한다는 의미
이를 위해서 미국에는 구미위원부, 프랑스 파리에는 파리위원부등을 두어 외교활동을 하였고( ex 파리강화
회의에 김규식 파견)
그리고 국내에 연통제와 교통국을 두어 조직적으로 독립운동을 하고자 노력했습니다. 동시에 경제적인 문제를 해결하고자 연통제에서는 '독립공채'를 발행하고 이를 명분으로 의연금을 모금했고,
아일랜드 출신의 독립운동가 조지 루이스쇼가 운영하는 이륭양행에서도 임시정부를 지원했습니다.
이륭양행
이 밖에 부산의 독립운동가 안희제 선생님이 세우신 백산상회등에서도 지원을 했습니다.
역사 사료를 제작하기 위한 사료 편찬소와 기관지인 독립신문등을 간행하였고 군사적인 활동은 거의
전무하였지만 참의부를 휘하 소속 군 기관으로 두고자 했습니다.
백산 안희제
하지만 그 활동 결과는 처참했습니다. 1920년대부터 이미 일본은 임시정부의 활동에 눈독을 들여놓고 있었으며감시를 강화합니다. 그 결과 국내에 있던 모든 연통제, 교통국이 발각되어 1922년에 모두 해산되었습니다.
그리고 하와이에서 자본을 지원하던 박용만 선생님은 이승만의 획책에 넘어가 하와이로부터 오는 송금줄도 끊기게됩니다.
이승만은 박용만선생님이 이끄는 대조선국민군단이란 단체의 운영권과 자금 운영권을 장악하고자 하와이 주지사에게 하와이에 테러리스트가 있다라 고변했고 이를 계기고 대조선국민군단을 인수하고 그 자금권을 사적으로 운영함으로써 대조선국민군단에서 임시정부로 들어가는 돈이 끊기게 됩니다 ㅡㅡBAD BOY seung man lee
출처: 갬성소년의 머리(이승만 평전 인용)
거기다가 이승만 대통령은 임시의정원의 동의도 얻지않고 단독으로 미국에 국제연맹에 위임통치를 부탁하는 청을 했습니다.
이에 임시의정원의 모든 의원들은 분노를하게 되었고, 이후 임시정부의 존재 필요성에 대해서 의문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많아지자 이 활동 재개 여부를 두고 국민대표회의가 열리게 됩니다.
이 임시정부를 해체하고 새로운 정부를 새우자는 창조파(대표 신채호), 그리고 그대로 임시정부를 존속시키되 개혁을 하자고 주장한 개조파(대표 안창호)간의 치열한 논쟁이 있었고, 그 결과 창조파 의원들이 탈퇴하고 연해주로 가게 되었습니다.
이후 임시정부는 이승만을 탄핵하고 박은식을 새로운 국무령으로 새웁니다. 그리고 여러 개혁을 가했지만 임시정부는 한동안 침체기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이에 김구 선생님은 임시정부를 활성화시키기위해서는 의열투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고 이에 창설한 것이 한인애국단입니다
이봉창, 윤봉길 의사의 의열투쟁이 있었고 그 중 윤봉길의사의 훙커우 공원에서의 폭탄 의거는 당시 상해사변의 제 1대대장이었던 사라카와를 폭사시키는 등 혁혁한 공을 세워 국민당 대표였던 장제스로부터 '중국국민 5000만이 해내지 못한 것을 조선인 1명이 해냈다'란 찬사를 듣기도 했습니다. 이후부터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의 전폭직인 지지를 얻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당장에 닥쳐온건 바로 김구선생님을 체포하겠다는 일본이었습니다. 일본은 미친듯이 김구선생님을 잡기위해서 상해를 뒤졌지만 김구선생님과 임시정부 사람들은 몰래 상해를 빠져나옵니다. 결국 돌고 돌아 충칭에 안착한 김구선생님.
광복군 oss 특수부대원
그 곳에서 다시 충칭 임시정부의 대표로서 한국광복군 창설, 건국강령발표, 대일본선전포고등의 활동을 전개하였으며 연합군과 연대하여 동남아시아 등지에서 활동을 계속 이어나갔습니다.
하지만 임시정부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김구가 그토록 학수고대하였던 국내진공작전은 일본의 예상보다 빠른 패망으로 성공하지 못했으며 광복 이후 발언권을 얻지 못하고 미국, 소련의 열강의 손아귀에서 정치가 운영될 수 밖에없는 비극을 마련하게 됩니다.
3. 내 생각
임시정부의 활동을 비하하는 무리들이 많이 생기고 있습니다 . 이러한 무리들은 임시정부의 활동을 폄하하면서 건국절을 이야기하자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하지만 어디까지나 우리나라의 헌법에도 명시되어있듯이 한국의 정통성은 임시정부 수립으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임시정부 수립을 이야기하지 않고서는 우리는 자주적으로 공화정을 지향했던 정부라는 점, 그리고 일제의 여러 탄압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주권을 지키기 위해 최선을 다한 점등을 인정받지 못하며 우리는 언제나 강대국에 의해서 움직여온 수동적이고 소극적인 국가로 전락하고 말겁니다. 사실 제가 일제시대 들어가기 전에 학생들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 '쌤 이 많은 거 왜 외워야 해요...'라는 질문에 저는 언제나 최태성선생님이 하셨던 말을 인용해서 하는 말이 있습니다
얘들아 너희 이 영역이 다 빠진다 생각해보자. 그럼 우리 시험범위도 줄어들고 정말 좋겠지. 하지만 얘들아. 조금만 더 깊게 생각해보겠니 만약 이 영역이 빠지게 되면 앞 페이지에 일본의 그토록 많은 수탈과 억압에도 우리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했던 민족이라는 이야기가 나오지 않겠니? 그것보다는 우리가 이러한 수탈과 저항에 정말 미친듯이 저항했던 흔적들이 있다는 것을 이 페이지들의 여러단체를 통해 아는게 좀더 이후에 우리의 마음에 좀 더 나라에 대한 자긍심과 우리 선조들에 대한 고마움으로 가득차있지 않겠니?
라 말을 합니다. 실제로 최태성선생님이 한 이야기이기도하구요..... 만약 이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없었다면, 김구와 김원봉등의 독립운동가들이 카이로 회담에 가기전의 장제스를 만나지 않았더라면 과연 카이로 회담에 참여했던 루즈벨트, 처칠은 동방의 작은 나라 한국에 대해서 독립이란 단어를 언급했을까요?
절대 아니라고 봅니다. 장제스가 주장했던 조선의 독립 명시는 김구와 김원봉의 설득하에 가능했었고 그 것이 가능했던 이유는 김구 김원봉등의 독립운동가들의 노력이 엄청났다는 것을 장제스도 알기에 이 설득을 듣고 반영했던 것이었을 겁니다. 식민지시대, 수탈과 약탈로 이등신민으로 살아야 했던 서러움의 역사 속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자 노력했고 조국의 독립을 기리기위해서 목숨을 바쳤던 사람들의 이야기. 그 사람들이 만든 희망이란 단어. 대한민국 임시정부.
오늘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지 103년이 지난 해입니다!
이 날을 우리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임시정부의 최고의 업적이라 할 수 있는 윤봉길 의사가 두 아들에게 보낸 편지를 끝으로 글을 마무리짓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