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갑습니다 잇님들! 갬성입니다!
오늘은 4월 13일 입니다! 호헌조치로도 유명하기도 하며
미국 최고의 사상가인 토마스 제퍼슨의 생일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동시에 오늘의 주제인 낭트 칙령실시이기도 합니다!
프랑스는 상파뉴 정기시등 국제 무역이 과거부터 활성화된 지역이었습니다.
국가간 교역이 잦았고, 동서교역이 많았다보니 동방의 문화가 자연스럽게 전달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동방의 이원론적 신앙이 들어오게 되었고 이에 따라 프랑스 남부지방에서는
기존 가톨릭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시도하는 형태의 종교가 많이 생기게 됩니다
카나리파, 카도리파와 같은 형태의 새로운 종교가 등장하자 기존 구교, 가톨릭계에서는
이를 위기로 삼아 이단으로 몰아서 탄압하였습니다.
하지만 가톨릭 고위성직자가 재산을 축적하고 결혼을 하는등의 문제가 많이 발생하자
결국 16c 종교개혁이 일어났고, 또 다른 칼뱅파란 형태의 신교가 등장하여 유럽 전역으로 퍼지고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과거부터 충실한 가톨릭 국가였는데요.
이 신교가 남부지역을 중심으로 확산되자 이 들에 대한 탄압이 점차 강해집니다
이 남부 지역에 대표 주자였던 사람이 나바르공 앙리였으며
기존 가톨릭의 대표는 바로 기즈공 앙리였습니다. 이 구교, 신교에 대한 갈등이 점차 심해지게 되었고,
이에 앙리3세는 자신의 딸과 나바르공 앙리와의 결혼을 추진합니다.
하지만 이 들간의 성스러운 결혼식 중 구교도들이 습격을 하게 되고
이 후 약 일주일동안 3만명이 죽는등의 비극이 발생합니다
이렇게 신구교간의 갈등이 치열해지는 과정에서 결국 구교의 대표였던
기즈공 앙리와 신구교간의 갈등을 무마시키려고 했던 앙리3세가 동시에 암살되었고
이에 새로운 왕위 후보자로 나바르 공 앙리가 즉위하게 되었습니다.
이후 나바르공 앙리가 즉위하여 앙리 4세가 되었습니다.
앙리4세는 일단 신구교간의 갈등을 해결하는데 주력하였습니다.
신교도였던 앙리4세는 '프랑스 파리에서는 성사할 가치가 있다'고 말하며
가톨릭으로 개종합니다. 이를 통해 자신에 대한 반발세력을 약화시킨
앙리4세는 낭트칙령을 실시합니다.
① 기정사실로 인정한 곳에서의 위그노의 예배의식 집행은 용인되나 파리 시내에서는 금한다.
② 위그노에 대하여도 재산상속 ·대학입학 ·관리취임의 권리를 인정한다.
③ 이미 8년 전부터 위그노가 장악한 요새는 이후에도 신앙상의 안전지대로서 장악함을 허가한다.
④ 구 ·신 양교도 간의 분쟁을 심리하기 위하여 가톨릭교도 10명, 위그노(신교도) 6명으로 구성된 특별법정을 파리 고등법원 내에 두며, 신 ·구교 같은 수의 인원으로 구성된 특별법정을 세 곳의 지방고등법원 내에 설치함을 인정한다
[네이버 지식백과] 낭트칙령 (두산백과 두피디아, 두산백과)
이렇듯 신교도에 대한 종교적 자유를 인정한 앙리4세.
그는 이 밖에도 프랑스의 산업과 농업을 부흥시켰으며 새로 성장하는 상인 세력을 수용하고자 하였습니다
동시에 그는 폴리틱파(politic)란 실용주의적 관료들을 등용하여 관념적이고 종교적이었던 프랑스에
실리적인 문화를 불어넣어 프랑스 사회 전반에 활력을 주려하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많은 노력에도 불구하고 그가 특히나 노력하였던 신구교간의 대립은 해결되지 못했습니다.
그는 1610년 프랑스의 라바이악에게 암살당하면서 생을 마감합니다.
루이 13세
그의 아들이었던 루이 13세가 그를 계승합니다. 그는 아직 어렸기에
실권자였던 리슐리외가 권력을 장악하고 정치를 하는데요. 리슐리외는
앙리4세의 정책이었던 낭트 칙령을 부분적으로 약화시킵니다.
신교도들에 대한 정치적 권리를 박탈하게 되었죠
그리고 루이 14에 이르면 낭트칙령을 폐지됩니다.
그러면서 당시 프랑스의 많은 기술자, 소상공인들이 주변국 네덜란드와 영국등으로 건너가게 되었고
이에 프랑스가 기술 발전이 더뎌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영향은 아마 조금은 영국 산업혁명 시기에 비해서 프랑스의 산업 발달이 늦어진 이유이기도 할 겁니
다.
자신과 생각이 다르다고 믿는 사상이 다르다고 탄압받았던 시절은 어제 오늘이 아닙니다
심지어 지금 이 지구촌 저 먼 지역에서는 자신과 피가 다르다고 인종 탄압을 받는 곳도 너무도 많습니다.
이러한 인종, 성별, 계층, 지역등으로 차별받는 것이 지양되고 조금씩 화합의 장을 이루어 갈때, 그 사회를
문화적으로 성숙한 국가라고 합니다.
생각해보면 역사적으로 정말 잘 나갔던 국가들은 다 이 문화적 성숙 국가에 해당했습니다.
중세 이슬람이 잘 나갔을 때에도 그러했구요. 이슬람인들은 가톨릭 국가였던 서유럽을 정복한 뒤로도
인두세만 내면 종교적 저유를 허용해주는 문화가 있었습니다. 그 만큼 문화적으로 성숙했다는 말이죠.
(반면 서유럽의 십자군은 예루살렘을 정복한 후 1만명에 가까운 이슬람 사람들을 학살합니다)
이러한 맥락으로 사회의 성숙도를 보면 될 듯 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는 지역으로 성별로, 그리고 종교등으로 차별받는 많은 사람들이 존재합니다.
이러한 차별이 지양되는 사회. 우리가 지향해야 할 사회가 아닐까요.
이상으로 글을 마칩니다!